‘흙수저’ 스무살 여자들의 진짜 삶과 꿈…한국 성장영화 계보를 잇다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21) 고양이를 부탁해
감독 정재은(2001년)
“스무살, 섹스 말고도 궁금한 건 많다.” 일명 ‘복고영화’로 불리던 남자들의 성장담과 이승을 떠도는 여귀들의 공포물이 한 흐름을 형성하기 직전, <고양이를 부탁해>는 이처럼 도발적인 문구로 21세기의 문을 열었다. 이 영화는 확실히 달랐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무살 여자들은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도, 원한에 사로잡힌 귀신도 아닌 현실 속 우리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이들은 중심부에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의 본거지는 서울이 아닌 인천이었고 그들의 신분은 대학생이 아닌 상업고등학교 졸업생이었다. 그들은 백수거나 계약직 직원이거나 가난한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그들에게는 기댈 학벌도 부모의 재력도 특별한 재능도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들의 정체성을 하나의 범주로 획일화하거나 영화 변방으로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각각에게 구체적인 서사를 부여하며 스무살 여자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들이 놓인 ‘삶의 조건’을 스크린 위에 살려냈다. 한국 성장영화의 계보에서 전무후무한 성취였다.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과감하고 감각적인 시도가 돋보였다. 주로 조폭영화의 배경으로 소모되기 일쑤였던 인천은 스무살 여자들의 내면을 세련되게 무대화하는 풍경이 되었다. 인물들의 동선과 함께 흐르던 오리지널 스코어는 섬세했고 이들 사이에 오가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화면에 띄운 방식은 당시로서는 신선한 도전이었다. 작위적인 설정을 경유하지 않고도 스무살 여자들의 일상적이고 심리적인 공기를 체감하게 하는 순간들이 이 영화에는 가득했다.
집을 박차고 나와 친구와 함께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이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적어도 그때, 그들에게는 부모의 집을 버리고 삶의 행로를 선택할 의지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20여년이 흐른 현재, 한국 독립영화 속 20대 여자들은 하나같이 집 바깥으로 ‘내몰려’ 홀로 생존을 견디고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꿈은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일까.
남다은/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