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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가방엔 5억, 골프 가방엔 3억…촘촘한 가방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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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코 가방’ 메야 멋쟁이지

1990년대 너도나도 멘 유학생 가방

정치인, 가방은 이미지 변신 도구

이젠 군인의 전술 가방도 유행 아이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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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과 유학길의 동반자 이민 가방. 사진 쌤소나이트 제공

‘어떤 형태의 것이든 가방은 움직임을 예고한다.’ 공항에서 가방이 바뀐 남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은희경 작가의 단편 <불연속선> 중 한 대목이다. 한국인의 삶에 얽힌 다양한 가방들과 예상치 못했던 가방의 쓸모, 가방에 담긴 의미를 모았다.

이민 가방과 여행 가방의 숨겨진 얘기

‘삶의 기반을 바꾸는 움직임’에 ‘이민 가방’이 있었다. 검은색 나일론 재질에 각이 잡히지 않고 흐물흐물한 대형 짐 가방은 1960년대 말부터 본격화된 해외 이주의 동반자였다. ‘이민 가방’이라는 표현이 신문에 처음 등장한 때는 1983년께다. 이즈음엔 별다른 설명 없이도 ‘이민 가방’ 하면 낯선 외국에서 기반이 잡힐 때까지 쓸 살림살이와 팔아서 돈이 될 만한 물건을 꽉꽉 채운 검은색 가방을 떠올렸다. 1993년 금융실명제 이후, 이민 가방은 다른 용도로 뉴스에 등장한다. 뇌물용 현금을 담을 큰 가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1997년 기사에 따르면 이민 가방 하나엔 5억, 골프 가방에는 3억의 현금이 들어갔다고 한다. 5만원권이 발행되기 이전이다.


이동이 쉽도록 바퀴를 단 짐 가방을 발명한 이는 1972년 미국 특허를 낸 버나드 새도다. 바퀴와 가방의 유구한 역사를 생각하면 둘의 결합이 50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바퀴 달린 여행 가방과 관련한 특허를 찾다가 낯선 이름을 발견했다. 김화숙. 제주도 애월읍 출신의 재일 한국인이다. 논픽션 작가 노무라 스스무는 취재 길에 동행하던 카메라맨에게 뜻밖의 사실을 전해 듣는다.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의 발명자가 가방회사 ‘마루에 에코’ 김화숙 사장”이고 “특허를 땄기에 (가방 브랜드) 쌤소나이트에서도 특허료를 지불한다”는 것. 그는 바로 김화숙을 찾아갔다.


“쌤소나이트 회장에게 (내 발명품) 이야기를 했더니, 미국인들은 가방을 차에 싣고 다니니까 바퀴는 필요 없다고 하더군요. 얼마쯤 쌤소나이트도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을 만들었어요.” 김화숙이 스스무에게 한 말이다. <일본 일본인이 두려워한 독한 조센징 이야기>에 수록된 이 일화의 주인공 김화숙에 대한 정보는 <현대한국인명록>에 기록되어 있다. 1921년생인 김화숙은 12살에 일본에 건너가 1967년에 ‘마루에 에코’를 설립하고 행거 내장형 의상 케이스,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을 개발했다. 그의 가방은 1985년 일본 굿 디자인상을 받았다. 1950년대 중반, 만화 영화 <울트라맨>과 <거인의 별> 캐릭터를 넣은 유치원 가방으로 일본에서 크게 성공한 가방 제조업자 다카이시 히로마사도 애월읍 출신의 재일 한국인이다. 제주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이 다수가 저임금 수공업인 가방 제조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재일 한국인, 그중에서도 제주 출신자들의 역사에 가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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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유행한 ‘이스트백’. 사진 수박빈티지 제공

‘유학생 가방’을 아시나요?

1970~80년대 이민 가방이 있었다면, 1990년대엔 ‘유학생 가방’이 있었다. 귀국한 유학생들이 전파한 가방이다. ‘이스트팩 현상’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사회학자 김덕영이 1999년께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서 귀국한 유학생들이 미국 가방 브랜드 이스트팩을 메고 다니면서 ‘걸어 다니는 광고판’ 구실을 했고, 국내 업자들이 보따리로 들여와 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방엔 당시 로망이었던 부와 엘리트가 상징화되어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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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백 투 더 퓨처> (1985)에 등장한 이스트팩 백팩. 사진 유니버설 픽처스 제공

같은 논문에 ‘이스트팩 현상’의 배경이 될 만한 얘기가 기록돼 있다. 책가방이 백팩으로 바뀌던 시점에 대한 인터뷰다. 1984년에 방영한 외화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에서 법대생들이 배낭을 메고 다니는 모습은 당시 “한국인들에게 작지 않은 충격”이었고 이후 모방하는 이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1987년 여름에 국내 개봉한 영화 <백 투 더 퓨처>(1985)의 흥행도 백팩 바람에 한몫했다. 주인공인 마티 맥플라이(마이클 제이 폭스)가 메고 있던 가방이 이스트팩 백팩이었다. 맥플라이의 가방에는 25년 뒤 또 다른 유행의 단초가 숨어있다. 2012년 무렵, 유명 가방회사들이 앞다퉈 가방 앞면에 마름모꼴 가죽 패치에 두 줄의 세로 홈을 판 장식을 단 백팩을 출시했다. 한국에서 ‘돼지 코 가방’이라 불리고 영미권에서도 ‘피그 스노트’(Pig Snout·돼지주둥이)로 불린 이 장식의 명칭은 ‘래시 탭’(Lash Tab)이다. 맥플라이의 이스트팩 가방에도 두 개의 래시 탭이 붙어있는데, 가방 회사들은 2000년대를 맞아 ‘복고’라는 트렌드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유명한 가방 리뷰 웹진 <캐리올로지>에 따르면 래시 탭은 아웃도어 배낭에서 유래한 것으로, 두 줄의 구멍 사이에 끈을 꿰어 등산 장비나 젖은 신발, 옷가지를 거는 용도로 사용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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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23일 김무성 당시 바른정당 의원이 입국하면서 자신의 가방을 수행원에게 밀어 보내는 장면을 연출해 논란이 일었다. 화면 갈무리

정치인의 전략 가방? 군인의 전술 가방?

앞서 ‘가방은 움직임을 예고한다’는 문구로 글을 열었다. 가방의 움직임을 예측한 이도 있다. 3년 전 5월23일, 김무성 당시 바른정당 의원은 김포공항 입국장에 들어서며 보좌진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여행 가방을 쑥 밀었다. 가방의 동선을 정확하게 예측한 그 솜씨가 어찌나 절묘한지, 네티즌들은 이를 ‘노룩패스’(농구 경기에서 시선을 주지 않고 공을 패스하는 것)라고 불렀다. 열흘 뒤인 6월2일. 또 하나의 가방이 화제로 떠올랐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당시 공정거래위원장 후보로 출석한 인사청문회에 들고 온 낡은 가죽 가방이 주인공이다. 허옇게 벗겨진 손잡이를 보고 청렴함을 칭송하는 이도 있었고, 혹자는 어쩌다 가방이 그 지경으로 헐었는지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의도되었건 아니건 간에, 그날 그 가방은 사용자의 습관과 취향, 고집을 전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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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14일 김상조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이 ‘낡은 가방’을 들고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굳어진 이미지를 바꾸는 전략에 가방은 유용하다. 총리 후보자 시절 ‘007가방’으로 불리는 딱딱한 ‘아타셰 케이스’를 들었던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는 지난해 5월께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로서 ‘국민 속으로 민생·투쟁 대장정’ 내건 지방 순회 때 백팩을 메고 누볐다. 캐주얼한 가방으로 이미지 변신을 꾀한 것이다.


전략, 전술을 뜻하는 ‘택티컬’은 가방 세계에서는 ‘군용’을 가리킨다. 아웃도어 백팩이 산악인 전용이 아니듯 ‘전술 가방(택티컬 백팩)’ 역시 군인만 사용하는 건 아니다. 밀리터리 마니아들이 멜 법한 군용 백팩은 2015년 무렵부터 최근까지 중고등학생이나 휴가 나온 군인의 등에도 매달려 있었다. 부르는 이름도 제각각이다. 부대 마크를 붙였다가 뗐다 하는 벨크로 패치 자리에 태극기를 붙이면 ‘태극기 백팩’이 됐다. 군대 간 애인에게 ‘출타 가방’을 사서 보내고 커플용 가방으로 사용한 이도 있었다. 방탄소년단 멤버 정국이 2017년 무렵 공항에서 자주 메던 커다란 전술 가방을 팬들은 ‘파병 가방’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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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휴가 나온 군인들이 서울역 여행 장병 안내소(TMO)로 향하고 있다. 태극기 문양 장식을 단 가방을 메고 있다. 연합뉴스

‘전술 가방’ 유행 이전 시절을 그린 웹툰이 있다. 국방부 공식 블로그에 연재되었던 <슭의 말년휴가>엔 “휴가 나온 사람들은 항상 ‘이것’을 들고 있는데 바로 쇼핑백이다”란 얘기가 나온다. 외출, 외박 때 물건을 넣을 만한 가방이 없었기 때문이란다. 당시 보급된 외출용 가방은 작은 숄더백 형태로 그마저도 공간이 충분치 않아서 군인들은 쇼핑백을 이용한 것이다. 쇼핑백엔 자유 시간에 접은 종이학을 넣어 휴가 때 애인에게 선물하거나, 말년 휴가 때엔 ‘깔깔이’(조젯)를 집에 가지고 갔다가 복귀하는 길에 음악 시디나 잡지 등을 챙기기도 했단다. 2017년부터는 ‘병사출타용 가방’을 군대별 정원 30% 기준으로 보급해 공용으로 관리하도록 바뀌었다.


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 참고 자료 <일본 일본인이 두려워한 독한 조센징 이야기>, <세상을 바꾼 50가지 가방>. (김덕영). <유행, 개인 그리고 사회: 이론적 논의 및 ‘이스트팩’ 현상 사례연구>(김덕영·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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