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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천장을 깬 여성 작곡가 슈만·멘델스존을 아시나요

클라라 슈만 탄생 200주년 맞아

인생·작품 재조명 잇따르면서

잊혀진 여성 작곡가들 다시 소환

한겨레

클라라 슈만(1819~1896) 탄생 200주년을 맞아 그의 인생과 작품을 재조명하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남편 로베르트 슈만(1810~1856)과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가 사랑한 뮤즈로 널리 알려졌지만 클라라는 그 자신이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 편집자, 작곡가였다. 지난달 ‘나의 클라라’라는 주제로 전국 리사이틀을 열었던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은 “클라라가 있었기에 슈만과 브람스의 음악이 탄생할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클라라의 작품은 대중에게 잘 알려진 게 없어 많은 분에게 들려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클라라를 기리는 행사들은 전세계에서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클라라의 고향 독일 라이프치히에서는 ‘클라라 19’로 불리는 연간 프로젝트를 포함해 그를 기리는 크고 작은 행사가 170여개 정도 열린다. 왕립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는 9월 클라라의 음악 세계를 주제로 그에게 영향을 끼친 바흐부터 러시아 출신 현존 여성 음악가인 소피야 구바이둘리나(88)의 곡까지 다양하게 연주한다. 국내에선 9월 열리는 <김정원의 음악신보> 공연에서 피아니스트 김정원과 김규연이 클라라의 ‘3개의 로망스’를 연주한다. 클라라의 발자취를 기념하는 움직임을 계기로 그동안 잊혔던 여성 작곡가들의 이름도 다시 소환되고 있다. 가부장제 사회와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개성 있는 작품을 남긴 여성 작곡가들의 역사를 복원해보자는 취지다.


한겨레

BC 7세기 그리스 여성 사포가 ‘최초’

18~19세기 나넬 모차르트·페니 멘델스존 등

실력 출중해도 남성사회 저평가

19세기 말 참정권 운동 본격화 뒤

에설 스마이스 보수 음악계 균열내

카이야 사리아호·불랑제 자매 두각


■모차르트, 멘델스존보다 뛰어났던 누나들 한국방송 클래식 에프엠 라디오 <케이비에스 음악실>은 클라라 탄생을 기념해 지난 3월부터 석달간 여성 작곡가 8명과 그들의 음악을 소개했다. ‘계희승의 음악 허물기’ 코너에서 클라라를 비롯해 패니 멘델스존(1805~1847), 미국 작곡가 에이미 비치(1867~1944) 등 여성 작곡가를 소개했던 계희승 음악학자는 “20세기 이후 ‘여성’ 작곡가라는 말 자체가 어폐일 정도로 많은 여성 작곡가가 있는데 정작 이들의 음악은 자주 소개되지 못하고 있다”며 “모차르트, 베토벤 음악처럼 자연스럽게 여성 작곡가들의 음악이 공연장이나 방송에서 자주 선곡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기획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주로 아는 작곡가는 남성이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여성들도 작곡을 했다. 클래식 음악계에선 기원전 7세기 그리스의 서정시인 사포를 기록에 남은 최초의 여성 작곡가로 본다. 중세시대엔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이 있다. 수녀였던 그는 오페라의 시조로 평가받는 음악극 <성덕의 열>을 비롯해 작품 120여편을 남겼다. 재독음악가인 박영희(74) 작곡가는 <한겨레>와의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힐데가르트 폰 빙엔은 수녀원장, 작가 등 다방면의 활동을 했던 분”이라며 “영성 가득한 그분의 성악곡들은 현재까지도 불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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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와 고전시대를 지나 19세기 낭만시대로 넘어가면 우리가 아는 이름들도 나온다. 모차르트의 누나인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1751~1829, 애칭은 나넬)와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인 패니 멘델스존은 남성 위주의 사회 분위기 속에 갇혀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맘껏 펼치지 못했다. 연주 실력 외에 작곡 능력도 출중했던 클라라 역시 3개의 로망스> 등 23편의 작품을 남기는 데 그쳤다. 42살에 삶을 마감한 패니가 400여편을 작곡한 것에 비하면 적은 숫자다. <클라라 슈만 평전>의 역자인 강자연 숙명여자대학원 반주과 대우교수는 “결혼 뒤 아이 8명을 양육하고 남편의 죽음 이후엔 생계까지 홀로 짊어지면서 순수창작을 위한 활동이 어려웠을 것”이라며 “클라라는 작품이 호평받았음에도 자신을 남편보다 한 수 아래로 두고 남편의 음악을 알리는 데 더 노력했다”고 말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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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 균열이 생긴 건 여성 참정권 운동이 본격화한 19세기 말이었다. 참정권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영국 작곡가 에설 스마이스(1858~1944)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여성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1903년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가난한 두 연인의 비극적인 삶을 그린 오페라 <숲>을 공연했다. 유리천장이 한번 깨졌다고 천장이 없어진 건 아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스마이스 이후 113년 만인 2016년에야 여성 작곡가에게 다시 무대를 내줬다. 핀란드 작곡가 카이야 사리아호(67)의 오페라 <먼 곳으로부터의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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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출신 나디아 불랑제(1887~1979)와 릴리 불랑제(1893~1918) 자매 역시 비범한 재능을 가진 음악가였다. 동생이 25살로 요절하자 “동생에 비하면 내가 쓴 작품은 하찮다”며 작곡을 그만둔 나디아는 파리 음악원에서 작곡과 교수로 활동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아스토르 피아졸라, 조지 거슈윈 등이 그의 제자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꼽히는 그는 1937년 런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38년 뉴욕 필하모닉 등을 지휘한 최초의 여성 지휘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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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들어 ‘음악계의 노벨상’ 등 약진

소파이 구바이둘리나·레베카 손더스

박영희·진은숙·조은화도 세계무대 활약


■ 세계에서 약진하는 한국 음악가들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음악계에선 여성 작곡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계희승 음악학자는 “모든 여성 작곡가들이 저평가됐다고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1970~80년대 서양 음악계서도 보통 대부분의 남성 음악가를 평가해왔던 통일성, 웅대함 등의 잣대를 여성 작곡가에게도 동일하게 들이대는 게 맞느냐는 의문이 제기되면서 페미니즘 시각으로 여성들의 음악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남성 작곡가의 전유물이었던 퓰리처 작곡상도 1983년에 여성 작곡가(엘런 테이프 즈윌릭)에게 수여하는 등 여성 작곡가의 활약이 늘고 있다. 보수적인 음악계가 변화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이남림 한국여성작곡가회 회장은 “클라라 슈만이 활동하던 시기엔 남성 중심 사회라 여성 작곡가들이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양성평등 사회를 지향하는 현대는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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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에도 ‘음악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에른스트 폰 지멘스’ 작곡상을 영국 작곡가 리베카 손더스(52)가 받았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여성이 상을 받는 건 46년 만에 처음이다. 손더스는 오랜 시간 동안 악기의 음향을 연구해 특별한 음향을 표현하는 작품을 내놓는 것으로 이름나 있다. 국내외에서 맹활약 중인 한국 여성 작곡가들도 눈에 띈다. 1994년 독일 브레멘 예술대학교에 여성 최초로 작곡과 주임교수가 된 박영희 작곡가는 서양 현대음악에 동양 악기를 편성해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상임작곡가였던 진은숙(58) 작곡가는 2004년 클래식 작곡가에게 가장 영예로운 상인 그로마이어(그라베마이어)상을 받으며 세계 최고의 작곡가 반열에 올랐다. 뉴욕 필하모닉은 미국 여성들의 참정권을 가능하게 한 미국 수정헌법 19조 비준 100주년을 기념해 올해 ‘프로젝트 19’를 시작했다. 제시 몽고메리 등 전세계 여성 작곡가 19명에게 곡을 위촉해 내년 2월에 초연할 예정인데, 진은숙 작곡가가 그중 한명으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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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화(46) 작곡가는 2009년 퀸 엘리자베스 작곡 콩쿠르에서 여성 최초로 우승해 화제를 모았다. 2017년에 스위스 바젤 작곡 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한 최한별(37), 노스텍사스 주립대 교수로 활동 중인 홍성지(46), 서울대 작곡과 설립 53년 만인 1999년에 첫 여성 교수로 임명된 이신우(50) 등이 국내외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가부장제 사회인 한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음악활동을 하고자 독일로 유학을 떠났던 박영희 작곡가는 “클라라 같은 여성 작곡가들의 곡을 들으면 여전히 눈물이 난다”며 “오랜 시간을 기다려 인정받은 그분들과 달리 이제는 여성 작곡가에 대한 편견이 많이 없어졌다. 후배들이 개성 있는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찾아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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