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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집에 숨을 불어넣다

구옥의 화려한 변신

노후 빌라 구입 후 전면 리모델링, 새로운 트렌드

‘미드센추리 모던’ 가구와 나무 품은 ‘분수집’

서촌의 아름다움과 하나되는 취향의 향연, 옥인연립

한겨레

35년 된 서울 종로구 빌라 ‘분수집’의 거실. 통창으로 가을 나무가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의자들은 독일과 덴마크 빈티지 제품, 천장에는 60년대 독일 빈티지 램프를 달았다. 사진 윤동길 스튜디오어댑터 실장

오늘날 주택 문제는 투기와 금융의 문제가 되었다. 아파트에 이어 최근 1~2년 사이에 새로운 부동산 투자처로 떠오른 곳이 바로 노후 빌라다. 오래된 빌라를 가리키는 ‘썩빌’이라는 단어는 원래 부동산 투기와 투자 사이의 은어였지만 최근엔 구옥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리모델링 유행과도 연결되었다.


아파트 소유가 계층 상승의 만족감을 주는 이 시대, 어떤 이들은 ‘부동산’이 아닌 ‘집’을 욕망했다. 이들은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알고 자신이 어떤 공간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았다. 집의 단점을 모르지 않았지만 전문가와 함께 수선하고 옛것을 보존하며 함께 살아가는 자세를 배우려고 했다. 구옥의 화려한 변신은 그렇게 다양한 삶을 추구하는 새로운 흐름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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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가운데 벽돌집이 커다란 나무와 어우러져 서 있다. 사진 윤동길

북한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서울 종로구의 한 빌라. 1986년 준공한 지상 3층, 지하 1층의 이 공동주택은 커다란 나무들이 즐비한 중정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정원에서 노니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수려한 주변 경관과 어울려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오래되었지만 그래서 더욱 우아한 나무 난간의 계단과 복도를 지나 벨을 누르니, 문이 열렸다. 약 91.95㎡(28평) 크기의 이 집은 어느 인테리어 플랫폼에서 이른바 ‘덕후’를 양산했다. 봄이면 화사한 꽃망울을 터트리고 가을이면 가지마다 울긋불긋 단풍잎을 매단 벚나무가 큰 창을 장식한 집. 깔끔한 구조, 요즘 사람들의 취향을 정조준한 인테리어 덕분이다.


이 집은 이가원씨와 생활 동반자 1인, 반려묘 담과 복동이가 함께 산다. 작년 봄, 오래 꿈꾸던 “나무가 있는 벽돌집”을 찾은 이가원씨는 전면 리모델링을 결정했다. 전문가와 오래 상의해 창고로 쓰이던 작은 방을 주방으로 만들었고, 거실 창과 부엌 창이 일직선으로 연결되도록 했다. 동향의 집에 개방감을 주면서 햇빛을 모으려고 한 것이다. 옛날식 넓은 부엌은 쪼개어 드레스룸과 서재로 만들었고, 안방의 문을 떼고 소파와 테이블을 두어 거실로 만들었다. 그러고도 방이 남아 각자의 침실까지 하나씩 마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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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벽을 장식한 책장은 20세기 최고 산업 디자이너라 일컫는 디터 람스의 ‘비초에’ 선반. 마호가니 원목 의자는 스웨덴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 칼악셀 아킹이 1959년 도쿄의 스웨덴대사관 납품용으로 만든 ‘도쿄체어’다. 사진 윤동길

이 집의 인테리어 스타일인 ‘미드센추리 모던’은 서구에서 1950~60년대에 유행한 생활양식 디자인 운동이다. 이가원씨는 “오래전부터 헌것에 매료되어 있고, 집의 소품이며 의류는 거의 모두 중고”라고 말했다. 집 한가운데 다이닝룸 겸 응접실에 놓인 의자들은 독일과 덴마크 빈티지 제품, 천장에도 독일에서 직구한 60년대 빈티지 램프를 달았다. 안쪽 거실 벽을 장식한 책장은 20세기 최고 산업 디자이너라 일컫는 디터 람스의 ‘비초에’ 선반이다. 규격을 직접 잰 뒤 영국 본사에 의뢰해 ‘직구’한 것인데, 모듈로 조립할 수 있다. 선반 앞 마호가니 원목 의자는 역시 20세기를 대표하는 스웨덴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 칼악셀 아킹이 1959년 도쿄의 스웨덴대사관 납품용으로 만든 ‘도쿄체어’다.


“이사하며 갖추게 된 미드센추리 모던 시대의 가구들을 보면, 50~60년대가 왜 유럽 디자인의 부흥기였는지 알 수 있을 만큼 개성 있고, 만듦새도 훌륭해요. 건축물 같은 조형미가 있는데, 그 시대 가구 디자이너들이 많은 경우 건축가들이라 그 영향이 있지 않나 싶어요.”


인권운동 활동가인 그는 이 집을 스스로 ‘분수집’이라고 이름 붙였다. “‘분수를 안다, 모른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극히 경제적인 상황에 비추어 내리는 판단이죠. ‘네 분수를 알라’는 말은 이 사회에서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기본적인 권리를 포기하라는 말과도 연결되고요. 집은 쉬면서 나를 재생산하는 곳이고, 인간답게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는 점에서 ‘분수를 알라’는 말은 끼어들 틈이 없다고 생각해요. 더 나은 주거의 형태를 상상하고, 더 나은 주거를 요구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어요. 저는 그저 좀 더 나다운, 그리고 나무가 보이는 살 만한 집에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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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로 쓰이던 작은 방을 주방으로 만들었고, 거실 창과 부엌 창이 일직선으로 연결되도록 했다. 동향의 집에 개방감을 주면서 햇빛을 모으려고 한 것이다. 사진 윤동길

오래된 빌라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려는 최근 경향에 영감을 준 건물이 있다. 바로 서울 서촌의 옥인연립이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옥인지구에는 판잣집이 하나둘 자릴 잡았고, 이 허술한 집들은 1979년 카터 미국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청와대 주도로 철거됐다. ‘청와대 조망권’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1979년 12월 완공된 옥인연립은 영화 <러브픽션>(2012)에서 하정우의 집으로 나왔고, 몇년 전부터는 문화예술계 또는 그 유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취향에 따라 세련되게 개조해 사는 빌라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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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62.8㎡(19평) 크기로, 공사를 하면서 층고를 높이고 방 벽과 베란다를 틔워 개방 구조로 바꾸었다. 사진 윤동길

영화 전문 기자 민용준, 미식 전문 기자 이주연씨 부부는 서촌에 살던 ‘한옥 지킴이’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의 영향을 받아 2013년 서촌에 신혼집을 얻게 되었다. 맞은편 빌라에 살다가 햇빛을 환하게 받고 서 있는 11개동짜리 옥인연립으로 이사 온 때가 2017년 5월. 주방 곁에 딸린 이른바 ‘식모방’과 베란다 창틀의 잠금장치까지 보존된 원형 그대로의 집을 만나 완전히 고쳐 살기로 의기투합했다. 이 집은 62.8㎡(19평) 크기로, 공사를 하면서 층고를 높이고 방 벽과 베란다를 틔워 개방 구조로 바꾸었다. 거실 한구석을 나눠 만든 작업실과 화장대에는 환한 빛이 쏟아지는데, 일조권 좋은 집을 찾기 힘든 서촌에서는 엄청난 혜택이다.


“집을 거의 새로 지었다고 보시면 될 정도로 거의 모든 벽과 기둥을 철거했어요. 대신 주방 싱크대 문짝에 집의 역사를 남겼죠. 원래 있던 고재를 살려서 짜 넣은 것이거든요. 공방에서 맞춘 이 8인용 식탁과도 잘 어울리고요.”(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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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 싱크대 하부장의 문짝은 1979년 건축 당시 고재를 살려서 짜 넣었다. 사진 윤동길

민용준씨가 “업보 같은 것”이라고 농담하며 가리킨 육중한 식탁은 실은 만찬장의 헤드테이블이었다. 작년 2월부터 12월까지 두 사람은 매주 영화와 미식을 함께 하는 모임인 ‘시네밋터블’을 집에서 열었다. ‘언어와 미각으로 공감하는 영화로운 만남’을 추구한 이 모임은 열달 동안 52차례나 진행되었다. 영화에 관련한 감독과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1부 진행은 민 기자가 맡고, 2부에서는 영화에 나오는 음식을 이 기자가 준비해 “성의로 똘똘 뭉쳐 마련한” 연회를 이어나갔다. <아가씨>를 보고는 평양 냉면을 만들어 먹고,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를 볼 땐 패티까지 수고스럽게 직접 치대 만든 수제버거를 함께 먹었다. 나중엔 서촌에서 활동하는 유명 바텐더가 합류해 함께 행사를 할 정도로 확장되었다. 코로나19 탓에 행사는 중단되었지만 서촌과 이 고풍스러운 연립을, 창밖의 두충나무와 느티나무를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영화에 젖어 이야기를 나누는 꿈같은 시간이었다.

“이 집은 편안하면서도 고립감이 없어요. 코로나 이후 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는데, 주방 쪽이 길과 가까워 바깥과 중계된 느낌이 듭니다. 평소 재산가치로서 부동산이 아니라 최소한 안전함과 안락함을 위한 ‘집’을 물리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겨왔어요. 이곳은 구조적·기능적으로 저희가 갖고 싶었던 집이에요. 두 사람과 한마리 고양이가 지낼 만큼 충분한 공간이고요.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민용준)

오후의 햇살이 책장을 비추었고, 빼곡히 꽂힌 영화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앨범 가운데 왕자웨이 감독의 <화양연화> 바이닐 커버가 보였다. 잠자던 고양이가 일어나 낯선 이에게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평화롭고도 예외적인 이 공간에서의 일상이 바로 누군가에게는 화양연화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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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한구석을 나눠 만든 작업실과 화장대에는 환한 빛이 쏟아진다. 사진 윤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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