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극계의 아이돌’ 고세원…누아르나 로코도 꼭 보여주세요
아침·일일·주말드라마 그랜드슬램
깔끔한 스타일·디테일한 연기 호평
배우 고세원. 후너스엔터테인먼트 제공 |
지난달 23일 서울 여의도의 한 찻집. 그가 들어서자 몇몇 사람의 시선이 그를 좇는다. 뭐지? 어디서 본 듯한 이 기시감은.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인근 음식점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들이 그가 나오는 드라마를 뚫어져라 보던 때의 그림이다. “하하하. 식당 가면 어머니들이 특히 좋아해주시는 걸 느껴요. 감사할 뿐이죠.” 어머니들의 엑소, 아니 아이돌이라고 해야 하나? 뭐가 됐든 코로나19로 답답한 나날, 어머니들의 시름을 덜어주고 있는 고세원을 만났다. “어머니들 힘내세요.”
그는 일일드라마 <위험한 약속>(한국방송2) 71회 촬영을 마치고 온 참이었다. <위험한 약속>에서 그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현실과 타협한 냉철한 남자 ‘강태인’을 연기한다. 한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을 내내 안고 사는 애틋함으로 어머니들의 마음을 졸이게 하고 있다. 이건준 <한국방송> 드라마센터장은 “주요 시청층인 중장년층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시청률 14%대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14%? 제가 더 분발해서 15%를 찍어야 할 텐데….” 어머니들의 아이돌은 만족을 모른다.
그는 2007년 <막돼먹은 영애씨>(티브이엔)를 시작으로 드라마만 약 18편에 출연했다. 그중에서 ‘일일+아침+주말 드라마’(통칭 ‘연속극’)가 10편이다. ‘주부들의 아이돌’이란 수식어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그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것도 2009년 주말연속극 <수상한 삼형제>(한국방송2)이고, 데뷔 이후 첫 상을 받은 것도 2017년 일일드라마 <돌아온 복단지>(문화방송)를 통해서다. <티브이엔>이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반짝 일일드라마 5편을 선보였을 때도 어김없이 그가 출연했다.(2013년 <미친 사랑>) “이번에 <위험한 약속>을 하면서 일일드라마 부문에서는 지상파 3사는 물론 <티브이엔>까지 그랜드슬램을 달성했어요. 하하하.” 자랑스러울 법도 하다. <티브이엔> 일일드라마가 사라졌으니 그 기록은 영영 깨지지 않을 테니.
배우 고세원. 후너스엔터테인먼트 제공 |
연속극에만 출연하면 어머니들의 아이돌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것만 고집하기보단 여러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지만, ‘일일+주말+아침 드라마’에서 유독 고세원을 찾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외모부터가 적격이다. 한 드라마 작가는 “어머니들은 선 굵고 남자다우면서도 깔끔한 외모에 설레 한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수염을 길러 거친 느낌을 강조했던 트로트 가수 장민호도 “우린 깔끔한 스타일을 좋아한다. 바꿔보라”는 어머니 팬의 조언을 받아들인 뒤 더 많은 인기를 얻지 않았나. 고세원은 “슈트발을 좋게 하려고 어깨 운동을 특히 많이 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이사, 실장, 본부장 등 ‘연속극’에서 그가 맡는 배역은 비슷한 느낌이다. 그는 “실장 전문 배우”라며 웃었다. 하지만 그는 “인물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감정 변화를 드러내어 진정성 있게 연기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특히 눈빛으로 감정을 잘 표현한다. 냉철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담아 다채로운 매력을 잘 보여주며 연속극 속 배우의 연기가 대체로 밋밋하다는 선입견을 깬다. “일일·아침의 경우 100부작 넘게 끌어가야 하니 한 인물 안에 다양한 사연이 담겨요. <위험한 약속>의 강태인만 하더라도 죄책감, 이기심, 후회 등 다양한 내면을 드러내야 해요. 그 복잡한 감정 변화를 세밀하게 표현해야 시청자들이 감정이입해 긴 시간 따라올 수 있어요.” ‘아침+일일 드라마’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흥행 공식도 있다. “엔딩에서 뭔가 큰일이 일어난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놀라면서 끝나는 것” 등이다. “너무 궁금해 다음 회를 보고 싶게 만들어야 하거든요.” 설거지를 하다가도 소리를 듣고 달려오도록 화내는 부분에선 특히 음향에 신경 쓴다. 그는 “때론 과장된 느낌이 들더라도 드라마 인기를 위해서는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고세원의 연속극 정복사. 사진 각 프로그램 갈무리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연속극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배우로 이름을 알렸지만, 동시에 배역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영애씨>의 2% 부족한 ‘허당 혁규’ 등 젊은 층에게도 소구력이 높았지만, 연속극 주인공 이미지가 워낙 강했다. 그도 “어머니들의 아이돌로 사는 것도 좋지만, 역할 제약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세원은 데뷔 때부터 기대주였다. 중학교 1~3학년 유도를 하다가 갑자기 “뭔가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지원한 계원예고에 덜컥 합격했고, 20살 때인 1997년 선배 추천으로 출전한 <한국방송> ‘슈퍼탤런트 선발대회’에도 덜컥 붙어 데뷔했다. 당시 차세대 하이틴 스타가 등장했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근데 그 운을 그때 다 썼는지, 이후에는 하는 것마다 안됐어요. 하하하.”
살펴보면 이렇게 안되나 싶을 정도로 운이 없기는 했다. “큰 역할을 맡았는데 촬영 전날 잘렸고, 그래서 군대에 갔고, 2001년 제대하자마자 1년 동안 촬영한 영화 <강아지 죽는다>가 개봉을 못 했고, 3년간 일을 못 하니 점점 잊혀 일이 안 들어오고, 3년간 준비한 음반도 무산되고….” 불운했던 과거를 줄줄 읊는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그만두고 유학을 가려고도 했다. 그러나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있나. “너무 어릴 때 연예계라는 사회에 떨어지니 적응을 못 했던 것 같아요. 연기 공부를 더 해 나를 채우자는 생각으로 무대로 돌아가 다시 힘을 얻었어요.” 2007년과 2009년 <김종욱 찾기> <벽을 뚫는 남자>, 2008년 <록키 호러쇼>, 2009년 <아이 러브 유>, 2010년 <오! 당신이 잠든 사이>, 2013년 <셜록 홈즈> 등 꾸준히 뮤지컬 무대에 서며 차곡차곡 자신을 채웠다. 그 노력은 결국 12년 무명생활을 떨치게 한 <수상한 삼형제>로 빛을 발했다.
어느덧 마흔 중반, 데뷔 24년차. 배우 인생을 돌아보면 반은 정말 힘들었고, 반은 정말 감사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포기하지 않고 버텨온 걸 칭찬해주고 싶어요. 이제 조급해하지 않고 제 안에 있는 여러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무대에서 다지고 ‘일일+아침+주말 드라마’에서 꽉 채운 연기는 이제 건드리면 톡 하고 터질 듯 꽉 찬 봉오리가 됐다. 그가 긴 시간 성실하게 가꿔온 꽃망울이 그토록 갈망하는 “로맨틱 코미디나 제대로 된 누아르”에서 터질 수 있기를.
아이돌 계보, ‘김병세-원기준-이상우-이재황’ 이들 빼면 섭하지
사진 왼쪽부터 김병세, 원기준, 이상우, 이재황. 각 소속사 제공 |
‘어머니들의 아이돌계’에 고세원만 있나. 아니다. 에이치오티(HOT), 젝스키스로 시작해 신화 등으로 이어진 아이돌 계보처럼 이 세계에도 계보가 있다. 1세대는 바로 2000년대 활약하며 ‘아침드라마의 장동건’으로 불린 김병세다. 아침드라마가 화제몰이하던 당시 그는 아침드라마만 7개 넘게 출연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송화> <외출> <용서> <여왕의 조건> 등에 잇따라 출연하며 계보의 물꼬를 텄고, 차츰 일일드라마와 주말드라마로 발을 넓혔다.
김병세의 부리부리한 눈 등 이목구비 뚜렷한 외모를 이어받아 2세대로 등극한 이가 원기준이다. 2006년 <주몽>의 막내 왕자로 주목받은 그는 2009년 아침드라마 <멈출 수 없어>에서 <주몽> 때와는 다른 독선적이고 야비한 인물로 변신하며 판을 깔았다.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모두 다 김치> 등으로 입지를 굳혔고, 지금도 일일드라마 <찬란한 내 인생>(문화방송)에 출연하는 등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일일+아침 드라마’보다는 주로 주말드라마로 주부들의 마음을 흔든 이들이 3세대 이상우와 송창의다. 2006년 일일드라마 <사랑도 리필이 되나요>(한국방송2)로 시작한 이상우는 2007년 주말드라마 <조강지처 클럽>에서 이혼녀인 나화신(오현경)에게 구애하는 구세주로 등장해 중년 여성들의 로망이 됐다. 이전까지 어머니들의 아이돌은 냉철하고 강한 이미지를 앞세웠다면, 이상우는 따뜻한 순애보를 강조하며 ‘다시 태어나면 결혼하고 싶은 남자’로 자리매김했다는 게 다르다. 송창의와 서도영 역시 비슷하다. 이후 이재황, 이규한 등 구릿빛 피부의 선 굵은 외모의 배우가 계보에 포함됐다. 이재황은 현재 아침드라마 <엄마가 바람났다>(에스비에스>에 출연하고 있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고모·이모 팬이 늘어나고 트로트 열풍이 불면서 위기감도 찾아왔다. 아침+일일 드라마가 사라졌다 등장하기를 반복하고, 갈수록 시청률이 떨어진 것도 이들을 위태롭게 만든다. 하지만 “한 분야에서 화제를 모으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최선을 다해 더 좋은 반응을 끌어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고 어머니들의 최강 아이돌 고세원은 말한다. 이들이 닦아놓은 길을 이을 또 다른 이가 얼른 등장하기를.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