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 뒤 새 친구 사귀기,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토요판] 이런 홀로
어른의 새 친구 사귀기
누군가 친해지고 싶지만
다가가기에 서툰 어른들
섣불리 속마음 보여줬다
차가운 반응에 상처 남아
어른돼 단단해지지 않고
조그만 자극에도 무너져
어른인 채 새 친구 사귀려면
어수룩한 선 넘기가 필요할까
섣불리 속마음을 다 보여줬다가 친구의 차가운 반응에 실망한 기억, 괜스레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에게 다가가려 했다가 후회한 경험, 누군가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내 기분에 무거운 우울감을 지웠던 기억… 이제 타인과 만나는 자리는 가볍게 시간의 표면을 뜨는 자리여야 대체로 후회가 없었다. 각자의 원 안에 들어앉은 채로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었다. 게티이미지뱅크 |
어른이 된 다음에 새롭게 친구를 사귀는 일은 얼마나 이상한가. 몇 해 전 겨울, 나는 어느 문화원에서 강의를 듣고 나와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밤공기는 차가웠고 수강생들은 외투를 여미며 저마다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몇 차례 함께 강의를 들은 한 수강생이 내 앞을 어딘지 어색한 동작으로 지나가는 것이었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이쪽으로 되돌아오는 게 보였다. 나는 눈이 마주쳐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나는 여자다) 그녀는 내 시야를 거의 벗어났다가 다시 내가 서 있는 곳 가까이로 불쑥 다가왔다. 그리고 급작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녀도 어쨌든 타인에게 다가가는 일에 서툰 사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대여섯 마디 어색한 대화를 주고받았고, 그럼 다음 시간에 뵈어요, 하고 그녀는 반대쪽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섰던 자리에는 아직 어색하고 흥분된 공기가 남아 있었다.
담배를 채 다 피우기도 전에 그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제야 나는 그 말이 어떤 제스처였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나는 예의상 ‘아녜요, 충분했는걸요’ ‘아니 괜찮아요, 제가 사서 볼게요’ 따위의 바보 같은 말을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건 어쩌면 내게 손을 내미는, 다음을 기약하고자 하는 제스처였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전화번호 교환이나 그런 것 말이다.
실은 나도 친구를 사귀고 싶었다. 수강생 중에는 내가 학교나 사회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던 비슷한 정서와 취향을 가진 이들, 그래서 어쩌면 더 가깝게 지내보고 싶은 이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내게 말을 걸었던 그녀도 조용하고 좀 이상한,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어른인 채 친구를 새롭게 사귀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그때 집으로 가면서 ‘다음 시간에는 내가 말을 걸어봐야지’ 하고 여고생처럼 실실 웃었지만, 그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이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진 걸까? 내 원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신호처럼? 결국 그녀와는 어떤 개인적인 이야기도, 다른 곳에서 만남을 기약하는 말도, 하다못해 에스엔에스(SNS) 계정이나 전화번호도 나누지 못했다.
몸에 새겨진 방어기제
학교와 직장을 다닐 때는 몰랐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혼자서 일하게 된 뒤에야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희귀해졌다는 걸 알았다. 돈을 주고 문화원의 강의를 듣거나, 어느 워크숍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무슨 소셜 클럽이나 동호회 같은 데를 적극적으로 기웃거리지 않는 한 우연히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때로 친구의 친구를 만나거나, 여럿이 함께 모이는 술자리가 생기기도 했지만 그런 자리를 즐기는 것도 이제는 먼 과거의 일이 되었다. 외향적이지 않은 성격에 낯선 사람들에게 치이는 시간은 그 자체로 엄청나게 에너지를 빼앗기는 일이란 걸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렇게 낯선 자리를 피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기본값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연히 누군가 다가와도 닫힌 문을 열 생각을 못 하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이런저런 관계 속에서 몸에 새겨진 경험은 방어기제를 발동시킨다. 섣불리 속마음을 다 보여줬다가 친구의 차가운 반응에 실망한 기억, 괜스레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에게 다가가려 했다가 후회한 경험, 모르는 사람에게서 친절하지만 폭력적인 언사를 들은 일, 무의식중에 쌓인 생채기가 돌이킬 수 없이 큰 상처가 되어 있었던 일들. 반대로 누군가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내 기분에 무거운 우울감을 지웠던 기억, 내 반응에 습관처럼 수동적 공격성을 보였던 사람들… 이제 타인과 만나는 자리는 가볍게 시간의 표면을 뜨는 자리여야 대체로 후회가 없었다. 각자의 원 안에 들어앉은 채로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었다. 실망하기 싫으면 섣불리 타인의 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야 했다.
앤드루 포터의 소설 <어떤 날들>에는 일정 한계치 이상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는 여자가 나온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제 가게를 찾아온 친구가 심각한 고민을 털어놓자 차를 끓이겠다고 방을 나가서는 아예 돌아오지 않는다. 친구는 영문도 모르고 멍하니 그녀를 기다리는 거다. 하지만 여자는 이미 길 건너 어딘가 카페 같은 데 들어가서 태연하게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다. 말하자면 이 여자는 ‘스트레스 한계점이 엄청 낮거나 해서 극도로 자극을 받으면 그냥 내빼버리는’ 그런 인간이다. 알바생은 혼자 가게에 남겨진 친구에게 말한다.
“근데 어떤 줄 알아요? 영감은 더해요. 그 남편 있죠! 그 아저씨, 정상이 아니에요. 사소한 일로 누가 불평이라도 하면 그 아저씨는 방에서 나가버리든가 아예 무시해버려요. 있잖아요, 혼자 콧노래를 부른다든가 잡지 같은 걸 뒤적인다든가. 엄청 이상해.”
500쪽이 넘는 두꺼운 소설에서 단 몇 페이지에 걸쳐 등장하는 것이 전부인 저들이 유독 떠오르는 이유는, 실은 저 ‘엄청 이상한’ 부부가 그리 이상한 사람들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너무 유약해서 조그마한 자극에도 무너져버릴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이야 어떻든 최대한 편의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나는 나이가 들고 어엿한 혼자로 독립한 어른이 되면, 상처의 경험도 많아져 단단하고 무덤덤해지고 타인을 받아들일 품도 넓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정확히 그 반대인 것 같다. 나는 이제 내가 ‘스트레스 한계점이 엄청 낮은’ 이상한 인간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어수룩하게 손 내밀기
대부분의 사람이 저 부부와 다른 점은, 그들이 실제로 내빼버리지 못한다는 점뿐인지도 모른다. 대신 그들에게 ‘내뺌’은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허용 가능한 범위에서 딴청을 한달지, 최대한 인위적이고 피상적으로 누군가를 대한다든지. 어쩌면 ‘내빼지 않는다’는 의례적인 태도가 진심이야 어찌 됐든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데는 더 중요한 사실일 것이다. 그게 사회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인간의 어떤 마지노선 같은 것인지도.
내가 ‘어른이 된 다음에 새롭게 친구를 사귀는 일은 얼마나 이상한가’ 하고 말한 것은, 그러함에도 나를 포함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어수룩하게 손을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어른인 우리는 그래도 선을 넘어보려고 망설이는 일을 우스꽝스럽게 계속한다. 나는 지금도 동네 카페에서, 슈퍼에서, 처음 간 어느 모임에서, 여고생처럼 배시시 웃음 짓게 하는 작은 제스처들과 마주친다. 그럴 때는 언제나 ‘나도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불가능한 욕망이 생겨난다. 다음번에는 크리스마스카드를 써서 건네볼까, 언젠가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하면 김장날 서로 모르는 친구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아야지, 뭐 그런 상상을 하면서. 실제로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다이나믹 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