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액으로 수십억 조작… 방산비리 일당 덜미
서울중앙지검 방위사업수사부
군 전술통신체계 방산비리 적발
업체, 수정액으로 수입가격 지운 뒤
납품단가 2배 부풀려 21억 가로채
1조원 넘는 국방예산이 들어간 군 전술정보통신체계(TICN) 개발 사업이 고작 납품업체 직원이 손에 쥔 ‘수정액’ 하나로 수십억원의 원가 조작이 이뤄진 사실이 검찰 수사로 드러났다. 부품 수입서류에 적힌 가격정보를 수정액으로 지우는 간단한 수법을 썼지만, 이를 검증하고 걸러내야 할 방위사업청 등은 전혀 구실을 하지 못했다. 외국에서 수입하는 방산물자의 부품 가격을 사실상 납품업체의 ‘양심’에 맡기는 제도적 허술함을 보완할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서울중앙지검 방위사업수사부(부장 정희도)는 방위산업체 ㅅ전기의 방산부문 부사장 최아무개씨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의 사기 등 혐의로 구속기소하고, ㅅ전기에 수입 부품을 납품한 ㅇ산업 대표 김아무개·이아무개씨 등 2명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고 7일 밝혔다.
국방부는 2007년부터 기존 아날로그 방식의 군 통신망을 디지털 방식으로 일원화하는 전술정보통신체계 개발 사업을 추진해왔다. 사전 검토를 마친 국방부는 2012년 통신체계에 들어가는 발전기 세트를 국방과학연구소 주관으로 개발하기로 했고, 국방과학연구소는 제작업체로 ㅅ전기를 선정했다. ㅅ전기는 다시 발전기에 장착될 외국산 디젤엔진을 ㅇ산업으로부터 납품받기로 했다.
검찰 조사 결과, 최씨와 김씨 등은 이 과정에서 수입가격을 부풀리고 그 차액 일부를 리베이트로 돌려받기로 모의했다고 한다. ㅇ산업은 2015년 7월 디젤엔진 41개를 대당 223만여원에 유럽에서 수입한 뒤, ㅅ전기에는 갑절이 넘는 대당 465만원으로 가격을 부풀려 납품했다. 방위사업청 원가검증팀은 ㅅ전기에 수입신고필증 등 실제 수입가격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대신 ㅅ전기는 테스트 비용까지 얹어 대당 528만원으로 적은 견적서 등만 제시했고, 방위사업청 원가검증 담당자는 추가 자료 제출 요구 없이 이를 그대로 승인했다.
이듬해부터는 ‘수정액의 마법’이 시작됐다. ㅇ산업은 2016년 4월부터 디젤엔진을 대당 230만~252만원에 수입한 뒤 ㅅ전기에는 대당 480만여원에 공급했다. 수입신고필증 원본에 기재된 실제 수입 단가 등 가격정보를 수정액으로 지운 뒤 원본이 아닌 복사본을 ㅅ전기 원가 담당자에게 제출한 것이다. 수정액으로 가격이 바뀐 수입신고필증 복사본, 2배 부풀려진 단가가 적힌 거래명세표는 ㅅ전기를 거쳐 전술정보통신체계 최종 양산업체인 ㄱ사와 ㄴ사를 통해 한국방위사업연구원과 방위사업청 원가검증 담당자에게 제출됐다. 담당자들은 속수무책으로 속았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방산비리를 이적행위로 규정해 엄단하겠다”고 밝히고, 검찰도 대대적 수사를 하던 때였는데도 ‘원가검증’은 날림으로 이뤄졌다.
검찰 확인 결과, 2015년부터 수사가 시작된 지난해 10월까지 최씨 등은 발전기 세트 가격을 부풀려 21억여원을 가로챘다. 최씨는 ㅇ산업으로부터 8억5000여만원을 돌려받아 생활비 등으로 쓴 횡령 혐의도 받고 있다.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방산물자는 그 특수성을 고려해 국방예산의 범위 내에서 ‘원가+법정 이윤’을 보장하게 돼 있다. 문제는 외국에서 수입해오는 방산물자 부품의 가격이 사실상 ‘깜깜이’로 결정된다는 점이다. 외국업체가 가격을 비공개하더라도 현장실사는 불가능하다. 외국에서 들여오는 방산물자 가격에 대한 방위사업청의 검증은 국내 납품업체가 원가계산을 정직하게 했다는 것을 ‘믿는’ 식으로 이뤄져왔다.
검찰 관계자는 “시장논리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지 않는 방산물자의 특수성, 원가를 공개하지 않는 국제적인 관행 탓에 가능했던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방위사업청 관계자는 “이제 막 기소되고 재판에 들어간 사건이라 정확한 내용을 아직 파악 중”이라고 했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