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촬영’ 하찮게 보는 사회, 예비신부 극단선택 내몰았다
극단적 선택 부른 ‘순천 불법촬영’ 사건의 재구성
가해자는 학교 선배이자 직장 동료
피해자 ‘분리 조처’ 귀막은 직장
피해자 보호에 무심했던 경찰
극단 선택에도 법원은 ‘솜방망이’
지난 9월 한 20대 여성이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년 1월 결혼을 앞두고 있던 이지은(가명·27)씨를 낭떠러지로 내몬 사건은 하나다. 그는 두 달 전 직장동료로부터 불법촬영을 당해온 사실을 알게 됐다. 행복해야 할 예비신부는 한순간에 고통스런 범죄의 피해자가 됐다. 그러나 지은씨의 등을 떠민 것은 동료의 가면을 쓴 가해자만이 아니었다. 불법촬영 피해에 여전히 둔감하기만 한 한국사회는 고통받는 지은씨를 지켜주지 못했다. <한겨레>는 지은씨의 가족과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지은씨가 생애 마지막 두 달동안 남긴 절규를 되짚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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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피해 공간이 된 일터…망가진 일상
생일 이튿날인 7월18일, 순천의 한 종합병원에서 비정규직 임상병리사로 일하던 지은씨는 모르는 번호로부터 온 연락을 받았다. 피해자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경찰의 문자메시지였다. 무슨 피해인지 어리둥절해하며, ‘피싱’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경찰이 보여준 영상에는 같은 달 2일 병원 탈의실에서 옷을 벗는 지은씨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머리가 하얘졌다. 경찰은 학교 선배이자 직장 동료인 주아무개(38)씨가 바로 옆 남성 탈의실에서 벽에 구멍을 뚫어 지은씨와 동료들의 탈의 장면을 찍었다고 했다. “30분 정도 조사를 받고 나오는데, 지은이가 창백한 얼굴로 굉장히 불안해 했습니다.” 지은씨 남자친구의 말이다.
지은씨 등 3명이 불법촬영 피해를 당했지만, 피해자인 직원들을 향한 병원 쪽의 배려는 부족했다. 병원 쪽은 이미 경찰을 통해 마트에서 불법촬영 범죄를 저지르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직원 주씨가 병원 내에서도 불법촬영한 사실을 들었지만, 피해자들에게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뒤늦게 경찰에서 피해 사실을 들어야 했다. 지은씨도 경찰조사를 받으면서 피해 사실을 알게 되고 이튿날에야 병원에 가해자 분리 조처를 요구했다.
그에 앞서 병원 쪽이 “탈의실을 개선해달라”던 여성 직원들의 오래된 요구에 반응했다면, 지은씨는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른다. 탈의실은 방 하나에 캐비닛을 중간에 둬 남성과 여성의 공간을 분리해둔 공간이었다. 지은씨의 아버지는 “바로 옆이 남성 탈의실이어서 몇 년 전부터 위태롭다며 개선해달라고 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는 직원들의 단톡방 메시지를 지은이가 떠난 뒤에야 봤다”고 털어놨다. 병원 쪽은 문제가 불거지자, 되레 피해자들에게 ‘옷을 왜 거기서 갈아입었느냐’고도 했다. 지은씨는 그즈음 남자친구에게 “우리 여자 탈의실 하나 더 있는데 왜 거기서 갈아입어서 그러냐더라”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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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마주친 가해자…“꿈에 그 인간이 날 보고 있어”
지은씨의 마음이 급격히 허물어진 건 피해를 알고 며칠 지난 뒤의 일이다. ‘누구랑 영상을 공유했으면 어쩌지? 다른 직원들도 봤으면 어쩌지?’ 끔찍한 생각들이 밀려들었다. 휴가를 내고 혼자 찾은 정신과 병원에서 가해자 주씨와 마주쳤다. 경찰이 주씨의 범행을 단순 불법촬영으로 여겨 곧 풀어줘서다. 그러나, 나중에 포렌식한 주씨의 휴대전화에선 공항, 노래방, 승강기, 직장 탈의실 등에서 31차례에 거쳐 찍은 불법촬영물이 나왔다.
조그만 지역사회에서 가해자를 마주치기는 쉬운 일이었다. 주씨를 마주친 뒤 두려워하는 딸을 보며 지은씨의 아버지가 “왜 현행범이 거릴 활보하냐”고 경찰에 호소하자 경찰은 말했다. “왜 화를 내세요. 지금 조사중인 사건이에요.”
이후 지은씨의 불안은 더 커져만 갔다. “아빠, 꿈에서 그 인간 얼굴이 나를 쳐다보고 있어.” 흐느끼며 새벽녘에 전화를 걸어오는 딸에게 지은씨의 아버지는 해줄 수 있는 위로가 없었다. 지은씨의 아버지는 “가해자가 버젓이 다니는데 어떤 분리조처도 없다니, 지금도 법을 이해할 수가 없다”며 고개를 떨궜다.
그 즈음부터 자주 지은씨는 남자친구에게 고통을 호소했다. 술도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다들 내 마음을 몰라주니까 내가 너무 작아져.”
열흘 만에 병원으로 복귀했지만, 지은씨는 계속 혼자였다. 병원에서 주사를 놓아야 하는데 손이 떨리고 가슴이 답답했다. 병원은 그런 지은씨에게 당직근무까지 시켰다. 피해자의 낙인이 두려웠던 지은씨는 군말 없이 지내야 했다. 비정규직으로, 내년 2월이면 계약이 종료되는 신분도 고려해야 했다. 지은씨가 자필로 남긴 메모에는 “이 일이 소문 날 경우, 성범죄 피해자 꼬리표도 달리고 제 취업길도 막을까봐 너무 불안해요”라고 적혀 있다. 지은씨는 결국 그 뒤 한달여 만에 신혼집으로 마련해둔 아파트에서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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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운 목숨 앗은 범죄 ‘징역 10개월’에 여성단체들 반발
지은씨를 벼랑끝으로 밀어냈던 세상은 그가 떠난 뒤에도 끝내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지난 13일 광주지방 순천지법은 주씨에게 징역 10개월과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를 명했다. 법원은 “피해자 중 한 명이 극단적인 선택을 해 유족과 다른 피해자들이 엄벌을 탄원한 점과 함께 피고인이 일부 피해자들과 합의한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양형이유를 설명했다. 법원이 밝힌 ‘합의한 피해자’ 중 한 명은 범행을 저지른 주씨의 아내였다. 여성단체들은 “피해자를 죽음으로 내몬 가해자한테 구형량인 2년보다 훨씬 가벼운 10개월의 징역을 선고한 데 분노한다”고 반발했다.
불법촬영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소극적이라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불법촬영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어 법정형 자체가 작지는 않다. 그러나 판례를 보면 실형 선고가 드문 데다 선고 기준도 모호하다. 장윤미 변호사는 “불법촬영은 대단히 악질적인 범죄지만 물리적 성폭력보다 처벌 필요성이 낮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는 것 같다. 피해자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점을 고려하면 법원의 판결이 대단히 아쉽다”고 짚었다.
그렇게 또 한 명의 여성이 세상을 떠났지만, 사회는 무심하고, 가족에겐 후회만 남았다. “저 또한 이전까지 불법촬영 범죄를 가볍게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딸에게도 ‘이겨낼 수 있다, 잘 이겨내라’고만 얘기한 게 후회됩니다.” 지은씨 아버지가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김해/배지현, 강재구 기자 bee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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