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 자리는 왜 창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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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창이 일반화된 요즘도 문살은 많아
시각적인 이유에서 다는 경우
현대 건축은 열 수 없는 통유리 선호
아름다운 나무 창호를 재생한 건물. 사진 김태경 제공 |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사람들은 대개 창가 자리를 선호한다. 사무실 자리 배치 또한 비슷하다. 창 쪽으로 갈수록 상급자 자리다. 엘리베이터에 가까운 쪽은 인턴 몫이다. 스타벅스는 언제나 창가 쪽에 가장 푹신하고 편안해 보이는 소파를 놓아둔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다. 밖이 보여서 답답하지 않고, 전망도 있으니까 당연히 선호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탈출하기 쉬운 곳을 확보하려는 인간의 본능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고층 건물의 경우라면 <미생>의 오과장보다는 장그래의 생존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기에 그럴듯하지만 부족한 설명이다. 식물과 마찬가지로 밝은 곳을 선호하는 인간의 주광성에서 이유를 찾는 쪽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일해 보면 복도 쪽 문간방이 훨씬 집중도 잘 되고, 온도 면에서도 안락하다. 한편 환기가 가능하니 상대적으로 신선한 공기를 마실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도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카페든 사무실이든 고속버스건 기차건 간에 창을 열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인간이 창가 쪽을 선호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은 모두 일리가 있다. 하지만 현실과의 괴리는 엄연히 존재한다. 1990년대 초 북한강 강변을 달리던 강촌행 그 기차는 더 이상 없다. 경제적 수준이 올라감에 따라 모두 공조시스템의 혜택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창밖에 손을 내밀어 느낄 수 있었던 차가운 바깥 공기나 굵은 빗방울에 대한 미련을 말한다면 당신은 옛날 사람이다. 그따위 로망은 자체적으로 접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창가 쪽 자리를 선호하는 인간의 오랜 습성은 창문이 그저 하나의 개구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인형의 집. 사진 최이규 제공 |
인형의 집 돌하우스(dollhouse)에는 통유리 창이 없다. 대개 창문은 적당히 작은 편이고, 유리면은 문살에 의해 여섯 개 정도로 나뉘어 있다. 영어로 문살은 ‘먼튼’(muntin) 혹은 ‘그릴’(grille)이라고 하는데, 유리가 귀하던 예전에는 먼튼이 필수적이었다. 끼울 유리가 크지 않았기에 때문이다. 하지만 커다란 통창이 일반화된 요즘에도 서양식 집에는 가짜 먼튼을 유리면에 부착시키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유리를 지탱하는 역할이 사라졌음에도, 그저 시각적으로 큰 면을 나누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마치 알 없는 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 같다. 먼튼이란 기껏 시원하게 뚫어놓은 통창의 전망을 가릴 뿐인데, 왜 이런 짓을 할까?
예전에 박완서 선생은 서울 외곽 자택의 통유리창에 부딪혀 죽어가는 새들을 안타까워하곤 했다. 도심 한가운데서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길을 가다 피트니스 클럽의 큰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떨어져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다 숨을 멈추는 작은 새를 보았다. 성실한 직원이 티 없이 닦아놓은 아름다운 유리창은 모처럼 맑은 하늘과 뭉게구름을 비추고 있었다. 아마도 문살이 있었다면, 그 새는 목숨을 부지했을 수도, 어쩌면 꽤 멋진 하루를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옛집을 보면 창을 만드는 데 상당한 정성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사람으로 치면 창은 눈에 해당한다. 옛사람들은 주인의 내적 지향을 문살을 통해 표현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딸의 창에는 더욱 공을 들였다. 문살은 그저 창호지를 지지하는 용도이거나, 단순한 장식품이 아닌 사랑과 애착의 표현 방식이었다.
실용적인 목적도 있다. 고딕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극단적인 예인데, 특히 햇빛이 강한 날 광량을 적절히 걸러주는 역할을 한다. 창의 가운데보다는 창틀 주변으로 더욱 촘촘한 먼튼을 배치하여 어두운 벽으로부터 가장 밝은 창의 중심까지 점진적인 광량의 구배(수평을 기준으로 한 경사도)를 주었다. 밝은 손전등을 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듯이, 밝은 창가가 오히려 어둡게 느껴지는 역설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물론 눈부심으로 인한 불편함도 훨씬 덜하다. 밝기 차이가 극단적일 때 눈부심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새시(sash)에는 그런 배려가 없기에, 요즘 사람들이 흔히 쓰는 손쉬운 민간요법은 창가에 키우는 덩굴식물로 먼튼을 대체하는 것이다.
먼튼과 커튼이 조합된 조합된 전형적인 서양식 주택의 창. 사진 최이규 제공 |
나무로 만든 창호는 매우 따뜻하고, 정감 있긴 하지만 이제 만들 줄 아는 사람도 드물다. 목재의 가공과 성질에 대한 이해와 함께 고도의 정밀함을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온·습도에 따라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휘거나 삐걱거리기가 일쑤고, 유리에 금이 갈 수도 있다. 현대 건축은 이러한 번거로움을 해결하기보다는, 삭제하는 쪽을 택했다. 통유리의 탄생! 시간이 흐르면서 통유리의 규모는 점점 더 커졌는데, 유리와 창틀, 소위 새시 기술이 발달한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창문의 개폐 기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건축은 조명이든 공기든 모두 인공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변화무쌍한 햇빛과 외부 기운을 차단하고, 조도와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한 공조 설비가 발달하면서 거주자가 마음대로 창문을 여닫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고, 블라인드가 커튼을 대체했다. 건장한 성인도 들기 힘들 정도의 육중한 유리문는 고층 풍압에서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안전상의 문제도 있지만, 콧구멍만 한 환기창이 딸린 통창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워지는 이유는 대개 에너지 절감과 단열이다.
뉴욕의 시그램빌딩은 모더니즘 초기의 대표적 건축물인데, 설계자인 미즈(Ludwig Mies van der Rohe)는 심지어 블라인드도 3가지 설정으로만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는 획일주의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데, 시그램빌딩의 레스토랑 인테리어에 참여했으며, 미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건축가 필립 존슨이 열렬한 나치 지지자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지 싶다. 그는 직접 설계한 단층의 글라스 하우스에서 살았는데, 순수주의 미감을 위해 모기장을 달지 않아 평생 벌레에 시달렸다는 믿기 어려운 일화도 전한다.
뉴욕 시그램빌딩. 사진 최이규 제공 |
해외 출장으로 멋진 전망의 통유리창 호텔 방에 묵었을 때다. 별생각 없이 냉방을 끄고 외출한 후 돌아와 보니, 햇빛에 달구어진 방은 견디기가 힘들 정도였다. 에어컨이 제대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면서 요즘 우리 처지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 해운대의 최고급 유리 아파트에서 에어컨을 끄고 외출했더니 강아지가 죽어있더라는 괴담이 떠올랐다. 수백만원에 달하는 냉방 비용이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통유리 건물은 전망에 대한 과대평가로 일상적 불편함을 상쇄하는 전략을 택한다. 주변 환경이 꽤 괜찮을 때는 먹히기도 한다. 하지만, 손으로 탁 젖히면 1초 만에 열 수 있는, 인형의 집에 달린 아담한 창이 주는 자유스러움을 대체할 수는 없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마음껏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었던 소녀의 간절함이 기록되어 있다. 길거리에 나치가 득실거리는 세상도 아닐진대, 2020년의 우리가 여전히 창을 열 수 없음은 기막힌 현실이다. 창은 단지 투명한 벽이 아니라, 세상의 삶을 보는 통로다. 고양이 이불을 털 수도 있고, 고등어 굽는 연기를 내보낼 수도 있고, 마음까지도 활짝 내어놓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자리에는 이유가 있다.
최이규(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