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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일하다 끌려가 고문 뒤 감옥으로…‘언제 죽었는지도 모르는’ 한맺힌 72년

‘제주4·3’ 행방불명자 소송 나선 김을생 할머니

한겨레

지난해 6월 4·3 행불인 재심 청구소송을 낸 김을생씨가 제주4·3 때 집안의 피해를 이야기하고 있다.

1948년 11월26일 저녁이었다. 늦가을로 접어들었지만 맑은 날씨였다. 당시 제주읍 영평리 가시나물 중동네 김경행(당시 35)씨의 초가 정지(부엌)에서는 김씨의 아내 현무생(당시 36)씨가 두살배기 아들(김필문·74)을 안고, 14살 큰딸(김을생·86) 등 세 딸과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느덧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김씨는 “어제 일처럼 그 상황이 가슴에 박혀 있는 날”이라며 이날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갑자기 정지에서 바라본 마당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환하게 밝아졌다. 김씨는 아들에게 밥을 먹이고 있던 어머니에게 “아이고, 저 마당 봅서(보세요), 마당이 벌겅해왐수다(벌겋게 타고 있어요)” 하고 소리 질렀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냐”며 일어서 딸들과 함께 마당으로 나갔다. 이웃집들이 불에 타면서 벌건 불길이 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주4·3 당시 중산간 지역에 초토화가 벌어지던 때였다. 영평리 가시나물은 지금은 제주 시내권이나 다름없지만 당시는 중산간 지대였다. 윗동네 살던 할머니가 뛰어와 독자 집안의 ‘귀한’ 손자를 안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서북청년단 출신의 9연대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김씨는 이날 불을 붙인 사람들을 똑똑히 기억한다.


“우리 집에 온 사람은 3명이었는데 국방색 옷을 입고 도리우치(납작모자)를 쓰거나 데쓰카부토(철모)를 썼어. 불 때문에 환하게 밝으니까 다 봤거든. 한 손에 나보다 더 큰 총을 들고, 한 손엔 왕대나무에 무엇인가를 빙빙 감아서 횃불 모양으로 들고 다니면서 이곳저곳 불을 붙였어.”


군인들에 집 불타던 48년 11월26일 기억 또렷

“살려달라” 빌던 어머니 간신히 죽을 고비 넘겨


어머니는 서쪽 우영팟(텃밭)으로 가 군인들을 향해 “우리 살려주십서, 살려주십서(살려주세요)” 하며 애원했다. 군인들이 발로 차 나가떨어진 뒤에도 어머니는 다시 일어나 두 손을 모아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런 어머니를 군인들은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가격했다. 머리에서 피가 솟구쳤지만, 어머니는 ‘살려달라’고 계속 빌었다. 머리에서 뿜어져 나온 피는 얼굴을 타고 흘렀다.


세 딸은 울면서 군인들에게 “우리 어머니 살려주십서” 호소했다. 이번에는 김씨를 발로 찼다. 김씨는 멀리 나가떨어졌고, 오른쪽 어깨를 심하게 다쳤다. 그래도 다시 군인들 앞으로 다가가 ‘살려달라’고 하는 순간, 집 앞 신작로 쪽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서 “집합” 하는 소리가 들렸다. 군인 한명이 어머니의 가슴에 총구를 대고 “이년 쏘아버릴까” 하고 말했다. 옆에 있던 군인은 “내버려둬. 피가 너무 나서 더럽잖아” 하면서 그냥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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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거로마을 김을생씨. 24살 때 결혼해 지은 집에서 60여년째 살고 있다.

군인들은 밭에서 수확한 초나룩(찹쌀)을 한데 모아 쌓아놓은 눌(가리)에도 불을 붙였다. 어머니는 피가 흘러내리는데도 김씨에게 타지 않은 찹쌀을 꺼내면서 “저 불 볼르라(밟아 꺼라)”고 외쳤다. 김씨와 동생들은 계속해서 불을 껐다. 그날 늦게 동네 청년이 와서 어머니의 머리에 천을 싸매 피를 멈추게 하고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김씨 가족은 해방 전 일본 도쿄에서 살다가 4살 되던 1938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김씨가 일본에서 불렸던 이름은 ‘다마짱’이다. 일본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했던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 노무 동원됐다. 공출은 일본에서 돌아온 김씨 가족에게 가장 괴로운 일이었다. 보리를 공출해버려 먹을 것이 없자, 말먹이로 주는 보리인 연맥을 따로 재배해 먹어야 했다고 한다.


집이 불타기 열흘 전인 11월 중순, 밭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끌려갔다. 말 구루마(수레)를 끌고 아버지와 함께 밭에 갔던 어머니만 돌아왔다. 김씨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어디 두고 혼자 오셨냐”고 묻자 “경찰이 잡아갔다”고 했다. 다음날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으러 성안(당시 제주시내)으로 내려가 수소문 끝에 9연대 군인들이 주둔한 제주농업학교에 수감된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는 김씨와 이틀에 한번꼴로 아버지를 면회하러 6㎞ 남짓 길을 걸어 다녔다. 아버지는 우는 김씨를 보고 “다마짱아 울지 마라. 주먹밥 주니까 잘 먹고 있고, 곧 나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그러다 아버지가 누군가한테 집이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듣고는 식사를 거부하자 자초지종을 묻던 한 군인이 “가족들을 잘 보살펴주라”며 ‘석방증’을 써줘 내보냈다. 아버지는 친척 언니네가 집을 빌려 사는 지금의 제주시민회관 부근 ‘서머세’로 가 잠시 머물렀다.


집이 타버린 뒤 할머니를 포함한 김씨 가족 6명은 집 돌담 아래에서 살았다. 집이 불탄 지 사흘 정도 지난 뒤 친척 언니가 소식을 듣고 김씨 가족들을 데리러 왔다. 이번에는 동네 청년들이 내려가지 못하게 길을 막아 언니가 사정해 천으로 팔을 둘러맨 김씨만 데리고 내려왔다. 아버지가 석방된 줄을 몰랐던 김씨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울음이 터졌다. 김씨가 내려오고 사흘이 지나, 이번에는 군경이 마을에 와 “모두 내려가자”고 해 그제야 할머니, 두살배기 남동생을 안은 어머니와 동생들이 서머세로 왔다.


그러나 김씨 가족에게는 더 큰 불행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할머니가 방 한칸짜리 집을 빌려, 친척 언니 집에서 나온 김씨 가족은 7명이 ‘동머세’에서 한방에 모여 살았다. 별채는 김씨의 먼 친척이 빌려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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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인 명부에 나와 있는 김씨 아버지의 기록.

김씨는 당시 동머세에서 경찰의 가택수색이 심했다고 말했다. 12월 초 어느 날 새벽 5시께 경찰 3명이 집에 들이닥쳤다. 경찰은 “조사하러 왔다”는 말도 없이 “잠자는 사람들 모두 일어나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일어나라. 살려주켄 왔져(살려주겠다고 왔어)”라며 깨웠다. 온 가족이 모두 밖으로 나갔다. 별채에 살던 먼 친척 가족들도 나갔다.


경찰은 별채의 할머니, 김씨와 동생들만 놔둔 채 모두 데리고 경찰서로 향했다. 김씨는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며 울음을 터뜨렸고, 별채의 할머니가 “다마짱아, 울지 말라. 살암시라(살고 있어라), 살아진다”며 달랬다. 할머니는 경찰에 연행된 지 3~4일 만에 나왔지만, 어머니는 7~8일 뒤에야 나왔다. 그것도 성치 않은 몸으로.


“일주일 넘엉 살당와신디 어머니가 홀쭉해서. 살아줭 고맙수다.”(일주일 넘게 살다 나왔는데 어머니가 살이 많이 빠졌어.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경찰 끌려가 고문받던 아버지는 육지 감옥으로

동료 수감자 “바다에 버려져” 전해줘 제사지내


김씨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같이 울었다. 함께 연행된 아버지는 다른 유치장에 있었다. 경찰은 어머니에게 “네 남편은 어디 있느냐”, “산에 쌀을 올렸느냐”며 고문했다. 어머니 손가락에 전깃줄을 감고 스위치를 눌러 어머니가 혼절해 나둥그러지면 스위치 끄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가 함께 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살다 나온 어머니는 젖이 나오지 않아 두살배기 아들에게 젖을 물리지 못했다. 아버지도 심한 고문을 받았다. 어머니는 김씨에게 경찰이 아버지를 거꾸로 매달아 주전자로 코에 물을 붓는 등 고문했다고 말해줬다. 어머니는 풀려난 뒤에는 김씨와 함께 남편 면회를 다녔다. 갈 때마다 우는 김씨를 보고 아버지는 “울지 말고 살고 있어라. 곧 나갈 거야”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제주4·3 당시 작성된 ‘수형인 명부’에는 김씨의 아버지가 1948년 12월8일 군사재판(군법회의)에서 내란죄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수형 장소가 목포형무소로 나와 있다. 김씨의 아버지는 목포형무소에 있다가 대구형무소로 이감된 것으로 보인다. 군법회의는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 두차례 열렸다. 1948년 12월3~27일 사이엔 12차례에 걸쳐 민간인 871명이 군법회의에서 사형~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김씨는 이듬해인 1949년 1월 어느 날로 기억한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면회한 날, 한밤중에 산지항 부근 주정공장이 있는 쪽에서 통통배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김씨에게 “저 똑딱선 오늘 저녁 육지레 너네 아버지 싣겅 가는 생이여”(저 통통배가 오늘 저녁 육지로 네 아버지를 태우고 가는 모양이야)라고 말하며 울었다. 김씨도 어머니의 말에 잠을 자지 않은 채 뱃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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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 김필문씨는 2000년대 초부터 4·3운동에 뛰어들어 유족회 활동과 4·3 평화·인권 명예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글을 모르던 아버지는 형무소에서 남의 손을 빌려 두차례 고향으로 “내가 어디 간 줄 몰라 하지 말아라. 대구형무소에 와 있고, 살아서 나갈 테니 초조해하지 말고 잘 있어라”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가 떠난 뒤 가족들은 신산한 삶을 살아야 했다. 제주읍 거로3구통에서 임시로 살던 김씨 가족은 고향과 가까운 간드락에 김씨가 해온 나무로 움막처럼 집을 지어 비바람만 피한 채 땅바닥에 짚을 깔고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이었다. 고향을 떠난 지 10년 만인 1958년에야 고향인 가시나물로 거처를 옮겼다.


아버지의 소식은 간드락에서 살던 1956년에 들을 수 있었다. 당시 같은 마을에 살다 대구형무소에서 함께 수감됐다 석방된 이웃이 아버지 소식을 전해줬다. 김씨는 “그분이 대구형무소에서 (아버지와) 서로 방이 달랐는데 밖에 나갈 때 서로 말은 하지 못하고, 눈치로만 알은체했다고 한다. 그분이 아버지를 ‘바다에 가서 버린 것 같다’고 말해줘 그때야 죽은 줄로 알았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도 할머니는 아들이 살아 있다며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그분 말씀을 듣고 난 뒤에야 생일에 맞춰 제사를 지내게 됐다.


“곧 돌아온다”던 아버지 기다리며 움막집서 생활

억울함 풀려 72년 만에 재심 청구 “나라가 책임”


김씨는 24살 때까지 집안일을 돌보고, 막내 남동생을 키우며 살다가 결혼했다. 남동생 필문씨는 누나들이 시집을 가자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밭을 갈았다. 남의 멸시를 받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일했다. 필문씨는 “1999년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가 발굴됐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4·3연구소를 찾아가 아버지의 형량이 15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백번 양보해서 15년형을 받아 기간이 지나면 풀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민주국가에서는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필문씨는 그 뒤 4·3유족회 활동에 참여해 최근까지 4·3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도 제주도교육청이 위촉한 ‘4·3 평화·인권 명예교사’로 활동한다.


지난해 6월 이들은 행방불명된 아버지의 재심을 청구했다. 김씨는 법원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72년 동안 얼마나 내 가슴이 타면서 어떻게 살아온 줄 아십니까. 나라가 돌아가시게 한 것이니, 나라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내 마음이 풀리겠습니다.”


재심 공판은 다음달 열릴 예정이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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