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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견통령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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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작업 활판인쇄 명맥 잇는 ‘활판공방’

납 활자 틀, 활자주조기 등 박물관 같아

인쇄는 한지에···아날로그 냄새 가득

일흔 살 넘은 조판공들은 활자 장인

1960~70년대엔 조판 실수도

인쇄 체험해 보니 “글자가 살아나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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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판공 권용국씨가 문선대에서 서서 조판에 필요한 글자를 골라내는 중이다.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1883년 <한성순보>부터 130년 넘게 이어온 국내 활판인쇄는 1980년대 초, 컴퓨터 조판과 오프셋 인쇄방식에 밀려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박한수(51) 대표는 활판인쇄 장비를 모으고, 일선에서 물러난 장인들을 설득했다. 2007년 문을 연 ‘출판도시 활판공방’(이하 ‘활판공방’)은 근대 활판 인쇄술을 되살리고 맥을 잇는 곳이다. 지난 10일과 18일. 오목하게 파인 홈에 스며든 그리운 글자를 만나러 경기도 파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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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트와 너트, 이리저리 엉킨 선과 육중한 철의 중량감을 온전히 드러낸 활자주조기가 눈을 사로잡는다. 전시용 골동품 같은데, 웬걸? 활판공방에서 쓰지 않는 기계는 없다. 족히 70년에서 100년 가까이 된 주조기가 여전히 납 활자를 뽑아내고, 구형 인쇄기로 시집을 찍어낸다. 종이만 외부에서 들여올 뿐, 활자제조와 조판, 인쇄, 제본에 이르는 전 과정을 아우른다. 그래서 박물관이 아닌 ‘공방’이다.


백경원 실장의 안내로 공방을 둘러봤다. 주조기 옆 서랍에는 납 활자를 만드는 틀이 되는 ‘자모’가 크기 별로 빼곡하게 차 있다. 자모는 이곳의 보물이다. 주조기가 있어도 자모가 없으면 활자를 생산할 수 없다. 납 활자는 수명이 있어서 몇 번 사용하면 다시 녹여 다른 활자를 만들어낸다. 한글의 완성형 글자의 개수는 대략 2200에서 2400개. 실제 인쇄에는 훨씬 많은 활자가 필요하다. “시집 한 쪽당 최소 200자가 넘는다. 200쪽의 시집을 만든다고 하면, 몇만개의 활자가 들어간다. 한 권의 시집을 만들기 위해서 선생님들이 문선(조판에 필요한 활자를 골라내는 작업)을 하다 보면 금방 활자가 없어지니까, 주조해서 활자를 계속 지원한다.” 백 실장의 설명이다. 활자들이 분류된 문선대 옆엔 예비 활자를 둔 저장고가 있다. 새 활자의 은색 광택이 아직 유통되지 않은 새 돈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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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도시 활판공방’의 활판인쇄 장비들.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인쇄에 쓰는 종이는 한지를 사용한다. “겉이 매끈하거나 코팅된 종이는 활판인쇄에 적합하지 않다. 스밈이 좋아야 한다. 활판인쇄용 잉크는 점성이 강하고 마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대신 홈 안에 잉크가 스며서 박혀버리기 때문에 오래 보존이 가능하다.” 백 실장이 잉크 냄새를 맡아보길 권했다. 독한 페인트 냄새가 아닐까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코를 댔다. 근래 맡아 본 적이 없지만, 분명 아는 냄새다.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 다세대 주택지하실 연탄 광에 도착한 것 같다. 눅눅하고 큼큼한대, 묘하게 끌린다. 백 실장은 “묵직한 아날로그의 냄새”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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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조판 작업. 때로 핀셋이나 돋보기가 필요하다.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어떤 분야든 수십년 경력자들을 그들의 일터에서 만날 때 느끼는 긴장감이 있다. 각자 업무에 열중하는 조판공 권용국(85)·인쇄공 김평진(70)씨에게 허투루 말을 건넸다간 인사를 주고받기도 전에 혼날 것 같았다. 1934년생인 권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4살에 인쇄소에 들어갔다. “처음 안국동 고려문화사 식자과에 들어가 일을 배웠다. 식자가 판을 많이 짜줘야 인쇄소가 돈을 버니까, 식자과를 중심으로 주조와 문선이 보조한다. 식자 한 사람이 네다섯 명을 거느리는 구조다.”


기술자는 자리를 옮겨야 월급도 늘어난단다. 민중서관으로 이직한 권씨는 영한사전, 독한사전의 조판도 맡았다. “소설이 3교 교정을 본다면, 사전은 10교씩 교정을 본다. 한 권 만드는 데 7년씩 걸린다. 사전은 그렇게 더디다.” 활자를 한 자 한 자 손으로 골라서 사전의 빽빽한 면을 채운다고 생각하니 까마득하다. 조판은 글자만 모으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띄어쓰기나 행 바꿈에는 ‘공목’이나 ‘행간목’으로 불리는 조각이 들어간다. 작은 활자가 촘촘하게 들어가는 사전은 행간을 띄울 때 종이를 끼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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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판공 권용국씨.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권씨가 조판한 책은 <야담과 실화>나 <삼천리>등의 대중잡지도 있다. 버스터미널에서 하루 읽을거리로 많이 팔렸단다. <선데이 서울> 같은 건가 물었더니 김평진씨가 말을 받았다. “<선데이 서울>은 페이지 수가 많고, 고급이지.” 18살에 인쇄를 시작한 김씨는 손으로 하는 조판이 컴퓨터로, 활판인쇄가 오프셋 인쇄로 대체되며 흐름이 바뀌기 시작한 시점을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로 기억한다. “교과서 내는 출판사 같은 큰 곳이 제일 빨리 바뀌기 시작했다.”


활판인쇄가 주를 이루던 시절의 인쇄 사고가 궁금하다. “대통령 글자가 잘못 돼가지고.(웃음) 그래서 시방(지금) 대통령을 묶어놨잖아.” 권용국씨가 말한 ‘시방’은 이승만 정권 때 얘기다. 신문에 대통령(大統領)이 견통령(犬統領)으로 나갔던 사건이 있었다. 이후 신문사들이 대통령 활자를 한 묶음으로 두었다는 뜻이다. 박정희 정권 때 신문을 인쇄하던 김평진씨도 겪은 일이 있다. “사진이 들어가는 면에 그런 사고가 있었다. 그때는 종이질도 나쁘고 먼지도 많으니까 인쇄판에 때가 잘 꼈다. 모르고 찍다가 일이 생겼다. 대통령 눈동자에 먼지가 끼거나 얼굴에 점이 생겨 불려가 크게 혼이 났다.” 인쇄기 결함임에도 다른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고 추궁을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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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연 시인의 ‘4월 이야기’ 중 한 구절을 활판인쇄로 찍었다. 오목하게 팬 글씨의 감촉이 각별하다.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활판인쇄 체험을 앞두고 긴장감이 더해졌다. 25자 내외의 짧은 글을 수동 프레스로 찍어보는 수업이다. ‘데통령, 대령, 대통렁…대통령을 여러 버전으로 찍어볼까?’ 모처럼 귀한 체험이니까 좋아하는 시를 고르기로 했다. 하재연 시인의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에 실린 ‘4월 이야기’의 한 구절을 적은 종이를 들고 문선대 앞에 섰다. ‘럽럼럭량락칙충츰측취’ 수많은 낱글자 틈에서 원하는 글자를 찾는다. 문선이 끝나면 조판이다. 행간목의 길이에 맞추느라 어쩔 수 없이 시의 행을 임의로 바꿨다. 완성된 조판에 잉크를 바르고 종이를 덮어 수동 프레스기 핸들을 돌리면 활자 하나하나가 종이에 꾹 박힌 흔적이 남는 활판 인쇄물이 탄생한다.


시월출판사 대표를 겸하는 박한수 대표와 박건한 편집주간은 2008년부터 이육사, 박목월, 나태주, 문정희 시인 등 국내 시인들의 시선집을 꾸준히 펴내고 있다. 한지에 활판인쇄를 하고 제본까지 수작업으로 만드는 영구 보존판 활판시선집 한 권의 가격은 5만원. 일반인들도 청첩장이나 초대장 등, 개인에게 의미가 깊은 글을 활판 인쇄물로 의뢰하기도 한다. 박무웅 시선집을 인쇄하는 18일, 파주를 다시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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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공 김평진씨.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김평진씨는 인쇄기가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권 선생님이나 나 같은 사람이 죽어버리면 할 사람이 없다. 기계는 관상용으로 남는 거고. 처음 오는 사람들은 고풍스럽고 환상적이고 보존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사용해야 보존이 된다.” 기술의 전수를 바라는 장인들의 마음이다. 김씨는 기계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독일제 레터 프레스 전용 인쇄기는 일흔다섯 살. 활판인쇄기는 쉰다섯 살. 명함인쇄기는 서른다섯 살이다.” 일흔 살 김씨가 쉰다섯 살의 활판인쇄기에 종이를 한 장씩 보내면 롤러로 눌러 인쇄를 마친 면을 대나무 살대가 홱 낚아채 정돈한다. 오래된 기술, 해묵은 기계로 갓 찍어낸 신선한 글자들이 종이에 살아있다.

[ESC]디지털 세대에게 활판인쇄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글자를 접하는 디지털 세대에게 활판인쇄는 어떻게 다가올까? ‘출판도시 활판공방’은 일반인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백경원 실장은 말한다. “아이들은 활판인쇄를 체험하면서 이전에 알지 못했던 활자의 물성을 느낀다. 컴퓨터에서 자간 하나, 커서 하나 움직이는 것, 행을 하나 바꾸는 것도 (조판 과정에서) 공목과 행간목이라는 물성을 가진 물건들을 넣어야 한다. 직접 활자를 뽑으면 자기가 원하는 편집이 완성된다는 것을 경험하면 활판인쇄의 매력에 확 빠져든다.” 활판인쇄라 하면 낡은 기술 같지만, 현직 북 디자이너가 활판인쇄 수업에서 찍어낸 글자를 다시 디지털화해 동화책 디자인에 활용하기도 한다. 디자인학과 타이포그래피 수업과 연계하기도 한다. 일반인을 위한 수업으로 ‘나만의 장서표 인쇄’(30분·1만원), ‘꿈을 찍는 활자'(50분·2만2000원), ‘레터 프레스 엽서 만들기’(20분·5000원) 등이 있다. (경기 파주시 문발로 203호 ‘사유와 문장’ 1층/031-955-0084)


종이를 여러 장 묶어 맨 물건.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기록하여 꿰어 맨 것. 문자나 그림을 체계 있게 담은 물리적 형체. 고대의 기록물은 파피루스나 양피지 두루마리 형태였다. 이후 양피지 가운데를 접고 여러 겹으로 겹쳐 표지를 씌운 코덱스(codex) 형태가 우리가 아는 책과 가깝다. 인쇄술과 제지술의 보급으로 지식이 대중화하고, 책의 개인 소유가 가능하게 되면서 수요가 생기고 책은 상품으로 거듭났다. 글쓴이가 죽어도 글은 책 안에 담겨 긴 세월을 건넌다. 정보를 기록하고 휴대하고 운반하는 보편적인 저장 물건으로 가장 오래된 형태. 책은 신비한 종이 묶음이다.

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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