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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빛 마을 지나 고흐·세잔 흔적 찾아 떠난 길

[ESC]

김남희의 걷다 보면 남프랑스②


황토로 아름다운 마을 ‘루시용’

고흐가 말년 작품 활동했던 ‘아를’

테라스 카페 폐업…희미한 발자취

‘엑상프로방스’ 세잔 집도 보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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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베롱 산맥에 자리한 작은 마을 루시용의 건물들엔 황토가 칠해져 있어 마을 전체가 노을색이다.

4월의 바람은 뺨이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데, 머리 위의 태양은 잔인하도록 뜨거웠다. 추위와 더위를 동시에 느끼는 신묘한 경험이었다. 미스트랄. 루베롱 산기슭의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는 그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의 프로방스’를 쓴 영국 작가 피터 메일은 프로방스의 모든 문제는 정치인 탓이 아니라 이 바람 때문이라고 했던가. 루시용(후시옹, 후슬리옹, 루씨용…. 내가 어떻게 발음해도 이 동네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다)에서 고르드(고흐드)까지 10㎞. 두 시간 좀 넘게 걸으면 되네.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길이었다. 포도밭과 밀밭 사이를 걸을 때만 해도 제법 낭만적이었다. 어느 순간 갓길도, 중앙선도 없는 좁은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로 인해 장르는 스릴과 서스펜스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건 순전히 남프랑스의 대중교통 시스템 탓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마을’까지 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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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위의 마을 고르드.

설마설마했다. 아무리 남프랑스 여행의 대세가 렌터카 여행이라지만 지금껏 차 없이 온갖 나라를 돌아다녔으니 프랑스쯤이야 싶었다. 독일 간첩 누명을 쓴 유대인 드레퓌스 대위의 무죄를 격정적으로 옹호하며 “나는 고발한다”를 쓰던 에밀 졸라의 심정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격한 감정으로 프랑스 대중교통의 열악한 현실을 격렬히 고발하고픈 기분이었다. 일단 마을과 마을을 잇는 버스 운행이 지극히 적다.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 남짓. 버스 회사마다 지불 시스템도 제각각이라 버스카드, 신용카드, 현금을 다 준비해야 한다. 뱅스에서는 숙소를 오가는 유일한 버스가 일요일에는 아예 운행을 안 해, 무장 경관 세 명이 탄 경찰차를 얻어 타고 숙소로 이동하기도 했다. 뱅스에서 루시용으로 갈 때는 차로 2시간 반이면 되는 거리를 대중교통으로 8시간 넘게 소모해야 했다. 버스나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게다가 기차역이 아예 폐쇄되었거나 역무원이 없는 곳이 많았다. 기차표는 자판기에서만 구매가 가능했고. 기계에 밀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모두가 직업을 잃는데 이익을 보는 극소수는 누구인지 궁금했다. 이 대중교통 시스템에 대해서는 만나는 프랑스인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엉망이라고 동조했다. 하긴 내가 ‘서울러’, 그것도 광화문과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라 대중교통 이용에 불편함을 못 느낄 뿐, 우리네 지방 소도시의 사정도 비슷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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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로 유명한 루시용 마을.

그렇게 8시간 넘게 걸려서 도착한 루시용은 루베롱산맥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프로방스의 마을들이 석회암으로 지어져 베이지색인 데 비해 이곳은 황토를 칠해 마을 전체가 노을색이다. 저마다 채도가 다른 붉은색의 집이 절벽 끝에 매달린 듯이 자리했는데 과연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뽑힐 만했다. 언덕 위에 자리한 붉은 집들도 인상적이지만, 더 재미있는 곳은 ‘황토 트레일’(Le Sentier des Ocres). 오래전 염료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천연 색소의 황토 광산이 염료 산업의 쇠퇴와 함께 폐광되었다가 관광객을 위해 되살아났다. 누군가는 미니 그랜드캐니언에도 못 낀다며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혼자 감탄하며 걸었다. 노랗고 붉은 흙산이 연초록 나뭇잎들과 강렬한 대조를 이룬 길은 경이로웠다. 흙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안개가 흩어지듯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신발에 묻어난 붉은 흙가루도 싫지 않았다.

쓸쓸하기만 했던 그 정신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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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스에서 시작한 여행은 에즈, 뱅스, 생폴드방스, 루시용과 고르드, 아비뇽을 거쳐 이제는 아를로 넘어갈 차례였다. 나에게 살아있는 인간 중에서 가장 위대한 남자는 라인홀트 메스너(이탈리아의 산악인)이고, 죽은 인간 중에서 가장 불행한 남자는 언제나 빈센트 반고흐였다. 남프랑스는 인상파의 성지. 고흐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좇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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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레미드프로방스의 정신병원 겸 수도원. 빈센트 반고흐가 폴 고갱과 다툰 뒤 귀를 자르고 스스로 들어갔던 곳이다.

가장 오고 싶었던 곳은 생레미드프로방스의 정신병원. 고흐가 고갱과의 다툼 뒤 귀를 자르고 스스로 들어갔던 곳이다. 고흐가 즐겨 그렸던 아이리스는 어느새 지고, 정원에는 양귀비가 흐드러지고 있었다. 이곳의 정서는 고독인 걸까. 고흐가 머물렀던 두 개의 방을 재현해 놓은 곳도, 여기저기 산만하게 붙여놓은 안내문도, 살 게 없는 기념품 가게도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고흐의 평전들을 찾아 읽으며 그의 삶을 이해해 보려 했던 30대의 날들이 있었다. 견딜 만큼 달콤했던 나의 고독과 달리 그의 고독은 쓰리고 고통스러운 고독이었다. 세상과 불화하며 가고 싶은 길을 가던 나는 고독하다 여겼지만 어떤 순간에도 절망적으로 고독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직장과 가정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환희가 더 컸으니까. 죽어서 이렇게 사랑받으면 뭐 하나. 돈도 없이, 친구도 없이 그토록 고단하고 외로운 삶이었는데…. 고흐가 자신을 담당했던 병원의 의사에게 선물한 초상화는 의사 부인이 구멍 난 닭장 우리를 막는 용도로 썼다던가. 고흐는 이곳에 1년을 머물며 150점의 유화를 그렸다. ‘별이 빛나는 밤’이나 ‘꽃 핀 아몬드나무’, ‘붓꽃’ 같은 작품이 이곳에서 그려졌다. 고흐가 화가로 지낸 8년간, 800여점의 그림을 그렸으니 오롯이 그리는 일에만 바쳐진 삶이었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후 자신이 스스로의 적이라고, 그 적을 이기지 않고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고 고백하던 고흐의 얼굴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정원을 떠나지 못한 채 고흐의 방을 올려다보며 오래 서성였다.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 그것만이 내가 차릴 수 있는 예의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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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경기장이 보이는 아를의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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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도시라고 하면 아마도 아를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해바라기’, ‘아를 병원’, ‘밤의 테라스 카페’, ‘아를의 원형 경기장’ 같은 많은 작품이 탄생한 곳이니. 이 도시에 와보니 고흐의 흔적은 희미했다. 문화센터로 변한 ‘아를 병원’ 건물은 볼품없었고, ‘밤의 테라스 카페’의 모델이었던 카페는 폐업. 고흐 재단 미술관에는 고흐 작품이 딱 두 점 있었고, 해바라기는 일러 피지도 않았다. 이 도시의 주인공은 고흐가 아니라 원형 경기장을 비롯한 로마 유적지 같았다. 원형 경기장, 고대 극장, 공동묘지였던 알리스캉, 콘스탄티누스 공중목욕탕…. 오랜 세월에도 창연한 장엄함을 저마다 품고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부서진 석관이 늘어선 알리스캉은 고흐가 가을 풍경을 비롯해 넉 점을 그리기도 했던 곳. 아무렇게나 놓인 석관들이 ‘극락의 들판’이라는 그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처연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찾는 이가 적어 고즈넉해서 오래 머물기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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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의 이우환 미술관.

고대 유적과 함께 아를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이우환 미술관이었다. 이우환의 대규모 전시를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인들이 왜 그토록 그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간결한 가운데 힘과 긴장이 느껴지고, 선적이면서 명상적이었다. 자연의 소재인 돌과 현대사회의 소재인 철을 대비시킨 조각 작품들이나, 세밀히 혹은 과감히 붓 자국을 만들며 그린 회화가 보는 이의 마음에 어떤 시적인 위로를 건넨다고 할까. 살아서 일본과 한국(부산)에 이어 세 번째로 자기 미술관을 갖게 되다니 그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살아생전 단 한 점의 그림이 팔렸던 고흐와는 얼마나 대조적인지.

세잔이 걸었던 길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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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이 무려 87번이나 그렸던 생트빅투아르산.

생레미드프로방스에서 하룻밤, 아를에서 하룻밤을 머문 후 엑상프로방스로 넘어갔다. 100개가 넘는 분수 덕분에 ‘물의 도시’라 불리는 엑상프로방스는 엑스마르세유대학 학생 수만 8만명이 넘는 대학 도시답게 활기찼다. 이곳은 폴 세잔이 오랫동안 거주했던 곳이라 그의 흔적이 여기저기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세잔이 살았던 집도, 아틀리에도 보수 공사 중이었다. 엑상프로방스는 세잔이 태어나 학교를 다니고, 에밀 졸라(가난하고 병약해 따돌림당하던 그를 구해준 후)와의 긴 우정이 시작된 곳. 그 우정은 30년 후에 파탄이 나는데, 에밀 졸라가 주변 실존 인물을 대거 등장시켜 탄생시킨 ‘작품’이라는 소설 때문이다. 소설에는 재능 없는 화가로 살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운의 인물 클로드가 등장하는데, 이 인물은 누가 봐도 세잔이라고 추정 가능했다. 열등감과 배신감에 휩싸인 세잔은 예의 바른 편지 한 통을 졸라에게 보내고 절교, 다시는 졸라를 만나지 않았다. 30대의 나는 졸라와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세잔에 대한 평가를 절하했다. 옹졸해서 시시한 남자라 여기면서. 과도한 인정 욕구,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파괴하던 분노심 같은 성정도 불편했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곳으로 돌아온 말년의 세잔은 폭풍이 지나간 후의 고요한 바다 같았을까. 아니,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품은 채 그는 세간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구현하고자 한 대상(사과 혹은 빅투아르산 같은)의 본질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보이는 대로가 아닌 느껴지는 대로, 사물이 품은 변치 않는 기운을 담아낸 이 시기의 그림에서는 그야말로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거장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비를 맞으며 생트빅투아르산을 그리다 폐렴에 걸려 죽었으니 화가다운 죽음이자, 고집스러운 세잔다운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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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의 오두막이 있던 비베무스 채석장 입구.

그의 그림에도 등장한, 세잔의 오두막이 있던 비베무스 채석장이라도 가보자 싶어 택시를 타고 찾아갔다. 이곳조차 6월부터 문을 연다고 적혀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니 트레킹 코스를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었다. 세잔이 무려 여든일곱 번이나 그렸던 생트빅투아르산이 눈앞에 보였다. 은색에 가까운 회색 돌산이었다. 졸라댐을 거쳐 생트빅투아르산을 바라보며 걷다가 세잔이 그림 도구를 보관하려고 임대했던 방앗간으로 내려오는 두 시간짜리 코스로 방향을 정했다. 청명한 봄날이었고, 하이킹을 즐기는 프랑스인들이 간간이 보여서 편안한 마음으로 걸었다. 세잔 방앗간 앞에서는 스웨덴에서 온 베아타를 만나 그녀가 안내하는 폭포와 유적지까지 함께 걸었다. 이 완고한 남자 세잔에게 조금은 다가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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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의 고흐 자화상.

인상파의 흔적을 좇아 내려온 남프랑스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파리였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인상파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파리 1874 인상주의의 발명’ 전시가 막 시작된 터였다. 안 그래도 붐비는 미술관이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1874년 4월15일, 세잔, 모네, 피사로, 마네, 르누아르 같은 31명의 작가가 공식 파리 살롱전에 초대받지 못한 작품 200점을 사진가 나다르의 살롱에 걸고 전시를 시작했다. 고작 3500명의 관람객에게 단 4점을 팔았던 전시. 이곳에 전시된 모네의 ‘인상, 해돋이’ 작품에 대해 한 평론가가 “인상적이다. 그림이 걸린 벽지가 더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라며 비웃었던 데서 인상파의 이름이 유래했다. 한 작품에 수백, 수천억을 호가하는 그림이 가득 모여있었다. 제각기 다 아름다운 그림이었지만 그 누구의 그림도 고흐와는 달랐다. 인파에 떠밀리다시피 전시를 둘러본 후 고흐의 그림을 찾아갔다.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있을 때 그린 자화상 앞에 서서 남몰래 눈물을 닦았다. 몇 번을 봐도 고흐의 터치는 여전히 강렬했다. 그 유일무이한 존재감이 100년이 넘는 시간을 거슬러와 오르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여행가 김남희는 2003년 이후 유목민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는 앉아서 유목하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지은 책으로는 ‘길 위에서 읽는 시’, ‘여행할 땐, 책’,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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