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뛰어넘는 자만이 다다를 수 있는 눈부신 운명으로
[책&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프로메테우스, 참기 힘든 고통의 기준점
아무에게도 길 물을 수 없을 때가 신화와 만나는 순간
‘정보’ 아닌 ‘이야기’로 품어야 신화는 삶으로 침투한다
(18) 너의 고통이 나를 깨우칠 때
고통이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내게 말을 거는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프로메테우스다. ‘이 이상은 못 견디겠다’ 싶을 때, 프로메테우스는 내게 다가와 말을 건다. 넌 아직 더 갈 수 있어. 네가 꿈꾸는 곳으로 가려면, 아직 멀었어. 하지만 참 많이, 참 멀리, 네 힘으로 걸어왔구나. 조금만 더 힘을 내렴. 넌 반드시 네가 꿈꾸는 그 세계를 향해 끝까지 걸어갈 수 있어. 프로메테우스는 내게 그렇게 속삭인다. 내가 이제는 정말 지쳐버렸다고, 이제 그만 좀 쉬고 싶다고, 포기하고 싶다고 외칠 때마다. 프로메테우스는 내 손을 붙잡아 자신의 갈비뼈 아래에 가져다 대며 미소 짓는다. 여기를 봐. 난 아직도 피 흘리고 있어. 오늘도 독수리가 다녀갔거든.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아 먹히면서도, 고통에 찬 비명 한번 지르지 않는 프로메테우스의 강인함이 그렇게 나를 번쩍, 일깨운다.
나는 가끔 그에게 묻는다. 후회하지 않느냐고. 인간들은 너에 대한 고마움조차 모른다고. 네가 제우스에게서 불을 훔친 이유 따위, 다들 잊어버렸다고. 아무도 너의 고통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인류는 신화를 잊었고, 신화는 상품 브랜드를 표현하는 상업적인 목적으로만 이용된다고. 프로메테우스는 웃으며 말한다. 내 이름이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잖아. 먼저 깨달은 자. 미래를 보는 자.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자. 프로메테우스는 이렇게 될 줄 모두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제우스가 보낸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아 먹히고, 또 그 고통이 행여나 끝날세라 다음날 아침 또다시 간에 새살이 돋아나는 형벌을 받을 줄 알면서도, 제우스의 명을 거스르고 인간에게 불을 주었다. 불은 문명의 원천이 되었고, 우리가 매일 누리고 있는 과학과 의학과 예술, 그 모든 것의 발전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모두가 그를 잊을 줄 알면서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인간에게 불을 남겼다. 하늘의 최고 권력자, 제우스의 저주를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내게 필요한 용기의 뿌리를 깨닫는다. 신화는 그렇게 내가 가장 고통받을 때마다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용기를 준다.
먼 옛날 이야기가 나를 지켜준다
누가 신화는 그저 먼 옛날의 허구적 이야기라고, 이제는 실효성이 떨어졌다고 말했는가.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신화를 읽고, 신화를 살아내려는 사람들에게, 신화는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신화를 읽고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신화는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꿈의 씨앗을 뿌려주고, 그 씨앗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평생 매일 조금씩 자라나 마르지 않는 상상력의 아름드리나무 숲을 이룬다. 신화의 숲이 이룬 문학의 오솔길을 걸어갈 때면, 나는 결코 두렵지 않다. 두려움보다 더 커다란 용기가 나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최고의 권력자 제우스의 협박에도 결코 무릎 꿇지 않은 프로메테우스의 용기가, 감히 인간이 신의 재능을 엿봐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아테나의 질투에도 굴하지 않았던 아라크네의 패기가, 나를 지켜준다.
길을 잃어 괴로울 때, 아무에게도 이 길만은 물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그때가 바로 내 안의 신화와 만나는 순간이다. 신화는 그냥 줄거리만 잠깐 ‘네이버 지식인’을 통해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제대로 읽어야 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읽으면 더욱 좋겠지만, 그 고풍스러운 문체가 버겁다면 불핀치의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어도 좋다. ‘정보’와 ‘이야기’는 끝내 다르기 때문이다. 신화의 줄거리만 효율적으로 요약하여 알고 있는 것은 단순한 정보이기에 우리에게 진정으로 따스한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이야기로 읽는 신화는 그 문장으로, 그 생생한 표정과 뉘앙스로,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어떤 지식이든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되었을 때, 지식은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신화는 그저 건조한 정보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펄떡이는 이야기로 읽어야만 한다. 앎에 그치는 신화가 아니라 삶으로 침투하는 신화를 살아내야 한다.
내가 프로메테우스를 사랑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모진 고통을 초인적인, 아니 초신적인 인내로 이겨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최고의 권력자 제우스조차 말리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어쩌면 연민. 어쩌면 부러움. 영원히 살지만 그 무엇도 새롭지 않은 신들과 달리 인간은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에 모든 것이 새롭다. 프로메테우스는 어쩌면 인간의 그 끝없는 새로움을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1분 1초가 새로우며, 하루는커녕 1초 뒤의 비극도 예상하지 못한다. 바로 그 ‘한없는 무지’가 프로메테우스의 연민을 자아내지 않았을까.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사랑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신의 도리를 저버린 프로메테우스의 위대한 범죄 때문에 우리는 불을 사용하고, 의학을 발전시키고, 과학을 손에 거머쥐게 되었으며, 걸핏하면 신의 자리를 넘보는 마성의 두뇌를 갖게 되었다.
신화를 살아낸다는 것
나는 프로메테우스의 그 한없는 인내심만큼이나, 그의 사랑을 닮고 싶다. 한명의 인간을 특별히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한없이 취약한 존재 자체를 사랑한 그의 드넓은 마음을, 부디 닮고 싶다. 제우스는 오늘도 자신을 속이고 인간에게 신을 뛰어넘을 무기를 안겨준 프로메테우스를 미워할 것이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쓰라린 아픔을 감내하며, 환하게 미소 지을 것이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에서, 그는 간을 쪼아 먹히면서도, 고통받는 타인의 아픔을 걱정했다. 헤라의 질투로 만신창이가 된 이오가 그녀의 눈을 피해 사방팔방으로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프로메테우스는 이오에게 따스한 조언을 해준다. 언젠가는 당신의 고통이 분명 끝날 것이라고. 헤매던 이오의 마지막 유랑지, 이집트에 다다르면 그녀의 고통이 그치게 될 것이라고. 프로메테우스는 그렇게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눈부신 통찰과 따스한 조언을 그치지 않는다. 고통 속에서 지혜를 발휘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독수리의 날카로운 부리에 생살을 뜯기는 고통과 치욕을 견디면서도, 프로메테우스는 평정과 침착을 잃지 않았다. 따스한 연민과 지혜로운 공감의 힘을 잃지 않았다. 나도 그런 프로메테우스를 닮고 싶다. 신화 속 인물들이 뿜어내는 멈추지 않는 사랑과 지혜의 힘으로 내 앞의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싶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라는 감동적인 작품으로 여전히 심금을 울리는 그리스 비극의 거장 아이스킬로스의 말처럼, 깨우침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르는 법이지만, 지혜는 우리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조차, 우리가 원하지 않을 때조차도, 신들의 위대한 은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니까. 나는 너무 멀게만 느껴져 결코 내 것 같지 않았던 신화가 바로 현재의 이야기, 우리의 삶, 지금 나의 고민과 연결되어 있음을 온 힘을 다해 알려드리는 메신저가 되고 싶다. 내가 신화를 통해 매일 얻고 있는 풍요로운 삶의 자양분을 꼭 당신에게도 전해드리고 싶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도 아니고 신도 아닌 자리, 괴물도 아니고 영웅도 아닌, 그러나 그 모든 것이기도 한 고통스러운 경계의 자리에 서서 여전히 저 높은 올림포스의 하늘이 아닌 저 낮은 인간들의 땅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고생해서 훔쳐준 ‘불’, 즉 문명이라는 위대한 가능성을 때로는 재앙으로 바꾸어버리는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에 프로메테우스는 오늘도 고통스럽지 않을까. 나는 독수리에게 쪼아 먹히는 간의 고통보다도 우리 인간이 문명의 불씨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프로메테우스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 자신의 개인적 아픔보다도 신과 인간 사이의 ‘균형 잡기’를 위해 목숨을 건 프로메테우스, 신과 인간 사이의 불평등을 끝장내기 위해 인생을 건 프로메테우스의 용기를 닮고 싶다.
이야기를 ‘문학’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모든 이야기 속 인물들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지금 살아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승화시켜 살아낼 줄 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단지 신화를 읽을 것이 아니라 신화를 살아내야 한다. 신화를 살아낸다는 것, 그것은 단지 신화 속 올림포스 신들처럼 멋지고 영웅적으로 살아내는 것만은 아니다. 신화를 살아낸다는 것. 그것은 신화 속의 인물들이 받았던 고통의 의미를 되새기며, 나에게 그런 고통이 다가왔을 때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일이다. 내 안에 꿈틀거리는 작은 신화의 씨앗에 물을 주기 위해, 나는 매일 조금씩 고통을 참는 연습을 한다. 이제는 고통이 엄습할 때마다 나에게 내가 속삭인다. 나를 몸부림치게 했던 그 모든 고통은 프로메테우스의 아픔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고. 신화를 살아낸다는 것, 그것은 고통을 뛰어넘는 자만이 다다를 수 있는 눈부신 운명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다. 우리의 무의식 너무 깊숙이 뿌리박혀 있어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신화의 힘과 지혜가 당신을 지켜주기를.
정여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