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고 고른 마녀사냥, 희생자는 어떤 여성들이었을까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33. 빈첸츠 카츨러, ‘1583년 마녀 엘자 플라이나허의 화형’
보복당할 일 없이 죽일 이 누구
가부장제의 외피 없는 독신 여성
마녀사냥의 편리한 희생양
택배 수신인에 가명 쓰고
‘두팔체’ 만연한 현대사회
과거와 무엇이 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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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을 조사하다 놀란 적이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마녀사냥’은 14~17세기 서구 교회와 국가가 이단자를 마구잡이로 잡아 화형에 처하던 비이성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마녀 고발자들의 행태가 생각했던 것만큼 종교적 광기에만 기인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마녀로 몰린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양했는데 그중 제일 표적이 되기 쉬운 사람은 비혼 여성, 남편과 사별한 여성과 같은 혼자 사는 여성들이었다. 왜였을까. 사회적 지위가 약한 독신 여성들을 고발하는 것은 남성을 고발하는 것보다 뒤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성의 정치·경제·법적인 힘과 체력은 고발자가 보복당할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신 여성은 부친, 남편 등과 같은 가부장의 보호를 받지 못했기에 무력했고,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앙갚음하기 어려웠기에 마녀사냥 주동자들에게는 편리한 희생양이었다. 따라서 마녀사냥은 이른바 ‘묻지마 고발’로 이뤄진 게 아니었다. 고발자들은 이 사람을 마녀로 몰아도 괜찮을지 면밀하게 따지며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은’ 이들이었다.
그가 마녀로 선택된 이유
1583년 9월2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화형당한 엘자 플라이나허(1513~1583)도 그렇게 희생당한 사람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빈첸츠 카츨러(1823~1882)가 그린 그의 마지막 순간을 보자. 70살의 노인 엘자 플라이나허가 나무 기둥에 사슬로 손을 묶인 채 서 있다. 엘자는 직전까지 행해진 숱한 고문으로 이미 만신창이 상태였다. 맨발에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그간의 고생을 짐작하게 한다. 구경꾼이 환호하는 가운데 이제 막 발밑의 나뭇단에 불이 붙었다. 곧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 끝에 숨이 멎을 것이다. 얄궂은 건 자신의 온몸을 태운 땔나무 값이 플라이나허의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마녀 심문 비용도, 화형 전에 열린 재판관들의 연회 비용도 모두 플라이나허가 부담했다. 게다가 그의 남은 재산은 모두 지방관리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렇게 이 여성은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지워졌다. 도대체 플라이나허는 어떤 꼬투리를 잡혔기에 마녀로 ‘선택’되었을까.
1513년 방앗간지기의 딸로 태어난 플라이나허는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자주 경험해야 했다. 어릴 적 사랑에 빠져 사생아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곧 세상을 떠났다.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남편도 일찍 숨졌다. 그 뒤 재혼해 아이를 낳고 잘 사나 했는데 두번째 남편 역시 플라이나허보다 먼저 사망했다. 딸 마르가레트도 넷째 아이 아나를 낳은 뒤 세상을 떴다. 플라이나허는 이 같은 시련을 신앙의 힘으로 버텼다. 마침 그는 가톨릭에서 루터교로 개종한 터였다. 플라이나허는 슬픔을 딛고 마르가레트가 남긴 막내 손녀 아나를 거두어 정성껏 길렀다.
그런데 바로 그게 문제였다. 마르가레트의 남편, 그러니까 플라이나허의 사위인 게오르크 슐루터바워는 자신의 딸을 데려가 홀로 키우는 장모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게다가 딸 아나는 간질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결국 게오르크는 자신과 마찰을 빚던 장모를 ‘마녀’라고 고발했다. 이유는 얼마든지 갖다 붙일 수 있었다. 플라이나허의 주변인들이 차례차례 사망한 것도, 아나의 간질 증세도 모두 플라이나허의 마녀짓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장 가톨릭 예수회 소속 심문관이 플라이나허가 마녀인지 아닌지 판명하기 위해 나섰다. 심문관의 눈에는 루터교로 개종한 플라이나허가 좋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플라이나허는 손쉽게 화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일련의 일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아무도 플라이나허를 대변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보복당할 불안 없이 곱게 재산을 몰수당하며 죽어줄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의 외피가 없는 여성의 삶은 이렇게 위태로웠다. 그렇다면 가부장제 안의 여성은 과연 안전했을까. 13세기 프랑스에서 그려진 삽화를 보자.
남편은 아내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내는 신발과 머릿수건이 벗겨지며 고꾸라졌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주먹으로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한다. 비명 소리를 들은 이웃들이 몰려왔지만, 들어와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문밖에서 지켜볼 뿐이다. 남편은 이렇게 소리친다. “여자들은 모두 창녀였고 지금도 창녀이며 앞으로 창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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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운문소설인 <장미 이야기>의 한 장면이다. 13세기 프랑스 작가 기욤 드 로리스와 장 드 묑이 지은 <장미 이야기>는 남녀 간의 사랑을 냉소적으로 그린 작품인데 앞서 보았듯 여성을 멸시하고 비하하는 내용으로도 화제가 됐다. 문제는 이 작품이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다는 데 있었다. 영국의 시인 초서가 번역해 프랑스를 넘어 영국에도 인기를 끌 정도였다. 당대 남성들이 여성을 어찌 생각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독특한 점은 ‘내 아내만은’이라는 정서조차 없다는 것이다. 너무도 당당하게 실린 이 삽화는 되레 남편이 얼마나 폭력적인 존재였으며, 아내의 가정 내 지위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증명하고 있다. 조지 트리벨리언의 책 <영국사>에도 “아내에 대한 구타는 남성의 공인된 권리였고, 상층민이나 하층민이나 할 것 없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자행했다”고 덤덤하게 기술될 정도니 말이다.
‘두팔체’ 쓰는 요즘 달라진 것 없어
사실 ‘마녀’ 플라이나허가 손녀 아나를 데려온 것도 ‘가정폭력’ 때문이었다. 플라이나허의 딸 마르가레트는 숨을 거두기 전, 엄마에게 당부했다. ‘남편에게 절대 아나를 맡기지 말고 엄마가 손수 거둬 달라’고. 평소에도 남편 게오르크가 휘두르는 폭력 때문에 고통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갓난아이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마르가레트의 걱정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아나를 제외한 마르가레트의 아이 세 명은 아버지 게오르크 밑에서 컸는데, 그들은 마르가레트가 죽은 지 1년도 채 못 되어 모두 사망했다. 아버지의 폭력 때문으로 추정되지만, 당시에는 게오르크의 주장대로 플라이나허의 마법 때문에 죽었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가부장의 폭력은 그다지 별스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중세가 아니다. 하지만 현대 여성들의 처지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두팔체’라고 들어보았는지. ‘두팔체’는 혼자 사는 여성이 이웃에게 층간소음 항의 같은 생활민원을 할 때 쓰는 거친 필체다. 여성이라고 무시할까 봐 일부러 ‘센 남성’으로 보이기 위한 전략이다. 택배를 받을 때도 수신인에 본명 대신 ‘곽두팔’을 쓴다. 혼자 살면서도 현관에는 일부러 남성의 신발을 함께 놓아둔다. 모든 게 생존을 위해서다. 그렇다면 가부장의 보호를 받는 여성들은 안전할까. 유엔여성기구에 따르면 전세계 여성 3분의 1이 육체적, 성적 폭력을 겪었는데, 대부분 친밀한 파트너에게 당했다고 한다. 2012년에 살해된 여성 2명 중 1명은 배우자나 (남성)가족에 의해 숨졌으며 가정폭력 희생자의 85%는 여성이었다. 법원도 남성 편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맞아 죽어도 사법부는 고의가 아니었다며 선처한다. 매일같이 두들겨 맞던 여성이 어느 날 대응하다 남편을 죽이면 고의라며 엄벌한다. 이쯤 되면 헷갈린다. 남자 없이 살아도 위험하고 남자와 함께 살아도 위험하다. 여성이 안전한 자리는 과연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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