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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 오비 베어'가 사라진다고?

[한겨레21] 90살 넘은 창업주 땀이 서린 을지로 호프 골목 원조집…

건물주와 소송 중, 폐업 위기

'을지 오비 베어'가 사라진다고?

한 달 전이다. 서울 을지로에 있는 ‘을지 오비(OB) 베어’에 갔다가 주인 강호신(59)씨의 하소연을 들었다. 쫓겨나게 생겼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 이 가게를 꼭 지키고 싶어요. 아버지가 청춘을 바친 곳”이라며 강씨는 펑펑 울었다. 그는 이 가게의 창업주 강효근(92)씨의 딸이다. 이 집의 역사엔 ‘최초’가 많다. 바싹하게 구운 노가리도 이 집 연탄불에서 탄생한 술안주다. 여름밤 전국에서 몰려온 술꾼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을지로 노가리 호프 골목’의 출발도 이 집이다.


계약한 이는 인근 호프집 업주

'을지 오비 베어'가 사라진다고?

요즘 을지로는 ‘힙지로’(힙+을지로)라고 한다. 어두컴컴한 공구 거리와 인쇄 골목에 세련된 젊은이가 하나둘 모이면서 뜨는 동네가 됐다. 모순되게도 39년간 한자리를 지킨 노포(오래된 식당) 주점이 동네의 부흥과 함께 없어질 판이다. 더구나 이 집은 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가 지정한 ‘백년가게’로 선정된 곳이다. 백년가게는 중기부가 100년 이상 보존가치가 있는 가게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정책이다. 선정된 지 몇 달 안 돼 주인 부부는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사연이 궁금하다.


“2018년 9월에 가게를 비우라는 내용증명서를 받았어요. 계약기간은 2018년 10월30일까지였죠. 8월20일에 주인을 만나 ‘임대료를 두 배 주겠다’고 했는데, ‘다른 이와 이미 계약했다’고 말하더군요.” 강호신씨와 그의 남편 최수영(64)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매달 임대료를 꼬박꼬박 내면서 임차인으로서 의무를 성실히 지켜온 터라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뜻밖에도 건물주가 계약한 이는 인근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는 업주라고 한다. 대화 도중 그 사실을 안 강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성실하게 장사만 하다가 당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소송할 수밖에 없어요.”


19.8㎡(대략 6평) 정도 크기의 이 가게에 들어서면 차가운 도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정취를 느낄 수 있다. 39년간 버틴 낡고 헤진 식탁은 지금도 단골을 위로한다. 맥주잔을 든 곰이 그려진 간판은 한국 주류사의 상징 같다. 좁은 가게 안에 쌓인 허름한 공기는 지난 세월 서민과 함께한 숨결이다. 그 공기는 창업주 강효근씨의 남다른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창업주 강효근씨의 고향은 황해도 송화군이다. 1·4 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와 철원 등에서 미군 군무원으로 일하다가, 종로3가에서 ‘노르망디’라는 경양식집을 운영했다. 일찍부터 맥주에 관한 이해가 높았던 그는 1980년 당시 동양맥주(현 오비맥주)가 생맥주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모집하자 신청해 ‘을지 오비 베어’를 열었다. 요리사 박찬일이 그를 인터뷰해 쓴 <노포의 장사법>엔 눈물겨운 창업기가 소개됐다. 기름밥 먹는 인쇄 골목 노동자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새벽에 일어나 거리를 청소한 뒤 아침에 문을 열었다. 개업하고 2년 5개월간 가게에서 스티로폼 매트와 담요 한 장만 깔고 숙식했다. 최고의 맥주 맛을 내기 위해 일어나자마자 빈속에 생맥주를 마셨다. 맥주 한 잔은 고작 380원. ‘전쟁 같은 야간작업을 마치고 난 다음 날 새벽 쓰린 가슴’을 부여잡은 골목 노동자들은 ‘차가운 소주’ 대신 강씨의 맥주를 마셨다. 그가 만든 노가리 양념장이 한몫했다. 지금도 그의 양념장을 베끼려는 업자가 많지만, 섬세한 배율을 알아내지 못해 흉내만 낼 뿐 그 맛은 나지 않는다.


일어나자마자 빈속에 생맥주를 마셨던 이유


강호신씨는 “아버지의 고추장 레시피는 나만 안다”고 말한다. 딸에게만 전수한 노포의 비기다. “아버지는 밤 10시면 문을 닫으셨죠. 집에 가서 가족과 함께하라는 취지였어요. 주변에 비슷한 호프집이 하나둘 생길 때도 그 철학을 버리지 않으셨답니다. 가게를 넓히라는 주변의 권유도 듣지 않으셨죠. 돈벌이가 중요한 분이 아니셨어요.”


알음알음 가게 처지가 소문나자 안타까운 마음에 찾아온 이들이 늘었다. 정철승 변호사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소송에서 강씨 부녀의 대리인을 자청했다. 정 변호사는 “단골이다. 건물주의 횡포가 얼마나 부당한지 알기에 나섰다”며, “일반적으로 이런 소송은 6개월이면 끝나는데 이 사건은 6개월을 넘겼어요. 여러 차례 계약을 갱신하면서 복잡한 쟁점이 생겼어요”라고 말한다.


정 변호사처럼 안타까워하는 단골이 많다. 을지로 거주 가구디자이너 소동호씨도 그런 이다. “‘애정하는 공간’인데 소식 듣고 매우 속상하고 안타까웠어요.”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 1호선 지회장이자 지하철 2호선 신설동역에서 근무하는 윤제훈 역무원은 “이곳은 내 청춘이 녹아 있는 술집”이라고 운을 뗐다. “우리는 이 집을 ‘고추장집’이라고 했죠. 주야간 교대 근무할 때 밤새 취객 등에 시달린 후 아침 9시 퇴근하면 이곳에서 한잔했어요. 스트레스가 풀렸지요. 1987년 노동조합을 만들 때 동지들을 규합해 토론한 곳도 바로 여기예요. 백년가게로 지정되면 뭐하나!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데요.” 노포의 위기에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다. 과연 이곳은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을까?


개정된 임대차보호법 도움 안 돼


지난해 10월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이 개정됐다. 자영업자가 장기간 안정적인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한 조처다. 임차인은 최장 10년까지 한 장소에서 장사할 수 있다. 임대료 상승 폭도 매년 5% 이내로 제한한다. 하지만 39년간 영업한 ‘을지로 오비 베어’는 개정된 법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자영업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분쟁 내용도 복잡하다. 적당히 꿰맞춘 개정안으로는 얽히고설킨 사안을 해결하기 어렵다.


“법 테두리 안에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어요. 임차인이 소송에서 이기는 경우가 있을까요?” 강호신씨의 한숨이 깊어진다.


글·사진 박미향 <한겨레> ESC 팀장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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