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센 여자가 아니다
여성에게 좀처럼 주어지지 않던 <하이에나> ‘돌아이’ 캐릭터 정금자와 김혜수
드라마 <하이에나>에서 정금자 역으로 새로운 인생 캐릭터를 만드는 김혜수. SBS 제공 |
트레이닝복 vs 슈트, 지하철 vs 외제 차, 소주 vs 와인, 잡초 vs 난초, 길바닥 vs 상류층, 무엇보다 돈 vs 명예. SBS <하이에나>(극본 김루리·연출 장태유)의 정금자(김혜수)와 윤희재(주지훈)는 극과 극이다. 그들의 수많은 차이 앞에 성별은 오히려 ‘사소한’ 요소처럼 보일 정도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변호사라는 직업, 그리고 둘 다 뻔뻔한 속물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다른 배경과 욕망을 지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타입의 속물이다.
돈이 없어 대학조차 가지 못하고 사법시험에 매달려 혼자 살아남은 정금자는 아무리 더러워도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이겨야만 한다. 반면 대법원장이었던 조부, 대법관 부친, 부장판사 형으로 이어진 법조계 엘리트 가문의 일원이자 대형 로펌 송&김의 파트너 윤희재는 자신의 존재 자체로 선민의식을 갖는다. 정금자는 승리를 위해 자신을 진흙탕에 내던지지만, 온실에서 귀하게 자란 윤희재는 자신이 너무 소중하다. 그가 정금자를 앞설 수 없는 이유다.
밑바닥부터 굴러 업계 정상까지 올라온 돈키호테 같은 승부사, 정금자는 그동안 한국 드라마에서 여성에겐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던 ‘돌아이’ 캐릭터다. 특히 법정물이나 수사물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이 ‘옳은 말 하는 재미없는 캐릭터’ ‘차가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여린 여자’ ‘남주(남자 주인공)가 모험할 때 원칙만 내세우는 답답이’의 덫에 걸려 넘어졌던가. 하지만 손을 더럽히기 두려워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정금자는 이 모든 장애물을 훌쩍 뛰어넘는다.
전형적인 이성애 공식을 벗어나
“보통 센 여자가 아니다.” “공격적인 스타일이시네요.” “날이 바짝 선 칼 같다.” <하이에나> 속 남자들은 정금자를 경멸하거나 경계한다. 그러나 정금자는 개의치 않는다. 화려한(윤희재가 보기엔 요란한) 의상을 입고 무릎이 닳도록 영업하고 어느 자리에서든 눈에 띄길 마다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건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금자가 우아하고 지적이고 상냥한, ‘호감형 여성’을 잠시 연기했던 이유가 단지 윤희재로부터 소송 자료를 빼돌리기 위해서였다는 설정은 특히 재미있다. 아무리 잘난 남자라도, 애초에 사랑을 원하지 않는 여자에겐 먹잇감 이상의 의미가 없다. 이 사실을 인정하기 힘든 윤희재만 고통받을 뿐이다.
<하이에나>가 ‘법정에서 연애하는 이야기’로 요약되지 않는 것은 이 작품의 방점이 법정과 로맨스보다 다양한 캐릭터에 찍혀 있기 때문이며, 정금자와 윤희재의 관계가 전형적인 ‘이성애 공식’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의 직위, 능력, 연령 등은 비슷하거나 정금자가 더 높아 힘의 균형이 팽팽하게 이루어지고, 상황의 주도권 역시 대개 아쉬울 것 없는 정금자에게 있다. 고객 정보 도용 혐의를 받는 의뢰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음란물 사이트 폭서, 들어보셨나요?”라고 묻는 정금자 때문에 썰렁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윤희재가 괜히 혀를 굴려 “빡써~”라고 반복하는 장면은 커플 이전에 코미디 호흡이 맞는 콤비로서 두 사람을 보여준다.
사고는 정금자가 치고 수습은 윤희재가 하는 구도는 남성이 도전하고 여성이 지원하는 기존 구도를 반전한 것에 가깝고, ‘차가운 도시 남자’의 전형처럼 보이는 윤희재는 정금자와 관련되면 감정이 앞서는 애송이가 되어 미련과 순정을 줄줄 흘린다. 애증으로 으르렁대다가도 서로의 능력만은 인정하는 두 사람의 티키타카(짧은 패스를 빠르게 주고받는 축구 경기 전술로, 사람들 사이에 합이 잘 맞아 빠르게 주고받는 대화를 뜻함)는 경쾌하고 산뜻하다.
정금자 뒤 여성들의 합작
이런 정금자, 이런 세계를 완성하는 존재는 무엇보다 김혜수라는 배우다. KBS <직장의 신>에서도 그랬듯, 김혜수는 극적으로 다소 과장된 세계를 장악하는 데 남다른 힘을 발휘하며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아야 할 때를 잠시도 놓치지 않는다. 가정폭력 피해 생존자로서, 이름을 바꾸고 변호사가 되어 과거에서 벗어나려 했던 정금자의 견고한 사회적 가면은 김혜수의 노련한 연기로 화려하게 채색된다. 윙크, 속삭임, 코를 찡긋대며 짓는 눈웃음, 말꼬리를 늘이며 승부수를 띄우는 정금자, 아니 김혜수에게는 언제나 자신이 키를 잡고 있다는 데서 나오는 여유가 있고 심지어 그렇지 않을 때조차 그렇다고 상대가 믿게 하는 카리스마가 있다. 그리고 이 에너지는 가끔 빈틈을 보이는 이야기의 멱살을 잡아 앞으로 쭉쭉 끌고 갈 만큼 강력하다.
1986년 데뷔한 배우가 2020년에도 여전히 폼을 떨어뜨리지 않고 자신의 ‘쓸모’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은 개인의 삶을 놓고 보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한 번도 스타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는 것은 계속 상승만 해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을 유지하고 변신하면서도 추락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스스로 무너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이에나> 제작사 키이스트 박성혜 대표가 과거 김혜수의 매니저였다는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김혜수라는 배우를 ‘너무 오래 봤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게 그의 힘인 것 같다. 다양한 느낌이 있고, 어떤 일도 결코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 없이 끝까지 책임을 지는 배우”라고 말했다. 2016년 백상예술대상에서 tvN <시그널>로 최우수연기상을 받은 김혜수가 소감 마지막에 ‘오늘의 영광’을 드리고 싶다고 언급한 두 명은 소속사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이정은 대표와, “오랜 시간, 저에게 음으로 양으로 힘이 되었던 최고의 파트너였던 박성혜씨”였다. 그러니까 정금자라는 걸출한 캐릭터는 저력과 안목을 갖춘 여성들의 합작으로 세상에 나왔다고도 할 수 있다. 위대한 생존의 결과다.
최지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