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컴퓨터? 슈퍼컴퓨터와 기술 내셔널리즘
[김국현의 만평줌] 제68화
달에 사람이 간다고 해서 삶이 특별히 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폴로 계획으로 달 표면에 내디딘 발자국은 한 나라의 기운을 바꿨다. 기술입국은 이렇게 무모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도전에서 시작한다. 무의미한 과시로 생명력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공작의 화려한 깃털과도 같은 일이다.
기술을 뽐내는 일로는 슈퍼컴퓨터도 있다. 과학 실험 등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빠른 컴퓨터가 있으면 물론 좋다. 하지만 무어의 법칙은 몇 년만 기다리면 슈퍼컴퓨터를 책상 위에 올려주고, 또 몇 년만 기다리면 핸드폰 안에 넣어주므로 잠시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소위 과학강국들은 예산을 투하하고 순위에 집착한다.
일본정부는 인공지능에 특화된 클라우드 인프라를 목표로 12월 8일까지 민간기업참여를 위한 입찰을 받고 있다. 정부주도 기술입국의 꿈을 인공지능과 슈퍼컴퓨터를 통해 실현하고자 2000억원 규모의 예산을 조성했다.
일본은 IT판 공공사업이라는 날 선 비판을 받으면서도 2011년 슈퍼컴퓨터 챔피언에 오른 적이 있다. 바로 후지쯔의 K(京)-컴퓨터인데 초당 1경(京)의 계산을 처리한다는 뜻. 경은 조의 만 배다.
슈퍼컴퓨터도 경제적으로나 민생면에서나 세금을 투하하는 이유가 무슨 의미인지 명쾌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 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이나 심지어 군사력을 과시하는데 애용된다. IBM의 블루진 슈퍼컴퓨터의 주된 목적은 핵실험 시뮬레이션이었다.
이와 같은 슈퍼컴퓨터 국가 간 경쟁 덕에 미국 일변도였던 CPU를 그나마 일본과 중국이 자체 개발·생산하기 시작한다. 현재 1위는 중국의 Sunway TaihuLight(神威太湖之光). 초당 9.3경 회 계산한다고 한다. 이 중국산 CPU를 만들기 위해 유학파들도 귀국했다. 국위선양을 위한 기술 내셔널리즘. 과연 도상국다운 시도다. (실은 중국이 핵실험에 사용한다는 첩보 탓에 작년 일부 인텔 제온칩이 중국으로 수출 금지되었다)
한편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에 능하다는 한국. 순위권 내에 한국산은 찾을 수 없다. 그나마 기상청에서 미국 크레이사로부터 들여온 제온 기반 슈퍼컴퓨터가 46, 47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정도다. 기상청이 지불한 금액만 해도 수백억 단위. 슈퍼컴퓨터는 보통 한 5년 쓰면 더 이상 슈퍼가 아니기 때문에 처분도 힘들다. 기상청 1호기도 6년 뒤 가져가는 이가 없어 돈 백만 원에 고철로 넘겨졌다. 일본의 2천억 예산이 낭비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면 뭐하나. 후지쯔는 지난 10월 PC 사업부문을 중국 레노버에 넘길 정도로 힘들다. 오히려 요즘과 같은 시대에는 철저하게 절약하는 짠돌이 정신으로 실용주의 노선을 걷는 편이 좋을 수도 있다. 흥미로운 사례는 플레이스테이션3 1,760대를 이어 놓은 미 공군의 슈퍼컴퓨터다. 2010년 당시 순위 33위까지 올라갔는데, 비용도 소비전력도 동급 10% 수준. 게임기 본체는 원래 손해 보며 파는 것이고 해마다 싸진다. 이제 이미 그 자체로도 슈퍼컴퓨터라는 이야기가 있는 PS4를 엮어 만든 슈퍼컴퓨터가 기대되는 시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삼성전자가 회수한 노트7에서 보드만 추출하여 초거대 슈퍼컴퓨터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지금도 잘 안 맞는 일기예보. 실용주의와 미니멀리즘의 이미지를 세계에 알렸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