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히스토리 : 한국 골프의 역사
골프를 치다보면 문득 골프는 언제 어떻게 시작된 스포츠인지, 골프룰은 언제 생겨났는지, 최초의 프로골퍼는 누구인지 등 골프 관련 역사에도 궁금증이 생기기 마련이다. 골퍼들의 호기심 해소를 위해 기초상식으로 알아두면 유용한 골프 역사에 대해 연재한다.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골프 역사에 관해 관심을 갖는 이들도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골프는 문명의 발달과 함께 필연적으로 성장했고, 한국 근대사와도 밀접한 관계를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골프가 어떻게 시작됐고, 발전해왔는지 알아보는 것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우리나라의 주요 골프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나라 골프 역사의 시작
처음 한국에서 골프가 시작된 것은 19세기 후반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우리나라는 서양과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조선의 개항을 요구받고 압박을 견뎌야 했다. 이후 고종이 즉위한 시기부터는 여러 외교적인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우리나라 골프 역사가 시작됐다.
조선은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에게 유리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강화도 조약으로 그 결과 원산항이 개항했고, 세관 관리인으로 영국인들이 고용됐다. 그들은 유목산 중턱에 간이 골프장을 만들었고 이것은 일본 최초 골프장인 고베 록코산코스보다 몇 년은 앞서 건설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
우리나라 최초 골프장에 대해 알아보면 댄트라는 영국인이 조선 철도국 간부 의뢰를 받아서 설계했고 개장했다. 지금은 용산구에 위치한 효창공원과 숙명여대 일대로 조선호텔의 편의 시설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코스 길이는 2,322야드로 산악코스이면서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아서 어려운 편이었다. 또 페어웨이가 좁기에 OB가 많았으며 코스 밖 행인들이 공에 맞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골퍼들 사이에서는 코스가 너무 좁고 지형 변화가 심해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결국, 고종 순종 가족의 소유지인 청량리로 옮기며 이후 폐장하게 된다. 아마 효창원 코스가 지금까지 이어졌다면 전 세계적으로 유서가 깊은 골프장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지나 경성 골프 구락부가 결성됐는데 이것은 서울컨트리클럽 전신이 된다.
사실 청량리 코스는 좋은 의도의 이전은 아닐 수 있다. 왕가의 능은 신성시되었고 일반인 출입도 제한됐었다. 그러나 이 왕릉으로 골프장을 이전한 건 우리나라에 민족정기를 끊으려는 일본 정부의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효창원 코스 때도 왕가의 능에 만들고 놀았다고 하므로 슬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서울컨트리클럽은 영친왕이 군자리 땅을 무상으로 대여해 만든 골프장이다. 영친왕은 골프를 즐겼으며 늘 코스를 방문했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꾸준하게 골프장 건설 붐이 일었고 평양과 부산에도 골프장이 개장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으며 전쟁 종전 후 코스가 복원됐지만, 박정희 대통령 때 그곳에 어린이대공원을 조성했다.
한국 골프대회의 시작
우리나라에서 열린 첫 번째 골프대회는 어떤 대회일까? 경성골프구락부에서 주최한 제1회 전조선 골프선수권대회이다. 경성골프구락부가 결성된 후 일반 국민도 골프라는 스포츠를 접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골프가 활성화된 시기는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정식 종목으로 골프가 채택된 후라고 설명할 수 있다.
우리나라 선수의 첫 해외 골프대회 출전
우리나라 선수의 첫 해외 골프대회 출전이 언제인지 살펴보면 1956년 연덕춘의 월드컵 참가를 시작으로 한장상의 일본오픈 우승 기록이 있다. 연덕춘은 캐디를 하다 골프를 시작했고, 이후 일본으로 골프 유학을 하면서 정식 프로가 됐다.
한국 프로골프의 역사는 연덕춘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덕춘은 일본오픈 경기에서 8위에 드는 급성장을 보였다. 이후 그가 배출한 한장상이 일본오픈에서 우승하고, 한국오픈 골프대회를 제패했다. 김승학은 필리핀 오픈에서 처음으로 우승했으며, 그다음 세대 중 두각을 나타낸 남자 골퍼로는 최상호가 있다.
여자 골프선수 중에는 1983년에 한명현이 일본 여자 프로골프테스트에 도전해 통과했다. 이밖에 미국과 일본에서 구옥희가 국제적 명성을 떨쳤다. 재일교포 김영창은 세계 시니어 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1900년대 후반에 박세리의 LPGA 투어 도전 및 1998년 맥도널드 챔피언십 우승은 IMF로 지친 우리나라에 희망을 주었다. 이후 세리키즈 열풍이 불었고 한국 여자 골프선수들이 LPGA 투어를 휩쓰는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박세리가 한국 골프의 살아있는 전설로 평가받는 이유이다.
GJ 글 나도혜 이미지 GettyIma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