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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지콜론북

위로의 디자인, 버스정류장에서

위로의 디자인, 버스정류장에서

BUS STOP / Baltimore, USA

누구나 드나들지만 아무도 영원히 머물지는 않는 곳, 사람도 버스도 저마다 다른 행선지를 향해 잠시 스치고 지나치는 버스정류장은 태생적으로 외로운 공간이다. 모두가 떠난 후 텅 빈 버스 정류장은 더욱 처연해 보인다. 그러나 미국 볼티모어 하이랜드타운에 나타난 버스정류장은 그렇지 않다. 모두가 떠난 후에도 그 자체로 조형물이 되어 독특한 마을 풍광에 일조한다. 굴곡진 건축물 사이로 바람이 통과하고 햇살이 비치고, 혹은 새가 날아와 앉기도 하면서 미세한 변화를 만들어낸다.

 

‘BUS’라는 세 글자는 누가 봐도 이곳이 버스정류장임을 알아차리게 한다. ‘버스’라고 쓰여 있기에 오히려 버스정류장이 아닐 거란 의심이 들지도 모른다. 그리곤 배신과 술수에 너무 익숙해진 게 아닌가, 씁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온갖 은유와 비유와 돌려 말하기에 익숙해졌을 때, 노골적일 정도로 단순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보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하여 마침내 피식 웃음 짓는다. 단순하지만 특별한 발상, 얼핏 쉬워 보이지만 철자의 형태에서 개성을 감지하는 디자인적인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발상이기도 하다. 모든 철자는 사람처럼 각기 다른 특성이나 미학을 지니고 있다.

위로의 디자인, 버스정류장에서

©mmmm...

풍만하고 유연한 ‘S’를 보자. S의 곡선 덕분에 이 글자에서는 사람이 몸을 길게 뻗어 누울 수 있다.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또 어떤가. 두 개의 칸을 가진 ‘B’는 가장 안락한 쉼터가 되어줄 것이다. 다소 장난스러운 ‘U’는 독특한 벤치가 된다. 철자 하나하나가 이토록 큰 존재감을 드러낼 때 새삼 깨닫는다. 모든 글자는 그 자체로 캐릭터를 갖고 있으며, 무한한 의미부여의 가능성을 지닌다.

 

각기 다른 철자의 개성 덕에 이 정류장에서는 일률적으로 줄을 지어 앉을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리면서 원하는 자세로 앉거나, 서 있을 수 있다. 다양한 포즈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이 작품의 일부인 동시에 완성이다. 다채로운 글자의 형태에 대응해 당신은 어떤 포즈를 잡겠는가? 각 글자의 높이는 4미터가 조금 넘고 넓이는 2미터 남짓으로 2~4명이 한 글자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큼직하다. 나무와 철 등 가구를 만들 때 보통 쓰는 재료를 사용했고 벤치를 만드는 것과 별다르지 않은 공정으로 제작했다.

위로의 디자인, 버스정류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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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 동안 동네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며 즐기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디자이너의 바람처럼 이 정류장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고단한 소시민적 생활공간을 초월하는 장소가 되었다. 시민은 정류장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받는다. 버스는 이들을 태우고 다시 활기차게 돌면서 도시의 역동성은 배가된다.

 

좀처럼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의 무료함도, 방금 버스를 놓쳐버린 사람의 탄식도 이 혈맥에서는 밝은 에너지로 전환되어 도시의 혈관에 흐른다. 도시의 피를 건강하게 만드는 버스정류장이다. 이제는 볼티모어의 명물이 되었으며 도시의 아이콘이자 시민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무엇보다 눈에 잘 띈다는 게 큰 장점이다. 이방인이 이 마을에 방문해도 버스정류장을 찾느라 헤맬 필요가 없을 것이다. 버스를 놓칠 위험이 적어졌다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제아무리 무심한 버스 기사라도 이 정류장은 무심코 지나치지 못할 테니까.

엠엠엠엠 mmmm...

에밀리오 알라르콘Emilio Alarcón, 알베르토 알라르콘Alberto Alarcón, 시로 마르케스Ciro Márquez 그리고 에바 살메론Eva Salmerón이 함께 만든 스페인의 프로젝트 그룹이다. 1998년부터 마드리드를 기반으로 공공장소에 창의성을 더하는 프로젝트를 해왔다. 버스BUS는 미국에 설치한 두 번째 공공디자인작품이다.

*위 내용은 책 『위로의 디자인 2』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글 조창원 | 정리 김소영

저자소개

조창원

책을 쓰고 만드는 작가이자 에디터. 서강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런던커뮤니케이션대학에서 출판학을 공부했다. 지은 책으로는 『일상을 바꾸는 쓰레기들』, 옮긴 책으로는 『나의 플랫 슈즈 이야기』가 있다.
changwonj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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