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물 심취했다는 정유정…‘또래 살인’ 키운 건 범죄 예능?
또래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를 받는 정유정(23)이 2일 오전 부산 동래경찰서에서 나와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우발적 범행이라고 진술했던 정유정은 지난달 31일 경찰 조사과정에서 “살인해보고 싶어서 그랬다”고 진술했다. 부산경찰청은 전날 신상공개심의위원회를 열어 피의자 이름과 나이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연합뉴스) |
과외 중개 앱으로 만난 20대 또래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 유기한 정유정(23)이 오늘(2일) 오전 검찰에 송치됐습니다.
정유정은 지난달 26일 오후 5시 30분쯤 부산 금정구 소재 피해자 A 씨 집에서 그를 흉기로 살해한 후 시신을 훼손, 유기한 혐의를 받습니다. 그는 과외 학생과 교사를 연결해주는 스마트폰 앱에서 학부모를 사칭해 지난달 24일 A 씨에게 접근했는데요. “아이를 집으로 보낼 테니 가르쳐달라”고 요청해 A 씨와 약속을 잡은 뒤, 26일 중고마켓에서 구매한 교복을 입고 A 씨 집에 찾아갔습니다.
정유정은 A 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 A 씨 집을 나서기 전 범죄 흔적이 남은 옷을 갈아입었고, 집으로 돌아와 캐리어 등을 챙겼습니다. 이후 가게에 들러 락스와 비닐봉지 등을 사 들고 다시 현장으로 향했고, 시신 중 일부를 캐리어에 담아 택시를 타고 자신이 평소 산책하던 경남 양산 낙동강변 풀숲에 유기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의 행색을 수상하게 여긴 택시 기사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는데요. 경찰이 정유정을 찾았을 때, 그는 A 씨 지갑과 신분증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A 씨가 실종된 것처럼 꾸미기 위해 그의 물품을 함께 챙겨 나온 것으로 조사됐죠. 경찰은 27일 정유정을 긴급 체포한 데 이어 피해자의 나머지 시신을 피해자의 집에서 발견했습니다.
정유정은 경찰에 붙잡힌 후 ‘우발적 범행’임을 주장해왔으나, 가족과 경찰의 설득에 31일 밤 ‘살인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부산경찰청은 1일 신상공개심의위원회를 열어 정유정의 이름과 나이, 얼굴을 공개하기로 했죠.
조사 과정에서 정유정은 평소 범죄를 주제로 한 방송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았고, 범행 석 달 전부터 살인과 관련한 단어를 집중적으로 검색한 것으로 드러났는데요. 최근 TV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예능의 소재가 ‘범죄’, ‘수사’인 만큼 대중의 충격도 큰 상황입니다.
(사진제공=SBS) |
범죄물, 교양에서 예능으로…다양한 형식으로 경각심 줘
‘그것이 알고 싶다’, ‘궁금한 이야기Y’ 등 사건·사고를 다루는 교양 프로그램들은 시청자들의 경각심을 일깨우며 오랫동안 호평을 받아왔습니다. 탐사 보도의 성격을 띤 프로그램은 그 범위가 예능으로까지 확대됐는데요. 실제 사건을 재구성하거나 이를 직접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까지 형식도 다채롭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는 이야기꾼들이 하나의 사건, 사고를 알아보며 각자 느낀 바를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풀어내는 형식으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 속 사건들을 설명하면서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는 평을 받죠. 지난달 25일 방송에서는 1991년 ‘낙동강변 살인사건’ 당시 경찰의 고문으로 누명을 쓰고 21년 복역한 장동익 씨의 이야기를 조명했는데요. 오랜 시간의 싸움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아낸 사연을 소개하며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전문가들이 방송에 참여하며 사건을 분석하는 예능도 다수입니다. 현재 방송 중인 ‘용감한 형사들 2’도 마찬가지죠. ‘용감한 형사들 2’는 현직 형사들의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실제 있었던 사건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당시 현장 폐쇄회로(CC)TV 영상, 검거 현장 자료, 형사 수첩 등을 공개해 사실성을 강조합니다. 특히 프로파일러 출신 권일용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가 출연하면서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른 이유와 심리를 분석하고, 일반인에겐 생소한 수사 용어 등을 쉽게 풀어 설명하면서 이해를 돕습니다.
3월 말 방송을 시작한 ‘과학수사대 스모킹건’은 과학수사 현장을 통해 몰입을 부르는데요. 진실을 드러낼 수 있었던 실마리에 초점을 두면서 기존 범죄 예능들과 차별화를 꾀합니다. CCTV 영상을 분석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식으로 말이죠.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 교수는 제작발표회에서 “많은 프로그램이 범죄와 관련된 사항을 재밌게, 극적으로 전달한다. 그런 프로그램은 보지 않는다”며 “그래서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스모킹건’은) 정확한 사실 외에도 과학수사라는 전문 분야를 객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출연을 결심한 이유를 설명했죠.
(사진제공=넷플릭스) |
OTT 만나면서 표현 방식 달라져…사회적 공분 부른 ‘나는 신이다’
실제 사건, 사고를 소재로 삼는 콘텐츠가 늘어나는 과정에서는 각종 변주도 발생했습니다. 특히 방영 플랫폼이 전 세계에 서비스되는 OTT로 확대되면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생겼죠. 방송과 달리 심의와 규제가 사실상 없어, 표현이 보다 ‘자유로워졌다’는 겁니다.
TV 방영 콘텐츠는 방송법의 규제를 받으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심사를 받습니다. 흡연이나 흉기 묘사 등에도 세세한 제한 등급을 두며, 방심위 심의는 재허가, 재승인에 영향을 주기에 사업자들에게도 강력한 규제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반면 OTT는 정보통신망법에 따라 영상물등급위원회의 등급 심의를 받는데요. 지난해 국회에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 OTT 사업자가 ‘자체적으로’ 콘텐츠 등급을 분류하는 자체등급분류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3월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 신이 배신한 사람들’(이하 ‘나는 신이다’) 역시 이 맥락에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수 있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초반 3회에 걸쳐 다뤄진 기독교복음선교회(통칭 JMS) 총재 정명석 편을 두고는 일찍이 법정 공방까지 이뤄졌죠. 방송분에서 성범죄 행각이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직접 담긴 탓에 JMS 측이 법원에 방송금지 가처분을 신청한 겁니다.
당시 재판부는 “채권자들(JMS·정명석)은 이 프로그램 가운데 채권자들에 대한 내용이 모두 허위 사실이라는 취지로 주장하지만, 채무자(MBC, 넷플릭스)는 상당한 분량의 객관적 및 주관적 자료들을 수집한 다음 이를 근거로 프로그램을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채권자들이 제출한 자료들만으로는 이 프로그램 중 채권자들에 관한 주요 내용이 진실이 아니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고, 결국 예정대로 ‘나는 신이다’가 공개됐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정명석이 추행을 저지른 상황이 담긴 녹취록이 가감 없이 공개되면서 충격을 안겼습니다. 피해 여성들의 나체가 담긴 영상은 얼굴만 지운 채 그대로 공개됐고, 이 장면이 여러 차례 반복돼 노출되는 등 피해 상황까지 구체적으로 재연됐죠. 엽기적이고 잔혹한 행각이 고스란히 그려지면서 이원석 검찰총장이 정명석의 공판 진행 상황과 관련해 “범행에 상응하는 엄정한 형벌이 선고될 수 있도록 공소 유지에 최선을 다하라”라고 지시하거나, 사이비 단체와 관련된 업체에 불매 움직임이 이는 등 다큐멘터리가 여론 형성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는 평이 나왔습니다.
(출처=넷플릭스 ‘나는 신이다 : 신이 배신한 사람들’) |
구체적 범죄 재연, 아무런 문제 없나…모방범죄·2차 피해 우려 나와
다만, 일각에서는 OTT 콘텐츠를 대상으로 한 가이드라인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범행 방법이나 과정이 지나치게 자세히, 자극적으로 재연된다면 모방범죄나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 우려까지 자아낼 수 있는데 이를 규제할 방안이 미미하다는 겁니다.
‘나는 신이다’ 역시 이와 관련한 설전이 벌어진 바 있습니다. 구체적인 범죄 재연에 시청자들의 반응은 주로 ‘범죄 행각과 피해자들을 조명한 방식이 경솔했다’는 것과 ‘큰 충격을 주면서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주장으로 나뉘었죠. 조성현 PD도 연출에 고민이 많았지만, “있는 그대로 명백하게 보여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엔 실제 벌어진 추악함의 10분의 1 정도만 담은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죠.
반면 손희정 경희대학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는 4월 한국여성민우회 주최로 열린 라운드 테이블 ‘ 는 다르지 않았다 : 재현의 윤리와 저널리즘을 고민하다’에서 “이렇게 선정적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콘텐츠는 (성범죄가 지속된) 구조를 빼고 분노만 남겨놓은 상태가 됐다”며 “구조라는 맥락을 보지 못하게 하면서 분노하게만 하는 것, 그리고 그 분노엔 사실 굉장한 관음증과 욕망, 쾌락이 섞여 있는 상태”라고 지적했습니다.
손 교수는 ‘그동안 한국 방송은 (심의, 규제로) 보수적이라서 이런 콘텐츠를 못 만들었는데 이제 OTT 플랫폼에선 그런 제약 없이 실력을 펼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고심해봐야 한다고 짚었는데요. 그는 “그렇게 발휘된 ‘실력’이 폭력과 선정성의 재현이라면, 과연 그 ‘실력’이라는 게 무엇인가”라고 꼬집었습니다.
또 간과할 수 없는 사실도 있습니다. 제작자의 기획 의도와 시청자의 수용 방식은 항상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인데요. 제작진은 사회 고발을 목표로 설정했을지 몰라도, 다른 방식으로 콘텐츠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분명 있다는 겁니다.
범죄를 소재로 하는 예능이 범죄를 부른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는 신이다’를 연출한 제작진의 노력도 무시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합니다. 사건과 피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사회적 파문을 부르고, 오래전 발생한 사건을 조명하며 또 다른 피해자를 방지하려 했다는 평이 나오죠. 다만 피의자의 입에서 범죄물에 대한 언급이 나오면서, 콘텐츠의 취지와 역할, 연출 방식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경찰에 따르면 정유정은 평소 범죄 수사 프로그램을 자주 시청하는 등 인터넷과 방송 매체를 통해 살인 사건을 접해왔고, 살인을 실제 해보고 싶은 마음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범죄 사실을 흥미 위주로 다루는 오류를 범한다면, 범죄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충동까지 자아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데요. 이 사실은 단순 ‘우려’에 그칠 게 아니라, 관련 콘텐츠를 만드는 제작자, 서비스하는 업체, 그리고 이를 수용하는 대중 등 사회 전반의 고민으로 이어져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투데이/장유진 기자 ( yxxj@e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