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가 아닌 샤인머스캣을 먹는다
문정훈의 맛있는 혁신
겨울 과일의 대명사인 제주 감귤이 한창이다. 어렸을 적 내가 즐겨 먹던 제주 감귤은 좀 더 크고 껍질이 두껍고 과육과 껍질이 분리되어 있던 품종의 귤이었다. 요즘은 껍질이 얇고 반질반질하고 과육에 껍질이 딱 달라붙어 있는 작고 새콤한 감귤 품종이 선호된다. 이상 기후로 더 추운 겨울이 되고 있는 마당에, 만약 감귤 먹는 즐거움이 없다면 대한민국 국민의 다수는 이 혹독한 한반도의 겨울 속에서 비탄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 과일 품목별 생산액 통계를 보면 2016년 기준 총 4조7518억원 중 사과가 26%로 1위, 감귤이 21%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국민 1인당 과일 소비량을 보면 2014년 기준 감귤이 1인당 14.3kg으로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사과는 1인당 9.4kg로 2위다. 한국인의 감귤에 대한 깊은 애정은 이런 통계 수치에도 고스란히 잘 반영되어 있다. 겨울 과일은 역시 감귤이다.
현재 제주에서는 감귤 농가와 일본 사이에서 현재 감귤을 놓고 법률 공방이 진행 중이다. 제주의 묘목상이 수년 전 일본에서 들여와 감귤 농가에 보급한 신품종 감귤인 ‘아스미(국내명: 홍미향)’ 품종과 ‘미하야’ 품종에 대한 출하를 금지해달라는 일본 측의 요청이다. 묘목상이 일본에서 해당 품종을 한국으로 도입할 때 제대로 된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 측 품종 개발자의 주장이다. 아스미와 미하야를 재배한 감귤 농가 입장에서는 매우 당혹스러운 사건이다. 이 문제로 현재 출하 유보된 감귤이 920여t으로 추산 금액이 무려 50억원에 달한다.
이 법률 공방의 결과는 지켜봐야 알 수 있겠으나, 실은 이 감귤 품종관련 법률 공방 뒤편에 있는, 더 주목해야 할,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현실은 이렇다. 현재 제주에서 생산되는 감귤의 최소 90% 이상이 일본 품종이며, 우리가 즐겨 먹는 고급 품종의 감귤인 한라봉, 천혜향, 레드향 등도 모두 일본에서 넘어온 품종이다. 외국에 종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한다.
이런 종자의 문제는 비단 감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장 흔히 먹고 있는 사과 품종인 ‘부사’도 실은 ‘후지(ふじ)’라고 불리는 일본 품종으로 일본 과수시험장에서 1962년에 개발한 종자다. 대한민국 국민의 1등 간식 프라이드치킨 역시 그 가격에 우리가 한 마리 먹을 때마다 글로벌 종자 기업에 지불해야하는 로열티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먹고 있는 닭 중에서 토종닭을 제외한 모든 닭은 전부 해외에서 들여온 종자이기 때문이다.
실은 우리나라에도 특유의 종자가 꽤 많이 있었다. 예컨대 한국을 대표하는 화끈한 맛, 청양 고추는 우리가 개발한 우리 종자였다. 그러나 IMF 시기라고 불리는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시절 청양고추의 품종을 보유하고 있던 ‘중앙종묘’가 파산하며 외국 종자기업에 인수되었고, 이 종자의 국적도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지금 청양 고추는 독일 ‘바이엘’사의 소유이다. 우리가 청양고추를 된장에 푹 찍어 먹으면, 그 종자 로열티에 해당하는 금액이 바이엘사로 지급된다. 외환위기 시절 우리는 대부분의 종자를 잃어 버렸다. 뼈아픈 일이다. 우리는 현재 종자 비용으로 매년 8000억 원에 달하는 로열티를 해외로 지급하고 있다.
우리가 외환위기를 극복한 후 남겨진 상처를 보니 잃어버린 종자의 흔적이 너무나 깊다. 그리하여 농림축산식품부와 농촌진흥청은 2009년부터 기획하여 2012년 황금 씨앗 프로젝트(Golden Seed Project)를 출범시키고 우리의 종자를 다시 발굴하고 개발하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고추, 배추, 무, 양파, 버섯, 감귤, 벼, 감자, 돼지, 닭 등을 포함한 20여개 품목에서 우리 종자를 확보하고 있는 중이다. 2013년부터 시작된 황금 씨앗 프로젝트는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새로운 종자 하나를 개발하는데 시간이 얼마 걸릴까? 예컨대 닭의 경우 평균 수명은 8~12년이며, 병아리가 달걀에서 부화하여 알을 낳는 시점까지 보통 5~6개월 정도가 걸린다. 일단 새로운 닭 품종을 확보하기 위해 후보를 선발하는 데에만 최소 수년이 걸린다. 그리고 그 후보들로부터 상품성이 있는 유전 특성을 찾기 위해 교배 실험을 거듭 해야 하는데, 닭의 경우 두 세대를 교배 실험하면 1년이 지나가 버린다. 생물이라 긴 시간이 필요하다. 공장에서 시제품을 찍어 내는 것처럼 할 수 없다. 닭의 경우 농가에 보급할 수 있을 만한 신품종을 최종 고정시키려면 20년은 걸린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황금 씨앗 프로젝트를 시작한지 고작 4년 만에 성과가 부족하다며 연구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우리나라는 다시 종자를 가질 수 있을까?
2018년 대한민국의 여름을 강타한 포도 ‘샤인머스캣(Shine Muscat)’은 일본 과수시험장에서 1988년에 개발한 품종이다. 그런데 일본 측에서 샤인머스캣의 인기를 예상하지 못하고 2006년까지 품종 등록을 주저하는 동안, 한국 측에서는 이를 국내 도입하여 한국형으로 개량해 심어버렸다. 이런 웃지못할 이유로 우리는 한 송이에 만원이 넘는 샤인머스캣을 로열티 없이 먹고 있다. 수년 전부터 국내 포도 소비는 꾸준히 줄이고 있었는데, 포도 중에서는 샤인머스캣만 홀로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 로열티가 나가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소비자들이 변했다. 이제 소비자들은 포도를 먹는 것이 아니라 샤인머스캣 포도를 먹고, 돼지 삼겹살을 먹는 것이 아니라 듀록 돼지 삼겹살을 먹으며, 딸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장희 딸기를 먹는다. 품목을 소비하는 시대에서 품종, 즉 종자를 소비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종자를 개발, 보급하는 생명 산업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기존 국가 연구개발(R&D)의 기준으로 생명 산업에 접근하고 평가하면 우리는 여전히 종자 빈국으로 남게 된다.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푸드비즈니스랩 소장
최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