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덕, 끝까지 병원 지킨 ‘응급의료 버팀목’… 이국종 “영웅을 잃었다”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 별세
국내 응급의료 분야를 6년간 진두지휘하며 응급환자 전용 헬기(닥터헬기) 도입 등을 주도한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51)이 설 전날인 4일 병원 집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설 명절 ‘응급의료 공백’을 막기 위해 퇴근을 미루고 초과근로를 하다가 과로사한 것으로 국립중앙의료원은 보고 있다. 지난해 12월 말 진료시간 이후에 찾아온 정신질환자를 돌보려다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숨진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에 이어 환자에게 헌신한 또 한 명의 의료인이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응급환자 몰리는 명절 지키려다…
국립중앙의료원에 따르면 윤 센터장은 4일 오후 6시경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행정동 2층 중앙응급의료센터장실에서 발견됐다. 검안의는 ‘급성 심정지’(심장마비)라는 1차 검안 소견을 내놓았다. 발견 당시 윤 센터장은 책상 앞에 앉은 자세로 있었다. 전문가들은 발견 당시 정황으로 미뤄 어지럽거나 가슴이 답답한 급성 심근경색의 전조 증상도 없이 빠르게 의식을 잃었다고 보고 있다. 정확한 사인(死因)은 유족의 뜻에 따라 7일 부검으로 밝힐 예정이지만, 의료원 측은 누적된 과로로 인한 사망으로 판단하고 있다.
윤 센터장은 연휴를 하루 앞둔 1일 공식 일과를 마친 후에도 퇴근하지 않고 센터장실에 남았다고 병원 관계자들은 전했다. 중앙응급의료센터는 국내 응급의료 인력과 시설을 총괄하는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으로, 특히 명절에 업무가 늘어난다. 대형 교통사고로 환자가 한곳에 몰려 의료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전국 응급실 532곳과 권역외상센터 13곳의 병상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립중앙의료원 관계자는 “이날도 윤 센터장이 전국 각지에서 생기는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재난응급의료상황실을 점검하려고 퇴근을 미룬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병원 직원들이 윤 센터장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1일 오후 8시경 동료 의사와 저녁을 함께 먹고 각자 업무 위치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윤 센터장이 가족과 함께 설에 귀성하기로 해놓고 주말 내내 연락이 닿지 않자 그의 아내는 4일 직접 병원 집무실을 찾았다가 직원들과 함께 숨진 그를 발견했다. 윤 센터장은 슬하에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자녀가 1명씩 있다.
환자 생각에 자기 몸 돌보지 않아
국립중앙의료원과 지인들에 따르면 윤 센터장은 평소에도 주중엔 거의 귀가하지 않고 센터장실에 놓인 간이침대에서 잠을 해결하며 일에 몰두했다. 한 동료는 “침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노숙인이 머물 법한 허름한 침상이었다”고 전했다. 발견되기 전날 밤에도 센터장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지만 경비원들은 ‘평소처럼 야근을 하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고 한다. 윤 센터장과 20년 넘게 인연을 맺어온 유인술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평소에 윤 센터장이 위장약 말고는 먹는 약도 없을 만큼 건강했기 때문에 처음엔 사망 소식을 믿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윤 센터장의 사망은 심장정지 환자를 살릴 ‘생존 사슬’이 의료계 내에서조차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생존 사슬은 △119에 신고 △주변 사람의 심폐소생술 △구급대원의 심장 충격 △병원 의료진의 전문시술 △재활 치료 등이 사슬처럼 맞물려야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개념이다.
윤 센터장은 이를 위해 자동 심장충격기(제세동기)에 ‘심쿵이’라는 별명을 붙여 일반 시민이 친근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론을 펴왔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건강은 제대로 돌보지 않고 일에 몰두하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임세원 교수가 몇 해 전 우울증을 앓았던 것과 겹치는 대목이다.
이국종 교수 “어깻죽지 떨어져나간 기분”
윤 센터장은 전남대 의대를 졸업했다. 모교에 응급의학과가 생긴 1994년 ‘1호 전공의’로 자원해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됐다. 하지만 응급환자가 간신히 구급차에 타도 엉뚱한 병원을 전전하거나 응급실에서 여러 진료과목의 협진을 받지 못하고 숨지는 현실을 본 뒤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는 2002년 중앙응급의료센터 창립과 함께 국립중앙의료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2012년 7월엔 센터장이 됐다. 그 이후 닥터헬기와 권역외상센터 도입 등 국내 응급의료계에 일어난 주요한 변화가 전부 윤 센터장의 작품이다.
그는 종종 자신의 페이스북에 응급의료 체계에 대한 고민을 길게 올렸다. 지난달 25일엔 119구급대원 등 응급구조사가 심전도를 재거나 탯줄을 자르면 실형을 살 수 있는 불합리한 규정(본보 2018년 11월 19일자 A1면 참조)을 개정해야 한다고 성토했다. 지난해 10월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출석해 닥터헬기 착륙장이 부족하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환자를 살리는 데 중대한 걸림돌이었지만 누구 하나 발 벗고 해결에 나서지 않던 문제들이었다.
이국종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장은 윤 센터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통해하면서 “응급의료계에 말도 안 될 정도로 기여해온 영웅이자 버팀목”이라며 “어깻죽지가 떨어져나간 것 같다”고 본보와의 통화에서 말했다. 이 교수는 자신의 저서 ‘골든아워’에 ‘윤한덕’이라는 제목의 챕터 하나를 할애해 “출세에 무심한 채 응급의료만을 전담하며 정부의 도움이 없는 상태에서도 센터를 이끌어왔다”고 평했다.
조문은 국립중앙의료원(02-2262-4822)에서 7일 오전 11시부터 가능하다. 영결식은 10일 오전 9시 국립중앙의료원장(葬)으로 치른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골든아워’ 2권 353쪽
윤한덕
임상의사로서 응급의료를 실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일이 응급의료 전반에 대한 정책의 최후 보루라는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다. 외상의료체계에 대해서도 설립 초기부터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다. 내가 본 윤한덕은 수많은 장애 요소에서 평정심을 잘 유지하여 나아갔고, 관계(官界)에서의 출세에는 무심한 채 응급의료 업무만을 보고 걸어왔다. 그가 보건복지부 내에서 응급의료만을 전담해 일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정부 내에서는 도움의 손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윤한덕은 중앙응급의료센터를 묵묵히 이끌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