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에도 4박5일 산행 거뜬… 산 오르며 겸손 배운다”
이재후 엄홍길휴먼재단 이사장이 집근처인 서울 정릉 북한산을 오르다 돌탑에 돌을 쌓고 있다. 여든이 넘은 그는 50년 넘게 산을 오르며 건강을 다지고 있다. 그는 “산에서 많이 배우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
“대전지방법원 판사시절이던 1969년 어느 날 당시 법원장이었던 고 이일규 전 대법원장께서 지리산에 가자고 했어요. 뭐 가끔 뒷산 정도 오르는 수준이라 힘들 것 같았지만 상사가 가자고 하니 따라 나섰죠. 천왕봉까지 올랐습니다. 힘들 줄 알았는데 그다지 힘들지 않았어요. 해냈다는 성취감도 느꼈죠. 그 때 산의 매력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이재후 엄홍길휴먼재단 이사장(뒷줄 맨 오른쪽)이 대전지방법원 판사시절인 1969년 당시 법원장이었던 고 이일규 전 대법원장과 지리산에 올랐을 때 모습. 이재후 이사장 제공. |
그 이후 산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이재후 엄홍길휴먼재단 이사장(81)은 “산에서 많이 배웠고 행복했다”고 말한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등산으로 건강하고 즐거운 노년을 만들어가고 있다.
첫 지리산 산행 때의 에피소드가 재밌다.
“당시 경남 진주로 해서 지리산에 올랐어요. 그 때 허우천이란 분이 안내를 했죠. 그는 가족을 버리고 지리산 중턱에 막을 치고 혼자 살고 있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람들이 허우천 씨를 산신령이라고 부르더군요. 1960년대에 수백 번 지리산을 오르내리며 등산로를 정비하고 안내판을 설치해서 사람들이 그리 부른다더군요. 몇 년 뒤 가보니 그 분이 사라졌는데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대요.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진짜 산신령이 됐다는 얘기가 떠돌았죠.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는데 산을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면서 놀랐지요.”
이재후 엄홍길휴먼재단 이사장이 집근처인 서울 정릉 북한산을 오르고 있다. 여든이 넘은 그는 50년 넘게 산을 오르며 건강하고 즐거운 노년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
이 이사장이 바로 등산 마니아가 된 것은 아니다. 1970년 서울로 올라온 이 이사장은 가끔 산행을 하긴 했지만 마니아 수준은 아니었다. 주로 테니스를 치며 건강을 다졌다. 그는 “당시 법조계에선 테니스가 유행이었다. 재미도 있고 건강관리에도 좋았다”고 회상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산을 타게 된 것은 서울고 동문 산악회에 가입한 1970년대 후반부터. 판사 생활을 접고 김앤장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를 맡으면서 서울고 산악회, 서울법대 동기들과 전국의 명산들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네팔 히말라야 등 해외 트레킹도 다녀왔다.
“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줍니다. 산에 가면 좋은 공기를 마실 수 있죠. 또 경관이 얼마나 좋습니다. 나무, 꽃, 바위, 개울, 그리고 정상에서 보는 황홀함…. 산을 타면 건강에도 좋죠. 힘들게 정상에 오른 뒤 느끼는 성취감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함께 하는 친구들과 이런저런 사는 얘기하고, 막걸리도 한잔하고…. 이렇게 좋은 운동이 어디 있나요. 대한민국은 산이 70%라 맘만 먹으면 언제든 오를 수 있습니다.”
이 변호사는 20세 무렵부터 60년 넘게 북한산 자락인 서울 정릉에 살고 있어 산과는 친하게 지냈다. 본격 등산은 아니지만 틈나는 대로 산책을 했고 나중에 등산 마니아가 된 것이다. 지금은 법조계의 ‘등산 고수’로 통한다. 서울대 법대를 수석 입학한 그는 해병대 법무관으로 군 생활을 했고 1965년 대전지법에서 판사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지법 판사, 서울고법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도 지냈다. 판사 생활 중에 미국소송법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 조지타운 법대에서 1년 공부하기도 했다.
이재후 엄홍길휴먼재단 이사장(오른쪽)이 엄홍길 대장과 네팔에 갔을 때 모습. 이재후 이사장 제공. |
2008년 히말라야 16좌를 오른 엄홍길 대장(61)을 만나면서 새로운 길도 함께 개척하고 있다. 엄 대장이 “이제 산에서 내려와 인생의 16좌를 오르겠다”며 휴먼재단을 만들겠다고 이 이사장을 찾은 것이다. 엄 대장은 평소 산을 좋아하고 히말라야도 여러 차례 다녀온 그에게 이사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엄 대장은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과 사랑을 나눠주자는 취지로 휴먼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의 중점 사업이 네팔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지어주는 사업이다. 이사장도 취지가 너무 좋아 흔쾌히 동의했다. 그는 “엄 대장이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난 옆에서 보좌하는 역할”이라고 했다. 엄 대장은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땐 늘 이사장님이 잘 판단해주신다”고 했다.
지난해와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 탓에 못 갔지만 이 이사장도 매년 네팔에서 열리는 학교 착공식과 준공식에 참여했다. 히말라야 4000m 고지까지 4박5일 올라야 하는 힘겨운 일정이지만 이 이사장은 매번 엄 대장과 함께 했다. 엄 대장은 “한국 나이 80세인 2019년에도 히말라야를 거뜬히 오르셨다”고 했다. 당시 네팔 랑탕에서 엄 대장 등 대원들이 이 이사장에게 ‘팔순 생일잔치’를 벌여주기도 했다. 이 이사장은 “네팔 4000m 고지에 학교를 세워줬을 때 아이들이 너무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 엄 대장이 참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이 이사장과 엄 대장은 14년 째 찰떡궁합을 과시하며 재단을 이끌고 있다. 당초 재단은 16개의 학교를 지을 계획이었지만 벌써 19번째 학교 후원까지 약속 받아 놓은 상태다.
이재후 엄홍길휴먼재단 이사장(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이 2019년 네팔 랑탕에서 엄홍길 대장 등 대원들이 마련한 ‘팔순 생일잔치’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이재후 이사장 제공. |
이 이사장은 지금도 매달 진행하는 휴먼재단 정기산행 때 북한산 백운대까지 다녀오는 4~5시간 일정의 산행도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다. 이런 강철 체력의 원동력이 걷기다. 그는 특별한 일 아니면 걸어서 다닌다. 아직도 매일 법률사무소로 출근하는 그는 헬스클럽까지 왕복 2km도 걸어 다닌다. 헬스클럽에서도 걷고 웨이트트레이닝으로 근육도 키우고 있다. 정기 산행은 재단 혹은 지인들과 한 달에 1,2 차례 한다. 집 근처 북한산을 가장 많이 가고, 수락산 청계산 천마산 등 수도권 산을 자주 오른다. “세계적으로 대도시 주변에 이렇게 아름다운 산이 많은 나라가 없다. 북한산은 수천 번 올랐다. 북한산은 오를 수 있는 루트가 수없이 많아 언제 가도 새로움을 느낀다. 정말 명산이다”고 말했다.
이재후 엄홍길휴먼재단 이사장이 집근처인 서울 정릉 북한산을 오르며 활짝 웃고 있다. 그는 60년 넘게 정릉에 살며 틈만 나면 북한산을 오르고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
이 이사장은 산에서 정직을 배웠다. 그는 “산은 보이는 곳에 항상 있다. 아무리 꾀를 써도 자신의 힘으로만 올라야 한다. 산은 정직하다. 법조인 최고의 덕목도 정직이다. 있는 그대로 보고 따라야 한다. 산은 정복하는 게 아니라 순응하는 것이다. 산에 오르면서 겸손을 배운다”고 말했다.
“요즘 일부에서 법을 자기들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 못된 겁니다. 법 취지가 제대로 반영돼야 합니다. 법을 자의적으로 운영하면 절대 안 됩니다. 법치주의가 잘 돼야 국가와 국민이 편안합니다.”
이 이사장은 대한민국 산의 색다른 아름다움을 얘기했다.
“한국의 산은 계절 따라 다른 아름다움을 줍니다. 따뜻한 나라의 산은 늘 녹색이지만 우리 산은 그렇지 않아요. 봄에 녹색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해 여름까지 웅장한 녹색의 맛을 보여줍니다. 가을엔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지요. 금수강산이란 말이 딱 어울립니다. 겨울엔 또 다른 맛을 느끼죠. 봄 여름 가을엔 정상을 오르기 전엔 바로 앞의 아름다움만 볼 수 있지만 낙엽이 진 뒤에는 나뭇가지 사이로 속이 다 보입니다. 멀리 봉우리까지 볼 수 있습니다. 산세가 투명하고 정직하게 다 보입니다. 그리고 눈으로 덮인 산이 주는 아름다움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이 이사장은 겨울산은 제주도 한라산을 최고로 꼽는다.
“겨울에 한라산을 올라가면서 보는 눈꽃은 눈이 부십니다. 또 다른 산과 달리 봉긋 솟아 있어 어느 순간부터는 완전히 눈에 덮인 산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신선이 된 기분이요. 지리산 설악산도 좋은 산이지만 너무 방대해 겨울에 이런 맛은 한라산에서만 느낄 수 있어요.”
이재후 엄홍길휴먼재단 이사장이 집근처인 서울 정릉 북한산을 오르며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 여든이 넘은 그는 50년 넘게 산을 오르며 건강하고 즐거운 노년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
이 이사장은 100세 시대 노인들의 건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은 죽음 이상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나이 들어 아프고 걷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요. 전 다행이 아직 걸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관리한다기보다는 걸어 다니고 산에도 가니 건강이 유지됩니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산에 갈 것입니다.”
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