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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삼천평 감귤농장을 이끼 정원으로 바꾼 아들

제주의 현무암 돌무더기 사이로 잎이 작은 백리향과 담쟁이 넝쿨의 등수국이 반짝였다. 빗물과 햇빛을 받은 식물들의 초록이 유독 명료했다. 땅 위에서 기껏해야 세 뺨 높이로 심어진 산뚝사초는 지형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바닷가에서 주운 나뭇가지로 만들었다는 삐뚤빼뚤한 서체의 ‘베케’ 두 글자가 현무암을 품은 검은색 콘크리트 건물에 붙어 있었다. 5년 전 제주 서귀포시 효돈로에 문을 연 이래 젊은 세대의 초록 성지가 된 베케 정원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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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제주 서귀포시 효돈로 ‘베케’에서 이끼 정원을 바라보는 방문객들. 서귀포=김선미 기자

이 정원을 만든 이는 조경회사 ‘더 가든’의 김봉찬 대표(58)다. 그는 꽃과 인공 장식물 위주였던 기존의 정원 조성 공식을 깨고 풀과 양치식물, 돌과 이끼가 경관의 주인공이 되는 ‘한국식 자연주의 정원’을 선보여왔다. 경기 포천시 평강식물원, 경기 광주시 화담숲 암석원, 제주 서귀포시 핀크스 비오토피아 생태공원, 충남 태안군 천리포수목원 어린이정원, 서울 성수동 아모레성수와 남산 피크닉의 정원이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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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옛 감귤농장에 정원을 만든 김봉찬 더 가든 대표. 억새, 수크렁, 용설란, 에키나시아를 어우러지게 심었다. 서귀포=김선미 기자

그렇기에 정원과 조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김봉찬’이라는 이름 석 자는 묵직한 무게감을 전한다. 정작 그는 “정원은 인간이 만들긴 하지만 자연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배우는 공간”이라고 말하지만. “나보다 잘난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주눅이 들잖아요. 크고 아름다운 것들이 뽐내는 공간이 아니라 작고 조용한 것들이 편안함을 주는 ‘치밀하지만 엉성한’ 정원을 만들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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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돌담 틈에 피어난 식물들. 김봉찬 더 가든 대표는 돌무더기를 뜻하는 제주 방언인 ‘베케’를 자신이 가꾼 정원 이름으로 지었다. 서귀포=김선미 기자

베케 정원에 딸린 카페에 들어서면 커다란 통창을 통해 돌무더기와 이끼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밭을 일구다가 나온 돌을 쌓은 돌무더기를 뜻하는 제주 방언이 베케다. 곳곳에 베케가 있는 3000평 규모의 이 정원은 김 대표의 인생이 오롯이 깃든 감귤농장이었다. 제주에서 귤이 맛있는 동네로 통하는 서귀포 효돈동의 이 농장에서 그는 꼬마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감귤나무를 심고 농사일을 돕고 뛰어놀았다.


“1970년대가 되어서야 동네에 아스팔트가 깔렸어요. 아스팔트 도로가 신기해 아버지가 사준 고무신을 품에 안고 맨발로 달렸던 기억이 나요. 그 후 동네는 감귤 농사가 번창해 남부럽지 않게 잘 사는 동네가 됐어요. 1980년대에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다들 감귤로 아이들 대학을 보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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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콘크리트 건물인 베케 카페의 벽면에는 최정화 설치미술가가 바닷가 나뭇가지로 만들어준 베케 간판이 붙어 있다. 서귀포=김선미 기자

풍족한 유년을 주었던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하늘나라로 너무 일찍 떠났다. 하지만 아버지와 자연에서 함께 한 추억은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 제주의 산과 들에서 식물을 채집해 표본을 만들며 놀았던 그는 제주대에서 식물생태학을 전공한 후 여미지식물원 식물과장과 평강식물원 소장을 지냈다. 알록달록한 놀이공원 스타일의 정원이 아닌 암석과 습지를 활용한 신비로운 느낌의 ‘김봉찬 스타일’ 정원은 그렇게 시간의 베케처럼 쌓아 올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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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케 정원의 방문객들은 카페의 통창으로 이끼 정원을 감상할 수 있다. 사진: 아티샤. 베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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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창포, 솔이끼, 금새우란 등이 어우러진 이끼 정원의 모습. 큰 통창을 통해 바라볼 수 있다. 서귀포=김선미 기자

이끼 정원을 바라보며 그와 나란히 앉은 자리로 ‘메리그라스’라는 이름의 차(茶)가 나왔다. 정원의 중심에 있는 그라스(풀)를 생각하며 제주조릿대, 레몬그라스, 메리골드 등을 블렌딩한 차라고 했다. “제가 아침마다 여기에 앉아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석을 봐요.” 아, 이슬이군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끼처럼 작은 식물일수록 보석을 많이 품어요.”


그는 방문객들이 “자연을 겸허한 자세로 볼 수 있도록” 카페 건물의 실내 바닥을 지하로 팠다. 그래서 작은 풀과 이끼를 저절로 눈높이에서 바라보게 된다. 석창포, 솔이끼, 금새우란이 어우러진 서로 다른 초록의 선 위로 눈여뀌바늘이 몽글몽글한 점을 그려냈다. “낮은 자세로 자연을 보면 식물과 곤충의 작은 움직임도 살피게 돼요. 적절한 어둠이 깃든 이끼 정원은 우리 내면도 들여다보게 합니다. 팍팍한 삶에 휩쓸리는 우리는 깊은 사색을 필요로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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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케 정원에 딸린 카페 건물의 뒷쪽 풍경. 화려한 꽃 대신 이끼와 풀들로 야생의 자연을 표현했다. 서귀포=김선미 기자

식물생태학을 공부한 그는 1990년대 들어 정원식물에 관심을 두면서 아버지가 남기고 떠난 감귤농장에 하나둘씩 씨앗을 뿌렸다. 열매가 안 달리는 정원수의 씨앗이었다. 30여 년 전 땅에 심은 씨앗들은 이제 거대한 수목들이 되었다. 정원수를 심으려고 감귤나무를 조금씩 베어내다가 결국엔 과수원 하나가 통째로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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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들의 점, 선, 면이 어우러지는 한국의 대표 자연주의 정원, 베케. 서귀포=김선미 기자

“어머니가 반대하니까 스며드는 듯 씨앗을 심었죠(웃음). 대개의 사람들은 정원을 빨리 가꾸고 싶은 욕망에 처음부터 큰 나무를 심으려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나무는 어린 강아지를 키우듯 씨앗부터 시작해 세월을 함께 경험하는 게 좋아요. 정원을 갖는 건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서 힐링하고 자연을 배우기 위해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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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찬 대표가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만든 베케정원의 폐허정원. 서귀포=김선미 기자

그래도 아들은 아버지와의 추억을 베케 정원에 남겨 두었다. 폐허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당초 무허가 건물이라 철거해야 했던 감귤 보관창고의 터를 남기고 그곳에 정원을 만든 것이다. “폐허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더라고요.” 그는 부서진 창고의 흔적 위로 야생의 자연을 구현했다. 억새와 수크렁 같은 대형 그라스 앞에는 존재감이 확실한 용설란을 심었다. 범부채와 매발톱꽃속 등을 섞고 제주의 들판에서 볼 수 있는 예덕나무도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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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이 빚어내는 베케 정원의 풍경은 자연을 마주하는 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사진제공 아티샤. 베케

베케 정원은 입구 정원, 이끼 정원, 빗물 정원, 고사리 정원(퍼너리·fernery), 낙우송 정원, 폐허 정원, 겨울 정원, 나뭇길, 실험정원 등 다양한 감각의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지금은 초록빛인 말채나무는 겨울이 찾아오면 노랑 주황 빨강의 따뜻한 색감으로 변신한다고 했다. “겨울 정원의 나무들은 잎이 다 떨어졌을 때 드러나는 줄기와 가지가 예술이에요. 시든 것들의 아름다움이라고 할까요. 그라스는 볏짚 색으로 바뀌고, ‘미드 윈터 파이어’라는 이름의 말채나무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화려한 붉은 빛을 보여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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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그린을 양 옆에 심어 만든 나뭇길은 MZ세대 방문객의 사진촬영 장소로 인기다. 김 대표 본인은 정작 이 길에 서서 처음 사진을 찍어 본다며 멋쩍게 웃었다. 서귀포=김선미 기자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귤밭이던 베케는 지금은 천연보호구역 분위기의 정원으로 바뀌었다. 그 변화를 도운 주역 중의 하나가 고사리다. 김 대표는 한국의 자생식물인 청나래고사리 옆에 천남성을 심어 고사리의 촉촉한 생명력과 투박한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했다. 주변 나무들은 선을 중첩시켜 있어도 없는 듯한 깊은 공간감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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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넓은 천남성이 청나래 고사리의 생명력을 빛내준다. 서귀포=김선미 기자

그는 함께 정원을 걷는 동안 “숲이야말로 가장 민주적인 공간”이라는 말을 했다. “안정된 음수림이 형성되면 특정 종이 숲의 빛을 독식할 수 없어요. 숲의 나무들은 태풍이나 병충해 같은 외부의 힘에 공동으로 대응하죠. 생태 정원은 식물들이 이루는 궁극의 야생 서식처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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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을 보면서 위로를 받는 베케 정원. 서귀포=김선미 기자

베케 정원을 한참동안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제법 큰 여름꽃인 에키나시아 위로 ‘도둑놈의갈고리’라는 이름의 가녀린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순간을 보았다. 보라색 붓들리아는 벌과 나비를 한껏 끌어모으고 있었다. 풍지초는 가는 점들이 땅과 풀과의 관계를 몽환적으로 그려냈다. 세상에는 보잘것없는 풀이 하나도 없다는 김 대표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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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손톱만한 크기의 가녀린 ‘도둑놈의갈고리’가 에키나시아 위에 어우러지는 모습. 서귀포=김선미 기자

“상대방을 심오하게 만들어주는 풀이 아름답습니다. 이곳에 무지개 색이 즐비하다면 힐링하기 힘드니까요. 내 집에서 매일 잔치를 열면 주인은 피곤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죠.” 그러고보니 남을 빛나게 해주는 ‘위대한 조연’이 잘 나가는 세상이 온 것 같다고 나는 맞장구를 쳤다. 이름 모를 나뭇잎들이 빛과 바람에 반짝이고 흔들렸다. 그래서 그 속의 사람들이 한층 더 또렷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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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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