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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의 시골을 정원 마을로 이끈 화가의 정원

화가와 정원의 조합은 꽤 운명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원에서 영감을 얻은 화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클로드 모네나 귀스타브 카유보트는 예술만큼 식물에 정통한 위대한 정원사였다. 화가들은 서로의 정원을 탐색하며 감각을 열기도 했다. 인상파 화가들의 정원을 선망한 메리 커샛 같은 미국 화가들은 삶의 터전을 프랑스로 옮겨 정원을 가꾸며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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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시 별량면에 있는 ‘화가의 정원산책’ 정원을 공중에서 본 모습. 민명화 정원주 제공

그래서일까. 전남 순천시 별량면 장학마을에 있는 ‘화가의 정원산책’ 정원을 찾아가면서 내내 궁금했다. 화가인 정원주는 어떤 사연으로 주택정원을 가꿨으며,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화가의 정원산책은 순천시 제1호 민간정원으로, 누구든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다.


●화가 아내, 조경가 남편과 아들이 만드는 정원


정원으로 향하던 지난달 중순은 여름처럼 무더웠다. 2번 국도변에는 초가을까지도 분홍색 꽃을 피운 배롱나무 가로수가 끝없이 이어졌다. ‘정원 도시’ 순천을 일깨우는 꽃 행렬이었다.


주물로 만든 흰색 철제 대문 앞에 다다르자 정원 안내판이 보였다. 화가인 정원주가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것이었다. 정원주의 아들인 남태우 씨(32)가 먼저 나와 안으로 안내했다. 서울에서 조경회사에 다니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일한 지 두 달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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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명화 정원주가 직접 그린 ‘화가의 정원산책’ 안내판. 순천=김선미 기자

잔디가 깔린 너른 마당에는 헬레니즘 양식의 조각상과 장독대들이 배치돼 있었다. 산이 정원을 포근하게 둘러 감싸 안은 구릉 지형이었다. 여름을 빛낸 에키네시아가 퇴장하면서 빨간 꽃무릇이 만발했을 때였다. 남쪽으로 운천호수를 시원하게 내려다보는 2층 주택에서 정원주가 걸어 나왔다. 정원주인 화가 민명화 씨(63)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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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앞마당에 마주 앉은 민명화 정원주(오른쪽)와 아들 남태우 씨. 순천=김선미 기자

“1995년에 여기 300평 땅과 오래된 허름한 집을 샀어요. 조금씩 땅을 넓혀가면서 28년 동안 정원을 가꾸다 보니 지금은 3000평이 됐어요. 남편이 프러포즈할 때 그랬어요. ‘당장 모아놓은 돈은 없지만 전지가위 하나로 평생 먹여 살릴 자신은 있다. 그림 같이 예쁜 집을 만들어 주겠다’고요(웃음). 결혼하고 순천 시내에 살 때, 매물로 나온 이곳에 와보고 둘이 반했어요. 똑같은 돈이라도 누군가는 주식 투자를 하겠지만, 그림을 그리는 저와 조경 일을 하는 남편은 시골 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요. 꽃을 가꾼 가정에서 자란 부부의 가치관이 같고, 남편이 제가 하는 일에 ‘노(No)’라고 한 적이 없어 가능했던 일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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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조각상과 조형물이 자리잡은 마당 정원의 모습. 순천=김선미 기자

●아이들이 어렸을 때 씨앗을 뿌린 세월의 정원


부부의 세 자녀는 그래서 ‘별량면 키즈’로 자랐다. 아파트에 살 때 조마조마하게 층간소음을 신경 써야 했던 아이들은 시골집 안뜰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었다. 야생화를 주제로 가족신문을 만들고, 생일파티도 정원에서 했다. 특히 막내아들인 남태우 씨는 아장아장 걸음마 할 때부터 부모를 따라 정원에 씨앗을 뿌렸다. 그때 심은 가시나무 등이 지금은 울창해졌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나는 조경학과에 갈 거야”라던 남 씨는 전북대 조경학과를 나와 서울식물원과 서울의 조경회사에서 일하다가 얼마 전부터 고향으로 돌아와 일한다. 지역 사회에 기여하면서 부모가 오랫동안 가꿔온 정원에 젊은 감각을 접목하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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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주의 세 자녀가 어린 시절 뛰어놀며 자란 ‘화가의 정원산책’ 앞마당. 순천=김선미 기자

정원주와 함께 정원을 둘러보기 시작했을 때, 어느 중년 부부 관람객이 정원을 찾아왔다. 정원 입구의 새집 모양 현금통에 입장료 5000원을 내면 정원을 시간제한 없이 오롯이 즐길 수 있다. 차와 음료도 원하는 대로 마실 수 있다. 민 정원주는 말했다. “천천히 둘러보시고, 그림도 보시고, 차도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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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 심어진 초화류. 정원주가 그리는 꽃 그림과 분위기가 닮았다. 순천=김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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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주가 그린 꽃그림. 민명화 정원주 제공

●8개 테마로 구성한 3000평 정원


3000평 정원에는 110여 종의 수목과 200여 종의 숙근 및 초화류가 산다. 조경학 박사인 남편과 조경 엔지니어 아들은 정원의 보유 수종 목록을 잘 정리해두었다. 이 정원의 특징은 마치 정원박람회처럼 8개의 테마 정원으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입구 정원은 200년 넘은 느티나무와 참나무 등이 그늘을 드리우면서 맥문동, 원추리 등의 음지식물과 어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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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을 드리우는 수목과 초화류가 어우러지는 입구정원 모습. 순천=김선미 기자

숲 정원에는 가시나무, 먼나무, 후박나무 등을 심고 곳곳에 새집과 벤치를 두었다. 숲길을 걷는데 다양한 새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하염없이 앉아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식 다랑논 지형을 보존한 다랭이 정원, 200년 넘은 야생 동백나무들이 이룬 동백숲, 운천호수 경관을 한눈에 내려볼 수 있는 전망대 정원 등을 둘러보니 규모가 방대했다. 개인 정원이 아니라 전문 수목원에 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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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곳곳에 새집과 벤치를 두어 산책을 하다가 앉아 새 소리를 듣게 했다. 순천=김선미 기자

특히 인상적인 테마 정원은 해 뜨는 정원과 갤러리 정원이었다. 산자락 높이 위치한 해 뜨는 정원은 이른 아침 순천만에서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어 평소 마을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는 장소라고 했다. 정원주가 마을 산책로로 열어두는 정원에 풀이 무성해지면 다 같이 정원 일을 돕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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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일출을 볼 수 있는 해 뜨는 정원에서의 전망. 순천=김선미 기자

정원 탐방의 마지막 코스인 갤러리 정원은 화가의 미술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음식과 묘목과 정담을 나누니 마을 커뮤니티 공간의 기능을 한다. 유럽에서 구해 왔다는 오래된 풍금과 스테인드글라스 장식, 앤티크 찻잔 등이 작은 박물관 분위기를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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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구해왔다는 오래된 풍금. 순천=김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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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주는 앤티크 찻잔을 모으고 꽃 문양 자수를 놓는다. 순천=김선미 기자

●“정원일은 마음이 깨끗해지는 명상”


화가는 왜 정원을 가꾸었을까.


“허름한 집을 남편과 함께 리모델링 할 때, 거실에서 정원이 한눈에 보이도록 했어요. 아이 셋을 키우는 과정에서 막 열이 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정원의 꽃을 보면 마음속 화가 사라지더라고요. 사람들은 늘 정원일 하는 제게 ‘고생하시겠네요’라지만 저는 고생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잡초를 뽑으면 제 머릿속과 마음도 깨끗해지거든요. 그게 곧 명상이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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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 앉은 민명화 정원주. 순천=김선미 기자

화가가 그리는 꽃은 매번 바뀐다. 한동안 달맞이꽃을 그리다가 양귀비를 거쳐 요즘엔 에키네시아를 자주 그린다. 정원에 이젤을 놓고 꽃을 보면서 그리는지, 사진을 찍어 보고 그리는지 물었다. “둘 다 아니에요. 30년 가까이 가꿨던 꽃들과 모든 계절의 추억과 소망이 다 제 마음속에 들어 있잖아요. 색채는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기보다는 다소 주관적으로 형상화합니다. 소멸과 생성이 반복되는 자연의 법칙은 모호한 선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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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주가 자신의 정원을 그린 그림. 민명화 정원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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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주가 요즘 자주 그리는 에키네시아 꽃그림. 순천=김선미 기자

●장학마을에 씨앗을 뿌린 정원문화


화가의 정원산책은 아낌없이 칭찬받을 만한 공로가 있다. 순천시 별량면 장학마을에 정원 문화를 전파해 이 마을을 정원 마을 커뮤니티로 만든 것이다. 이 정원 맞은 편에는 민 화가의 후배가 사는 ‘유럽정원’을 비롯해 ‘복순이네 돌사랑정원’과 ‘이가네 뜨락정원’ 등 아름다운 주택정원들이 작은 골목길에 모여있다. 일찌감치 터를 잡은 화가의 정원산책을 보면서 도시 생활을 했던 은퇴자들이 시골 마을에 정원을 가꾼 것이다. 집집마다 낮은 담벼락에 화분들을 내건 정경을 보니 마치 스페인의 정원 도시 코르도바에 와 있는 느낌마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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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집마다 골목길 쪽으로 화분을 내걸은 장학마을 모습. 순천=김선미 기자

“우리 동네는 봄에 꽃향기가 가득해요. 꽃과 묘목을 나누니 정원의 시너지 효과가 생기는 것 같아요. ‘장학마을 위크’라는 명칭으로 마을 탐방 프로그램도 만들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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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에 홈을 파서 밖에서도 정원을 구경할 수 있게 한 장학마을 전경. 순천=김선미 기자

장학마을이 정원 마을이 된 데에는 순천시의 개방정원 제도도 큰 역할을 했다. 2013년 대한민국 최초로 국제정원박람회를 열었던 순천시는 2017년부터 다른 지방자치단체에는 없는 ‘개방정원’이라는 등록제를 실시하고 있다. 관내의 우수한 민간정원 중 일반에 공개하는 정원을 지정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장학마을의 정원들은 순천시 개방정원이다. 특히 화가의 정원산책은 2019년 순천시 개방정원으로 지정된 후 2020년 제1회 전라남도 예쁜 정원 콘테스트 공모전 대상, 2021년 순천시 제1호 민간정원이 되면서 전국적 명성을 날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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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초와 초화류의 색감 조화가 캔버스에 그려낸 그림 같다. 순천=김선미 기자

민명화 정원주는 말한다.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 정원을 조성해온 것 같아요. 작은 면들을 분할해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도록 식물의 질감과 색상을 배치했어요. 자연이 주는 모든 형상은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풍부한 작품의 소재가 되었어요. 마음과 감각을 환하게 열어주는 것, 그것이 정원의 위로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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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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