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글보글 누렇게 익는 막걸리… 80여년 묵은 맛과 향에 취하다
‘근현대 양조장과 술 문화’
국립민속박물관 괴산지역 조사 동행
충북 괴산군 제일양조장 술항아리에서 전통 막걸리가 발효되고 있다. 생산 직후 막걸리는 깔끔한 맛이 나고, 3∼4일이 지나면 구수한 맛이, 10일가량 되면 신맛이 느껴져 취향에 따라 즐길 수 있다. 괴산=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시원한 사이다 캔을 막 개봉한 것처럼 ‘샥∼’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성인 2명이 들어가도 될 만한큰 술항아리에서 나온 소리였다.항아리 안에는 보글보글 거품이 일어나는막걸리가 누렇게 발효되고 있었다.1939년 설립 후 80년째 같은 자리에서막걸리를 만들어내고 있는충북 괴산군의 ‘제일양조장’ 발효실이다.이곳은 국립민속박물관이 올해 3월부터진행하고 있는 ‘근현대 양조장과 술 물화’민속조사 현장이다.10일 박물관 조사팀과 80년 이상전통 막걸리 생산 방식을 고집하는‘제일양조장’과 ‘목도양조장’을 찾았다.》
평생 양조장 외길 ‘제조법으론 설명 안 되는 내공’
“매일 새벽 술항아리를 씻고, 주모(酒母·술을 만드는 원료)를 담그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벌써 50년이네요.”
제일양조장 대표 권오학 씨(70)는 덤덤하게 지난날을 되짚었다. 제일양조장은 ‘괴산에서 제일가는 막걸리’로 여겨질 만큼 뛰어난 맛을 자랑한다. 술항아리에서 막걸리 한 모금을 떠 마셔보니 뒷맛이 개운한 시원함이 밀려왔다. 전통 막걸리는 지에밥(고두밥)에 누룩(술을 만들 때 쓰는 발효제) 등을 섞어 술항아리 안에서 일정 시간 동안 발효시켜 만든다. 언뜻 간단해 보이지만 재료의 비율과 숙성 시간에 따라 맛이 제각각이다. 특별한 비법이 있을까.
“막걸리는 발효식품인지라 제조법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이 무척 중요합니다. 술독에서 나는 소리와 냄새로도 어떤 막걸리가 나올지 알 수 있죠. 노하우를 알려줘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막걸리는 시대에 따라 부침이 컸다. 쌀이 부족했던 1960, 70년대에는 법으로 막걸리 제조에 쌀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읍면 단위별 양조장 허가제 등 각종 규제에 묶여 산업적으로 성장하기 힘든 측면도 있었다.
8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목도양조장의 유기옥 대표와 남편 이석일 씨가 막걸리를 빚고 있다. 괴산=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쌀을 못 쓰게 하던 정부가 1977년도에 갑자기 통일벼를 쓰라고 지침을 내렸어요. 하루아침에 원료를 바꾸니 막걸리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속상하기도 했죠. 지금은 쌀과 밀을 섞어 가장 맛있는 비율로 만들고 있어요. 배운 게 막걸리밖에 없으니 힘이 닿는 한 계속 만들어야죠.”
3대를 이어온 전통 ‘우리 모두의 유산’
“제2회 전조선 주유품평회에 괴산주조주식회사의 제2공장약주가 1등으로 당선됐다.”
동아일보는 1939년 12월 26일자에 당시 전국 술 평가대회 결과를 보도했다. 여기서 소개된 ‘괴산주조주식회사’가 지금의 ‘목도양조장’이다. 조선 최고의 술도가로 뽑혔던 이곳은 1931년 설립 이후 현재 창업주의 3세인 유기옥 씨(60)가 운영한다.
실은 40여 년 동안 위탁경영을 했었다. 유 씨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일찍 세상을 뜨면서 어쩔 수 없이 양조장 경영을 외부에 맡겼다. 이후 전통 막걸리 시장이 계속해서 위축됐고, 결국 2013년 일하던 이들이 모두 양조장을 떠났다.
“80년 역사를 간직한 곳인데 도저히 문을 닫을 수 없었어요. 결국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전통을 이어가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런 마음 덕분인지 목도양조장 막걸리는 ‘옛 맛’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정성을 쏟고 있다. 묵직하면서 텁텁한, 다소 촌스러운 ‘그 맛’ 말이다. 주말이면 서울의 한 대학병원 교수인 남편이 오토바이를 몰고 막걸리 1병이라도 직접 배달할 정도로 전통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주위에서는 더 잘 팔릴 수 있게 설탕이라도 좀 치라지만, 전통 방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양조장은 저와 제 가족의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는 꼭 이어가야 할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이니까요.”
괴산=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