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인 그녀가 '쿵짝쿵짝' 드럼을 치는 이유
Profile
이선민
현 머리 심는 의사
고려대학교병원 방사선종양학과 전문의
전 식품의약품안전처 임상심사위원
드럼을 치게 된 계기는?
대학 시절, 친구를 따라 홍대 인디 밴드 공연장에 처음 갔다. 말 그대로 신세계였다. 어두컴컴한 지하에, 아주 작은 무대에서 날아다니 듯 연주하는 밴드의 모습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럴 때 보통은 보컬을 보기 마련인데, 내 눈엔 드러머가 보였다. 별다른 무대장치가 없이 진행되는 공연에서는 드럼이 유독 돋보인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때, ‘저거 재미있겠는데?’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내 버킷 리스트에 올려놨다.
독학으로 시작한 건가?
아니다. 인근 실용음악 학원에서 레슨을 받으면서 기본기를 뗐다. 처음 스틱을 잡고 연주했을 때부터 푹 빠졌다. 단순히 타격감이 좋고, 퍼포먼스가 멋있기 때문이 아니다. 쿵쿵 울리는 드럼 비트가 사람의 심장박동과 비슷한 주파수를 낸다는 말이 있는데 그걸 직접 느낀 순간이었다. 원시 시대에 음악이나 악기가 없는 종족도 뭔가를 두드리면서 춤추고 노래했다. 그만큼 드럼의 비트는 인간의 근원에 닿아 있는 본능적인 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듣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풀리고 기분이 좋아지더라.(웃음)
드럼 연주에 빠진 뒤에 각종 장비를 모으는 단계로 넘어가는 건 취미의 필수 코스다. ⓒ이선민(@drlanadrum) |
어떤 브랜드의 제품을 쓰고 있나?
드럼이 2개 있는데, 주로 ‘소노’ 악기를 연주한다. 스승에게 추천받은 브랜드다. 올바른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소리가 예쁘다. 이후 드럼의 세계에 더욱 빠져들면서 호기심이 왕성해졌다. ‘저 브랜드는 어떤 소리를 낼까?’라는 물음을 달고 살았다. 특히 드럼을 만드는 재료에 따라, 회사마다 공법의 차이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만큼 재질과 만드는 방법까지 파고들었다. 그렇게 브랜드별 소리의 차이를 느끼면서 좋은 아이템을 하나둘 모으다 보니 지금처럼 작업실이 가득 차게 됐다.
보유한 드럼 중 가장 희귀한 걸 꼽는다면?
갑자기 불이 나서 하나만 가지고 탈출해야 한다면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A&F’라는 드럼 브랜드와 심벌즈로 유명한 기업인 ‘사비안’이 합작해 만든 스네어인데, 가격은 1000만원 이하다. 디자인이 굉장히 올드해 보이지만 사실 신상이다. 장인이 직접 만들어 전 세계에 19대만 있는 한정판이고, 국내에는 나와 이름 모를 한 명만이 유일하게 갖고 있다. A&F의 수준 높은 공법과 금속을 잘 다루는 사비안의 노하우가 만나 괴물 같은 소리를 낸다. 이미 돈을 많이 들여도 구할 수 없는 제품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알기로는 내가 구매했을 때보다 2배 이상 올랐다.
전 세계 19개만 있는 스네어. 가격은 1000만원 이하로 고가다. ⓒ이선민(@drlanadrum) |
레어템 스네어를 얻은 뒤 기쁜 마음을 담아 기념 촬영 중. ⓒ이선민(@drlanadrum) |
초반에는 페달 하나 사는 것도 아까워했다고
그렇다. 2018년에 드럼 연주를 처음 시작했는데, 당시 스승이 자기만의 페달이 하나쯤은 있는 게 좋다고 말했다. 페달도 좋은 건 수십 만원에 이르는데, 나는 처음이니 5만원 정도의 제품을 구매했다. 그런데 막상 그 5만원을 지불하려고 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이게 나한테 그만한 가치가 있나?’ 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기우였다. 그걸 시작으로 재미와 힐링을 얻게 됐으니.(웃음)
드럼은 취미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단순히 연주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다. 드럼에 빠지면서 이것저것 아이템을 모으고, 시쳇말로 ‘장비발’ 좀 세울 만큼 컬렉션이 완성됐다. 그 가운데 레어템도 어느 정도 보유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이 바닥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음악 전공 학생부터 프로 연주자까지 먼저 연락을 해오더라. 대부분 그 악기 한 번 쳐봐도 되느냐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나는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 그렇게 만남이 이뤄지다 보니 어느새 국내 드럼 연주자는 대부분 알고 지내게 됐다.
일류 아티스트들이 먼저 연락한거나 직접 방문한다는 건 엄청난 일 아닌가?
그들이 내 악기를 연주하고 내 공간에서 녹음을 하고, 또 합주를 하는 것 자체에 눈과 귀가 호강하지만, 한편으론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드럼 음악계에 작게나마 기여했구나’싶어 뿌듯하다.
연주실 문을 열면 나오는 일종의 사랑방. 좋아하는 그림과 소품들로 가득 채워 드럼 연주와 또 다른 느낌의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
사람이 많이 찾아온다는 말을 듣고 보니 작업실이 사랑방 같은 느낌이 든다
제대로 봤다. 연주하는 방이 있고, 문을 열고 나가면 그림을 걸어놓은 캐주얼한 공간이 나온다. 사람을 좋아해 차와 음료를 마시며 수다 떨 수 있는 공간이고, 개성 넘치는 스토리를 가진 신진 작가들의 그림을 전시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작업실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총망라된 곳이라고 보면 된다. 합주라도 하게 되면 꼭 뒤풀이가 있는데, 그럴 때 유용하다.
드럼 연주에 푹 빠지다 보니 욕심이 생겨 녹음 영역까지 취미가 확장됐다. |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면 취미에 도움이 많이 되겠다
물론이다. 드럼 연주실에서는 녹음도 한다. 드럼은 마이크를 상하좌우 적재적소에 위치하게 해야 소리가 잘 녹음된다. 이론적으로 준비되어야 하는 전문 영역이다 보니 프로 연주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전문가들이 내 작업실에 와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런 유용한 정보를 얻기도 한다. 그렇게 조금씩 내 드럼 취미도 확장되어 처음에는 연주에서 그치던 것이 점차 아이템 모으기, 녹음, 프로 연주자들과 합주 등으로 발전했다.
녹음을 하려면 공간이 음악적 설계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나?
이곳은 애초에 ‘수은노 마스터링’이라는 음악 스튜디오로 운영되던 곳이다. BTS ‘다이너마이트’의 공동 작곡가 중 한 명이 운영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만큼 음향적으로 완벽하게 설계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음향이 좋으려면 일반 아파트처럼 직사각형 공간, 이를테면 평행한 공간은 피해야 한다. 이곳은 천장이나 벽은 굴곡이 있는 데다 ‘디퓨저’라고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소재를 벽에 설치했다. 바닥도 단단하게 만들었고 흡음이라든지 방음도 완벽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쓰기에는 좀 아까운 공간이다.(웃음) 나같이 비루한 취미 드러머가 운 좋게 소개를 받아 들어오게 됐다.
굴곡진 벽과 천장, 곳곳의 울퉁불퉁한 디퓨저 등 음악적인 설계가 되어 있는 드럼 연주실 |
연주할 때 어려움은 없나?
박자가 정확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다른 악기에 비해 크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피아노나 기타는 필 받으면 조금 느려지거나 빨라질 수 있다. 그게 오히려 그루브로서 더 깊은 감동을 준다. 하지만 드러머가 그렇게 하면 다른 악기들이 다 째려보는 상황이 되는 거다. 드러머는 무조건 이제 ‘칼박’(칼같이 정확한 박자)으로 가야 한다. 그게 드러머의 역할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럼은 엔진과 같다. 엔진이 중심을 잡아주고 다른 악기가 그 위에서 화려하게 노는 거다.
드럼과 의사라는 직업은 어떤 시너지를 내나?
드럼을 치고 나서 팔다리가 굵어졌다. 음악과 스포츠의 영역이 결합된 악기이기에 자연스럽게 운동이 된 것 같다. 나는 원래 요가, 필라테스, 자전거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인데, 드럼을 친 뒤 근력이 더 많이 붙은 느낌이다. 그래서 모발이식술을 할 때도 훨씬 편해졌다. 정교한 작업을 하고 난 뒤 손목이 덜 아픈 것도 순기능이다.
처음 드럼에 빠졌을 때 ‘의사 말고 이걸 했어야 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년 반 정도 배우고 나니 겸손해졌다.
한참 피지컬 좋은 1020 이들이 인생을 걸고
하루 10시간씩 연습해서 다다르는 경지를 너무 쉽게 본 거다.
취미로 연주한다는 건 딱 거기까지다.
인생을 건 이들을 따라잡는다거나 일류 연주자가 되는 건 말이 안 된다.
욕심을 버리고 나서 드럼이 오히려 더 재미있어졌다.
실제로 드럼은 건강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나?
그렇다. 그래서 중년에게 적극 추천한다. 스트레스 해소, 근지구력 향상도 있지만 치매 예방에도 좋다. 드럼을 치려면 ‘사지 분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른손 왼손을 다르게 쳐야 하고, 오른발 왼발을 다르게 움직여야 한다. 그걸 위해 노력하다 보면 아무래도 안 쓰던 두뇌, 신경 등을 쓰게 되면서 치매 예방이 될 것 같다.
사지 분리에 바로 적응했나?
전혀 아니다. 아직도 안 된다.(웃음) 그건 굉장히 어려워서 아마 평생 해야 할 거다.
드럼 연주를 시작하고 일상이 어떻게 달라졌나?
처음에는 드럼을 치러 매일 오려고 했다. 작업실도 마련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연습을 많이 해서 ‘최고의 드러머가 되리라’는 헛된 상상까지 했다. 그때 무리하다가 손목, 발목이 안 좋아졌다. 이후 욕심을 버리고 드럼을 제대로 즐기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작업실에 와서 음악 듣고, 드럼도 치고, 춤도 춘다. 혼자 별짓을 다 한다는 말이다. 그런 자유로움이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음악에 진심이기 때문에 스피커도 전문 스튜디오에서나 쓸 법한 걸로 들여놨다. 앞으로도 여기서는 의사도, 엄마도, 아내도 아닌 온전한 나로 있고 싶은 마음이 크다.
앞으로 계획이나 목표가 있다면?
원래 꿈은 ‘국내 일류 드러머를 다 만나고 싶다’였다. 그건 80% 달성했다. 이제는 드럼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 경치 좋은 곳에 박물관을 만들어 밑에는 연습실을 둬 돈 없는 전공생들에게 빌려주고, 위층은 갖가지 드럼 컬렉션을 비롯해 악기를 관리해 주는 시설을 꾸리고 싶다. 그리고 제일 위층은 공연장으로 꾸며 남녀노소 누구나 드럼, 나아가 음악을 즐기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고수 추천! 드럼 취미 입문 팁 4
1. 실용음악 학원에 가라
방음 문제로 집에 드럼을 들여놓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과감히 실용음악 학원에 가라. 연습실도 있는 레슨도 해준다. 학원에 1020 젊은이들만 간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요즘 실버 밴드 드러머도 학원에서 연습한다.
2. 록스타가 된다는 욕심을 버려라
드럼 하면 대체로 록 음악만 생각한다. 그러나 블루스, 재즈, 트로트까지 모든 장르를 할 수 있다. 좋아하는 곡을 친다고 생각하고 쉽게 접근하자. 록 스타가 되어야만 한다는 한계를 스스로 정하지 마라.
3. 사지 분리가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마라
드럼 연주에 사지 분리(오른손 왼손 따로, 오른발 왼발 따로 연주)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건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잘되지 않는다. 평생 안될 수도 있다. 안되는 게 당연하니 쉽게 포기하지 마라.
4. 전자드럼으로 기초 닦기
리얼 드럼은 자리도 많이 차지하고 소리도 커서 집에서 연습하기 어렵다. 반면 전자드럼은 손뼉 치는 정도의 작은 소리로도 설정할 수 있으니 기초를 닦을 때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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