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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케이션 in 발리] 7년 간의 워케이션 후기, 이숙명 작가

이숙명 작가가 워케이션을 왔다가 발리에 집을 짓고 정착해버린 사연

언제, 왜, 발리에 오게 되었나요?


첫 번째는 집 때문입니다. 2016년이었는데요, 서울 서촌의 한옥에 산 지 2년째였습니다. 그 집에서 보낸 첫 겨울이 너무 추워서 다시 거기서 겨울을 맞는 게 두려웠습니다. 따뜻한 나라에서 겨울을 나고 싶었습니다. 두번째는 제 직업과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영화잡지와 패션잡지에서 일을 했고, 프리랜서로 독립한 후로는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거나 기업과 관공서 홍보물을 제작하거나 책을 집필했습니다. 


각각의 일에 장단점이 뚜렷한데요, 매체 칼럼은 꾸준히 자유로운 일을 할 수 있지만 수입이 적고 결과물이 휘발되어 외롭습니다. 기업과 관공서 하청은 돈은 되지만 영혼이 갈려 나갑니다. 책은 성취감이 크지만 오래 걸리고, 저 같은 무명 작가는 그걸로 생계를 해결할 수 없어서 종래에는 박탈감이 크게 옵니다. 그래서 어느 한 가지 일을 오래 할 수가 없고 돌아가며 해야 단점들이 보완 됩니다. 그때는 마침 책을 쓰고 싶은 시기였습니다. 6개월 정도 집중해서 책만 쓸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습니다.


겨울 동안 따뜻한 나라에서 책을 쓰기로 결심한 후 스페인 남부, 발리, 시엠립의 숙소를 검색했습니다. 사실 와인과 음식 때문에 스페인이 1순위였는데 의외로 숙박비가 비쌌습니다. 그때 주변에서 발리를 권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잡지사 그만두고 우붓이나 스미냑에서 몇 달씩 체류하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동종업계에서 유행이면 내 취향에도 맞겠지 싶어서 발리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엄청난 숙소를 발견했습니다. 계곡 물을 쓰는 30미터짜리 수영장이 있고, 조식 제공하고, 매일 무료 요가 강좌가 있고, 청소도 해주는 호텔 독방이 월 40만 원이더라고요. 알고 보니 요가 리트리트 센터였는데 그땐 리트리트가 뭔지도 몰랐어요.

월 40만 원이 개장 기념 파격 할인가였는데 발리 물가에 비해 싼지 비싼지도 몰랐고요. 물가를 알았으면 그 호텔만 6개월을 예약했을 거에요. 거기가 짱구와 우붓 사이 깡시골이라 라면 한 봉지 사려면 30분을 걸어야 하는 곳인데 지리도 몰랐습니다. 어차피 나는 글 쓰면서 숙소에만 있을 거라고 아무것도 안 알아보고 떠났죠. 


그땐 ‘워케이션'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지 않았습니다. ‘디지털 노매드'는 왠지 번듯한 직업 없이 떠도는 사람을 과대포장하는 말 같아 싫었고요. 그래서 스스로는 영화나 소설에서 보던 ‘집필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발리에서 일하는 건 어땠습니까?


리트리트 호텔에 머무는 동안 최고의 생산성을 경험했습니다. 살림을 안 해도 되고 술 마시자고 불러내는 친구도 없고 TV도 없고 잡다한 업무를 끊은 채 프로젝트 하나만 수행하니까 일이 잘 되더라고요. 일찍 일어나서 요가하고, 호텔에서 주는 밥 먹고, 4~5시간 집중해서 일하고, 끝나면 수영하고, 저녁에는 책을 읽다가 잠들었습니다. 거기 있는 동안 안색도 맑아지고 건강도 좋아졌어요. 


호텔에 한 달 머물다가 근처에 저녁 먹을 식당이 너무 부족해서 우붓 시내에 빌라를 빌렸는데요, 거기서는 주로 스타벅스에서 일을 했어요. 우붓에서 에어컨 틀어주는 카페가 거기 밖에 없었거든요. 공유 작업실들이 있긴 했지만 어떤 곳은 힘들 때 다리 뻗고 일할 자리가 없어서 싫었고, 어떤 곳은 더워서 싫었고, 어떤 곳은 외부 소음이 커서 싫었고, 기타 등등 이유로 카페를 이용했죠. 


리트리트 호텔에 있을 때보다는 생산성이 떨어졌지만 음식 문제가 해결되어서 편했습니다. 독방 대신 카페에서 일하니 사람들의 모습에 영감을 받을 때도 있었고요. 결국 6개월로 예정했던 일을 4개월만에 끝냈습니다. 그 뒤에는 여행 다니고 사람 만나며 지냈고요. 그때 쓴 책이 잘 돼서 디지털 노매드 생활에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워케이션은 성공이었다고 봐야죠.


발리에 살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서울에서 월세 낼 돈이면 동남아 호텔에서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걸 깨닫자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에서 제가 좋아하는 도시가 부산과 순천인데 그런 곳에 작은 아파트를 구해놓고 6개월은 한국에서 살고, 6개월은 물가 싸고 따뜻한 나라들로 여행 다니면서 살려고 했죠. 일은 최소한으로 줄이고요. 그 생각을 갖고 서울에 돌아갔더니 예전엔 무심히 보아 넘긴 것들에 숨이 막혔어요. 고작 은행 대출 갚고 생활비, 외식비 내면 끝인 월급 때문에 죽어라 일을 하고, 아파트 한 채 가진 사람은 거기에 인생의 온 희망을 걸고 집값 떨어질 새라 애면글면, 없으면 없는대로 박탈감과 불안감에 전전긍긍하는 서울 사람들 모습에 위화감이 들었어요. ‘아이고 다 부질없다' 이런 느낌이었죠. 


마침 그때 발리에서 만나 데이트를 했던 친구가 자기가 사는 누사 페니다에 놀러 오라고 초대했어요. 발리와 누사 페니다는 제주도와 우도 같은 관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본 섬과 부속 섬이죠. 가보니 평화롭고 좋더라고요. 그래서 2017년 말에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이민 가방 한 개, 배낭 한 개 들고 누사페니다로 갔습니다. 특별히 무슨 결심을 한 건 아니었습니다. 기간을 정하지 않았다 뿐 여행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갔고,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귀국한다는 생각이었어요. 거창한 결심이 있었다면 오히려 실행에 옮기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누사 페니다에 집도 지었다면서요?


누사 페니다는 7년 전만 해도 외국인이 거의 없던 섬이에요. 섬을 통 틀어 스무 명도 안 됐을 거예요. 제약 기업, 미용 기업이 쓸 해조류를 재배해서 파는 게 섬의 가장 큰 산업이었고요. 그런데 제가 들어오고 6개월쯤 지나서 ‘발리의 마지막 천국!’이라는 식으로 보도가 되고, 발리 인근에서 스쿠버 다이빙 강사를 하던 친구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 들어서 줄줄이 가게를 차리고, 외부인이 쏟아져 들어왔어요. 원래 사람이 많던 섬이 아니니까 집이 부족해졌죠. 호텔이 하루에 하나씩 생기는 수준이지만 장기 체류자를 위한 주방 딸린 집은 지금도 거의 없어요. 


그러다 판데믹이 터져서 섬이 봉쇄되고 할 일이 없어지니까 관광업에 종사하는 친구들이 너도나도 집을 짓기 시작했어요. 저도 그 흐름에 올라탔죠. 한국에서도 집 짓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외국은 오죽하겠습니까. 입맛대로 집을 빌릴 수 있는 발리 본섬만 됐어도 이런 큰 일을 벌이진 않았을 거에요. 동거인이 누사 페니다에서 다이빙 센터를 두 번 지어봤고 현지어도 유창하기 때문에 그것만 믿고 감행했어요. 저는 돈을 대고요. 그런데 하다 보니 저도 공사에 개입을 해야 했고, 동거인도 돈을 내야 했고, 총력전이 벌어졌죠. 


혹시 이걸 보고 발리에 집 지을 생각하는 분이 있을까봐 걱정입니다. 여기는 부동산 사기, 공사 사기가 정말 많습니다. 사기 치는 사람에 한국인, 로컬, 외국인 따로 없고요. 마음은 좋은데 능력이 안 따라주는 사람도 많습니다. 여기까지 흘러와서 일을 하는 외국인은 이상에 비해 현실 감각, 능력, 경험은 부족한 몽상가가 태반이거든요. 잘못 엮이면 인생이 굉장히 피곤해질 수 있습니다. 발리 은퇴 이민을 꿈꾸는 분들께도 해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집을 사든 짓든, 몇 년은 살아보고 결정하세요.

한국을 떠난 지가 7년째인데 일은 계속 하고 있나요?

비자와 생활비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일단 한국에서 20년 동안 일을 했기 때문에 저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은퇴 자금 다 마련해둔 파이어족은 아니기 때문에 매달 지출보다 수입이 한 푼이라도 많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습니다. 그 부분은 한국 매체에 기고하는 것으로 해결을 합니다. 풍족한 건 아니고, 수입에 맞춰 지출을 줄였습니다. 예전에는 외국에 오래 살면 감이 떨어져서 한국 매체와 일하기가 어려웠지만 요즘은 인터넷으로 한국 콘텐츠를 볼 수 있어서 이런 생활이 가능합니다. 그래도 한국에 살 때와 똑같은 감각은 아니기 때문에 아예 한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발견 못하는 소재를 찾아내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여기 호텔에 투자를 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10억5천만 루피아(약 9천만 원)를 투자하면 투자자 비자가 나오는데요, 마침 친구들이 누사 페니다에 호텔을 짓는다고 해서 딱 그 액수만큼 투자를 했습니다. 판데믹 때문에 버린 돈 취급했는데 올해부터 우붓 유명 레스토랑의 분점이 들어오고 숙박도 개장을 한다고 하네요. 모쪼록 거기서도 수익이 나면 좋겠습니다.



발리 생활의 장단점은 무엇인가요?


외국에 단기 여행을 가는 건 그 도시의 잘 포장된 면만 보는 겁니다. 장기 여행은 그 선물 꾸러미의 리본을 푸는 거고요. 유학은 포장지를 뜯는 단계쯤 되겠네요. 그러다 사회에 진출해 현지인들과 돈이 오가는 일을 시작하면 상자 안에 든 게 축하 케이크인지 적이 보낸 잘린 말대가리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제가 장단점을 설명해도 여행자들에게는 와닿지 않거나 불필요한 내용일 거예요. 


직접 경험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깊이 알면 못하는 일들이 있잖아요? 한국인들은 영어로 충분히 소통이 가능한 수준인데도 발음이 안 좋아서, 관사가 헷갈려서, 전치사 틀릴까봐 지레 겁을 먹다가 자기보다 영어 못하는 동남아 사람들이 막 내지르는 걸 보고 용기를 얻곤 합니다. 발리 사람들은 그 ‘일단 지르고 본다’는 성향이 굉장히 강합니다. 언어 뿐 아니라 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오케이 오케이" 하고 봅니다. 잘 모르는 기계가 있어도 일단 뚝딱거려 봅니다. 그러다 책임 못져서 도망가기도 하고, 일을 망치기도 하고, 물건을 고장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단 질렀기에 성공도 합니다. 그들처럼 일단 “오케이" 하고 발리에 와서 직접 경험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워케이션을 위한 조언이라든가, ‘이건 꼭 챙겨라’ 하는 게 있다면?


‘워크'의 목표를 뚜렷이 세우는 게 좋습니다. 작업 환경과 주거 공간을 분리해야 하고요. 잘못하면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우붓에서 넉 달만에 일을 끝내고 생각해보니까 제가 누군가와 같이 밥 먹은 게 한 달 전이더라고요. 한 달 내리 ‘혼밥’을 한 거예요. ‘이제 놀 시간이 생겼으니 친구를 사귀어볼까' 했지만 그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어디서 어떻게 사람을 만날지 막막했습니다. 제가 외로움을 안 타는 성격인데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니까 동호회 가입하고 행사 참석하면서 자연스럽게 친구를 사귀어 두세요. 영어가 불편하다면 몸을 쓰는 동호회면 되고요. 누사페니다에 있다 보면 인도네시아에 사는 외국인들이 다이빙 센터 하나를 점찍어두고 반복해서 오는 걸 자주 봅니다. 그러면서 친구를 사귀고 소속감을 갖는 거죠. 한국인 단독 여행자들끼리 같이 놀러갈 사람을 구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도 있습니다. 잘 이용해 보세요.


인도네시아로 온다면, 여기는 공산품 품질이 낮고 수입품은 물류비와 세금이 많이 붙는 나라니까 필요한 전자 기기는 다 챙겨오세요. 한국 식료품은 수퍼마켓에 많긴 한데 비쌉니다. 신라면이 2천 원 정도 합니다. 무게를 줄일 것인가 돈을 아낄 것인가 중에 선택하면 됩니다. 무게를 줄이기로 한다면 웬만한 건 여기서 구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 쇼핑으로 물건 주문하면 닷새면 오고요.


진짜 중요한 준비물은 따로 있습니다. 오래 머물거나 자주 방문할 생각이면 이 지역과 인도네시아의 역사를 간단히라도 공부하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인도네시아 현대사가 한국과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어떤 장면이 사람들의 정서에 어떤 영향을 미쳤겠구나, 이 도시의 어떤 문제는 원인이 무엇이겠구나 라는 걸 한국인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여행 서적들이 얘기하는 발리가 굉장히 피상적이고 왜곡되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지역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이곳에서 소비하는 방식도 달라질 테고요. 그게 발리에서의 체험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글 이숙명(작가, 발리 거주) 에디터 이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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