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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덴 매거진

'마술'의 프레임을 벗어난 예술가, 일루셔니스트 이은결 인터뷰

마술사도, 일루셔니스트도 그에겐 하나의 프레임이다.

그가 확신하는 타이틀은 ‘이은결’이라는 이름뿐이다.

당장이라도 유머러스한 마술을 선보일 것 같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 대중에게 익숙한 이은결의 모습이다. 30년 가까이 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마술계의 전설이라기엔 꽤나 친근한 인상이다. 이러한 그도 무대를 연출할 땐 사뭇 진중한 모습이다.


최근 종영한 마술 오디션 예능 <더 매직스타>에 아트디렉터로 참여하며 동료 마술사들의 무대를 연출할 때가 그렇다. 이제는 마술사, 일루셔니스트라는 호칭만으론 그를 설명할 수 없다. 연출가를 넘어 예술가로서 이은결은 꽤나 진지하다.

ⓒ 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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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결
· 일루셔니스트


오랜 세월 ‘일루셔니스트’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정확한 의미가 뭔가?

우리나라 영한사전에선 ‘일루셔니스트’를 그냥 ‘마술사’라고 풀이한다. 보통 마술계에선 규모가 큰 마술을 하는 마술사를 일루셔니스트로 구분한다. 내가 하는 일을 명확히 표현하는 단어가 없다는 생각에 일루셔니스트라는 워딩만 차용했다. 최근엔 조금 더 쉬운 표현으로 ‘상상 연출가’라 칭하기도 한다.


‘마술사’라는 호칭을 꺼리는 이유가 있나?

마술사는 본질적으로 ‘주술’에 가까운 것 같다. 주술에서 시작해 마법으로, 마법에서 마술사로 이어져온 것인데, 그래서인지 마술은 신비감을 유지한 채 그 자체가 ‘진짜’여야 한다. 마술은 본질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걸 추구한다. 나는 그런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일루션’은 단어 뜻에서 환영, 환상이라는 의미를 갖기 때문에 그 자체로 허구임을 드러낸다. 한편으론 마술과는 본질적으로 대립하는 단어다. 나의 공연에선 일루션의 영역을 확장해 마술 말고도 공연예술의 다양한 문법을 활용한다. 마술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다.


현재는 공연연출가, 공연예술가에 가깝다. 마술은 한때 내가 가장 사랑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론 하나의 장르로서 나를 가두는 틀이었다. 이제는 그 틀을 넘어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것을 공연에 담고 싶다.


'마술'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마술은 내가 가장 자주 쓰고, 누구보다 잘 쓸 수 있는 언어다. 모국어인 셈이다. 이제는 모국어만 쓰지 않고 다양한 언어로 무대를 채우고 싶을 뿐이다. 더 이상 마술만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확고한 셈이다.


마술계에서 오래도록 논쟁 중인 지점이면서, 개인적으로 문제점으로 꼽는 것이 있다. ‘마술은 신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도 이미 ‘마술은 신기한 것’이라는 인식이 확고하다. 신기하지 않은 마술은 마술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확고한 인식 때문에 대부분 마술사가 ‘신기함’이라는 가치에 매몰된다. 마치 르네상스 시대 미술계에서 원근법 하나로만 그림의 가치를 논하는 것과 같다. 미술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는 단일한 관점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가치로 작품을 바라본다. 하나의 분야에서도 다양한 관점이 생겨야 그 분야의 영역이 확장된다. 나는 마술의 관점을 확장하려는 사람 중 하나인 셈이다. 마술이 꼭 신기해야 한다면, 나는 마술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이다.


대중 입장에서 ‘마술 공연’ 하면 마술사에게 으레 기대하는 바가 있을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새로운 것, 신기한 것 등이 그 예다. 신기함을 추구하지 않는 마술은 일면 대중의 기대와 상충된다. 비판이 우려되진 않나?

신기함에 매몰되면 내가 본질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담지 못한다. 요즘 나한테는 ‘얼마나 더 신기한 마술인가’보단 ‘무엇을 표현하고 연출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다만 대중의 니즈를 아예 배제하는 건 아니다. 어쨌든 나는 공연하는 사람이고, 대중을 즐겁게 하는 것이 목적 중 하나다. 내 공연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더 일루션>이라는 공연이 있다. 도입부에선 대중의 눈길을 끌만 한 신기한 마술을 수준 높게 구현한다. 그리고 이를 하나씩 해체하며 결국엔 마술이 없는 상황까지 이끈다. 관객이 원하는 바와 나만의 연출이 조화를 이룬 공연인 셈이다.

ⓒ 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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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되는 마술을 할수록 사람들은 열광한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마술에선 ‘마술사’는 보이지 않는다.

마술사의 아이디어만 남을 뿐 마술사의 생각이나 관점은 없다.

마술이 오로지 ‘신기함’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은결’을 지켜보던 대중에겐 다소 낯선 모습일 것 같은데?

맞다. 이런 나의 방향성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마술 분야의 보수주의자들은 ‘마술의 본질을 흐린다’며 비판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향성이 옳다 그르다를 얘기하려는 것도 아니고, 마술계 전체를 변화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나라는 사람이 뭘 할 수 있을지만 생각한다. 마술 숍엔 지금도 새로운 마술 도구가 끊임없이 나온다. 그런데 내가 이런 것을 활용한 마술로 환호를 받는다 한들 나에게 무엇이 남겠나. 몇십 년 전 마술사들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은 내 모습을 보면 너무나 공허할 것 같다. 지금은 내가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 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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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다 보니

마술을 시작하게 됐고,

관객에게 좋은 무대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공연만 좋다면 그것이 꼭 마술이

아니더라도 괜찮지 않나 싶다.


마술 오디션 프로그램 <더 매직스타>가 종영했다. 소감은?

<더 매직스타>는 10여 년 만에 만들어진 마술 소재 주간 방송 프로그램이다. 과거에는 주간 방송 마술 프로그램이 몇 있었는데,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마술 소재 방송이 사장되었다. 대중에게 마술이 더 이상 흥미로운 방송 소재가 아니게 된 것이다. 마술의 장르적 매력이 떨어지면서 마술계의 피해가 컸다.


MBC 예능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스스로 추구하던 모습을 모두 내려놓고 ‘코미디’ 콘셉트로 원초적 재미를 선보였다. 당시 목표는 관객으로 하여금 마술이 ‘재미는 있네’라는 생각이 들도록 마술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었다.


<더 매직스타>는 다시 10년여 시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마술을 소재로 주간 방송이 만들어질 또 한 번의 기회였다. 마술계가 또다시 과거의 암흑기로 돌아가지 않도록 방송 기획에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래도 시청자분들이 프로그램을 좋게 받아들여준 덕분에 무사히 끝마친 것 같다.


이번엔 무대 위가 아닌, 무대 뒤에서 아트디렉터로 활동했다. 프로그램의 성패를 위해 희생한 셈인데, 마술계에 대한 사명감 때문인가?

희생이나 사명감이라는 표현은 다소 과한데, 어쨌든 프로그램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아트디렉터로 임하게 된 건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급히 결정된 사안이다. 나는 마술 무대 연출과 기획은 매번 하던 일이라 어렵지 않지만, 마술 무대 구성을 처음 해보는 현장 감독과 스태프는 그 현장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들은 준비 과정에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지만, 무대를 완벽히 구현하기 어려웠다. 이대로는 마술 무대 구현에 어려움이 있겠다고 판단해 무대 뒤에서 다른 마술사들을 돕기로 결정했다.


예능 시청률 기준 상위권에 머물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프로그램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고 볼 수 있겠다

마술이라는 것이 단순히 신기한 것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다양한 재미를 줄 수 있는 무대구나 하는 걸 알리는 데는 성공했다고 본다. 다만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처음 시도하는 방송 형식인 만큼 시행착오도 많았다. 특히 명확하지 않은 심사 기준들이 논란을 야기했다. <더 매직스타>는 기술을 평가하는 대회가 아니라 대중의 감동이 평가의 지표가 되는 오디션 형식이다. 그만큼 기술의 난도나 완성도 등으로 평가 기준을 세우기가 어렵다. 그래서인지, 경연 상위권을 차지한 사람들을 ‘이은결 사단’으로 거칠게 엮으며 그들이 경연에서 이득을 봤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그들의 성과가 나에게 어떠한 이득도 주지 않는데도 말이다. 방송에 참여한 마술사들은 대부분 이미 여러 마술 대회에서 우승을 했던 실력자들이다. 단순히 내 도움으로 순위가 좌지우지될 상황은 아니었다.


방송은 잘 마무리되었고 좋은 평가도 많아 고생한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억울한 측면이 많은 비판의 목소리에 다소 피곤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얻은 것이 있다면?

<더 매직스타>의 가장 큰 성과는 대중으로 하여금 마술의 ‘취향’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취향이 생겼다는 건 마술의 장르가 다양해질 수 있다는 의미다. 단순히 처음 보는, 신기한 모습만이 마술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마술 공연이 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 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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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마술에만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다.

신기한 건 나 말고도 많은 마술사가 하니

나까지 할 필요가 없지 않나.

내 무대를 보러 온 관객에게 단순히 ‘마술 공연’이 아니라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나만의 무대를 선보이고 싶다.


종영 이후에 바로 전국 투어 공연을 떠났다. 개인 공연과는 준비하는 마음가짐이 사뭇 달랐을 것 같은데

부담이 컸다. 프로그램과 티켓에 내 이름이 걸린 만큼 공연의 성패에 따라 개인적으로는 물론 마술계 전체에도 영향이 갈 것이다. 과거 해외에서 유명 마술사가 <태양의 서커스>와 합작해 대형 공연을 기획한 적이 있다. 명성만큼이나 대중의 기대가 컸는데, 그 공연이 혹평을 받으면서 문화계 전체에서 마술의 입지가 좁아진 사례를 남겼다. <더 매직스타>를 통해 마술에 대한 대중의 기대가 생겨난 지금 시점에서 전국 투어 공연이 중요한 이유다.


다만 솔직히 조금 지친 상태다. 프로그램을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출연하는 동료 마술사들을 위해 많은 아이디어를 대가 없이 제공하기도 했다. 방송과는 관계없는 회사 동료들까지 모두 동참해 공연을 준비했다. ‘너무 큰 오지랖이었나’ 싶기도 했다.(웃음)


화려한 무대에 오른 모습만 봐왔다. 무대를 준비하는 연습 공간은 처음인데, 공간에 대해 소개하자면?

스튜디오는 창작 센터에 가깝다. 무대에 오르는 모든 소품을 직접 만들고, 무대를 계획하고, 연습하는 공간이다.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공연 이후까지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20여 년간 공연을 준비하며 만든 모든 것이 이곳에 정리되어 있다. 옆 건물엔 새로운 소품을 만드는 작업실도 마련했다.


연습 공간과 무대 위, 무대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어느 공간에 있을 때 더 즐겁나?

아무래도 무대 위에서 느끼는 기쁨이 크다. 무대는 나만의 것을 만들고 그것을 세상에 선보이는 장소다. 특히 새로 창작한 연출이 대중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을 때가 있는데, 그때 느끼는 쾌감은 그 무엇 것과 비교할 수 없다. 모두가 할 수 있는 걸 잘하는 것보다 누구도 하지 않은 걸 도전해 긍정적인 반응을 이끄는 것이 즐겁다.


물론 때때로 무대를 기획하는 연습 공간이 더 즐거울 때도 있다. 새로운 도구를 만들고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관객의 반응을 상상하는 게 재밌다.

ⓒ 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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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공연에 비해 마술 무대는 타이밍과 연출이 더욱 중요한 것 같다. 스태프와 호흡이 중요할 것 같은데?

맞다. 그래서 오래도록 합을 맞춰온 스태프와 무대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나는 이 무대 자체가 스태프와의 합작이라 여긴다. 무대에서도 이들의 노고를 드러내는 연출을 자주 시도한다. 다만 계속 같은 인원들과 무대를 준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많은 사람이 합작하는 만큼 인간관계에서 마찰이 생기는 등 여러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에서 힘들진 않나?

때론 힘들지만, 그래도 나는 무대에서 새로운 것을 선보이는 게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 오히려 지치는 건 무대를 제외하곤 ‘나의 연출’을 선보일 기회가 없다는 거다.


관객이 바라는 모습과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 그 사이의 괴리에서 고민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렇다. 보통 방송에 나가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한정적이어서 방송 상황에 맞게 남들이 다 하는, 또는 흔히 아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정작 내 무대에서 하는 것은 방송이나 미디어에선 보여줄 수 없다. 당장 나에게 주어진 딜레마다.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다만 관객 앞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나설지는 나조차도 스스로 합의를 봐야 하는 부분이다. 계속해서 고민해야 할 숙제다.


앞으로 ‘이은결’이라는 사람이 보여줄 모습이 궁금하다

<더 매직스타> 전국 투어는 개인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는 아니다. 업계 전체의 중요한 프로젝트여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기여한 것이다. 오히려 11월에 있는 <멜리에스 일루션>이 개인적으로 중요한 공연이다. 이 공연을 위해 5년 넘게 창작 작업을 이어왔고, 국내에 정식으로 ‘이은결 연출’이라는 타이틀로 선보인다. 이 작품은 해외시장 론칭이 목표다.


‘마술’이라는 문법에 한정되는 한, 결국 기존의 어떤 것을 조금 변형할 뿐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 처음 접하는 전무후무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 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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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앞에 ‘마술사’도, ‘일루셔니스트’도 빠졌으면 좋겠다.

그냥 ‘이은결’이라는 이름만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싶다.

정지환 에디터 stop@mcircle.biz

송승훈 포토그래퍼 denmagazine@mcircle.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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