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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원 vs. 45만원… 잔술 한 잔의 양극화

[아무튼, 주말]

인기 올라가는 잔술

주세법 개정안 입법예고


조선일보

서울 탑골공원 뒤 ‘부자촌’의 1000원짜리 소주 잔술(왼쪽)과 롯데 에비뉴엘 잠실점 ‘클럽코라빈’의 45만6000원짜리 와인 잔술./이신영·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뒤 ‘부자촌’에서는 소주와 막걸리가 한 잔에 1000원이다. 가게 주인은 “여전히 노인 분들이 주 고객이지만, 요즘에는 술값이 비싸져서 그런지 소주 한두 잔씩 먹고 가는 젊은 사람들이 늘었다”고 했다.

#서울 송파구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6층 와인바 ‘클럽코라빈’에서는 매장에서 보유한 와인 500여 종을 모두 잔술로 마실 수 있다. 가장 비싼 227만7000원짜리 프랑스 부르고뉴산 레드와인을 ‘바이 더 글라스(by the glass·125mL)’로 주문하면 45만6000원. 최저가 잔술 와인은 5000원이다.

이르면 이달부터 잔술 판매가 법적으로 명확하게 허용된다. 기획재정부가 지난달 20일 ‘주류 면허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외식업장에서 와인·위스키·청주 등의 잔술 판매가 흔히 이뤄져 왔지만, 주세법상 ‘불법’으로 볼 여지가 있었다.


주세법은 병·캔 등에 담아 출고한 술을 임의로 가공·조작하는 걸 금지한다. 문제는 술의 가공·조작을 ‘판매자가 물리적·화학적 작용을 가해 주류의 종류·종목·규격을 바꾸는 행위’라고 정의했다는 점. 술을 병·캔에서 잔으로 옮기는 일도 ‘규격’을 바꾸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이번 개정안은 술을 잔에 나눠 담아 파는 건 주류 판매업 면허 취소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정부 규제 때문이 아니라도, 한국인은 잔술을 선호하지 않았다. 술은 병 단위 주문이 기본이었다. 잔술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잔술을 파는 업장이 최근 증가하는 건 물가 급등과 함께 술값도 올랐기 때문만은 아니다. 라이프스타일이 바뀌고 있다. 건강을 염려해 음주량을 줄이거나 아예 끊는 이들이 늘었다.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미하려고 마신다.

'클럽코라빈'에서는 보유하고 있는 모든 와인을 잔술로 주문할 수 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런 트렌드에는 잔술이 어울린다. 클럽코라빈을 운영하는 아영F&B 손성모 총괄본부장은 “손님들이 ‘이런 (고가) 와인도 잔술로 마실 수 있느냐’며 신기해한다”며 “저가·중가보다는 경험하기 힘든 값비싼 와인 잔술 주문이 더 많고, 관심 있던 여러 와인을 조금씩 맛보려는 손님이 많다”고 했다. 잔술을 팔지만 결코 싸지 않은 술집이 늘어나는 이유. 잔술의 양극화다.


서울 청계천로 ‘고량주관’은 중국 고량주 서너 가지를 잔술로 묶어 2만2000~8만8000원에 판매한다. 고가의 고량주를 병으로 주문할 때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재동에 있는 돼지국밥집 ‘안암’은 잔술로 소주나 막걸리가 아닌, 충남 서천에서 이상재 명인이 빚은 한산 소곡주를 4000원에 낸다. 음식과 술이 서로의 맛을 끌어올려 주는 ‘페어링(pairing·궁합)’을 느껴보라는 취지다.


와인을 잔술로 파는 업장이 늘어나는 건 와인 보존 장비가 속속 개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클럽코라빈에서 사용하는 ‘코라빈(Coravin)’은 미국 MIT 출신 의료기기 발명가 그레그 램브렛이 개발했다. 코르크(병마개)를 뽑지 않고 가느다란 바늘을 찔러 넣어 와인을 추출하고, 와인이 줄어든 만큼 질소 가스를 채운다. ‘와인 디스펜서’ 등 기존 장비는 병을 따야 하는 데다 대당 수백만~1천만원대인 반면, 코라빈은 와인병을 따지 않은 상태로 유지·보관할 수 있고 가격도 20만~60만원대로 저렴하다.

'부자촌'은 소주를 종이잔에서 작은 스테인리스 잔으로 최근 교체했다. 소주 한 병을 따르면 4잔 정도 나온다./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값싼 잔술집은 사라지는 추세다. 탑골공원 뒤 ‘뚱순네’는 더 이상 잔술을 팔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이 가게는 공짜 안주와 함께 소주와 막걸리를 1000원에 종이컵 가득 따라줘 인기가 높았다. 가게 주인은 “잔술로 팔면 손해가 커서 안 팔기로 했다”고 했다. 소주 한 병(360mL)을 종이컵에 따르면 3잔 정도 나온다. 소주 한 병을 3000원에 파는 셈으로, 식당에서 받는 가격(6000~7000원)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부자촌도 소주는 종이잔에서 작은 스테인리스 잔으로, 손바닥만 했던 막걸리잔은 주먹만 한 크기로 교체했다. 최근 술값이 올랐기 때문이다. 주인은 “다른 동네에 비하면 아주 싼 가격이지만, 지폐 한 장 들고 오는 노인 분들이 고객이라 올릴 수가 없다”고 했다.


김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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