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해도, 단출해도 모든 김밥은 ‘추억의 맛’을 낸다
[아무튼, 주말]
[양세욱의 호모 코쿠엔스]
‘맥시멀리즘’ 김밥과 ‘미니멀리즘 ‘김밥
소풍 전날이면 흥분과 설렘 때문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정작 자정 넘도록 잠들지 못한 분은 어머니였다. 지단을 부치고 시금치를 볶고 우엉을 졸이고 단무지를 썰어 둔 뒤에야 어머니는 쪽잠을 청하셨다. 어느 봄 소풍 때는 이웃집 큰어머니, 당숙모까지 김밥 재료 준비로 분주하셨다. 담임 선생님 김밥을 맡았기 때문이다. 어느 봄이었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알록달록한 야채들을 두툼하게 부쳐낸 지단과 김이 두 겹으로 감싼 그 김밥의 우아한 자태와 보슬보슬한 식감만은 여태 생생하다.
밥 대신 지단으로 속을 채운 김밥을 내는 식당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간 것은 그날의 기억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몇 해 전 일이다. 그사이 ‘키토 김밥’이 유행하면서 케톤(ketone)이라는 낯선 유기화합물 이름도,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는 케톤 생성 식이요법(ketogenic diet)이라는 난해한 의학 용어도 이제는 제법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키토 김밥을 유행시킨 그 원조집 ‘보슬보슬’을 다시 찾았다.
서울 ‘보슬보슬’의 보슬키토, 묵참키토마요, 삼겹묵은지김밥. /양세욱 제공 |
퇴근 무렵 서울 강남역 3번 출구 앞에는 역사로 진입하려는 직장인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이 낯선 광경에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출구를 빠져나와 먹자골목의 유혹을 내치고 역삼역 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면 지단 색깔을 연상시키는 노란 입간판이 멀리서도 또렷하다. 한두 번 방문으로 다 맛보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 기발한 ‘쌈’ ‘말이’ 메뉴들 가운데 보슬키토(7500원), 묵참키토마요(8500원), 삼겹묵은지김밥(9000원)을 골랐다.
보슬키토는 밥 대신 지단으로 속을 채우고 당근과 미나리를 곁들인 대표 메뉴다. 한 조각을 베어 물자마자 잊고 있던 그 보슬보슬한 식감이 입안 가득 전해 왔다. 건강을 염려해서든 그저 좋아서든 계란을 즐겨 먹는 이들에게 이만한 메뉴는 드물다. 지단의 양을 살짝 줄이고 제철을 맞은 미나리를 더 보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묵은지와 참치마요, 지단이 들어간 묵참키토마요에는 초등학생 아들이, 삼겹살과 묵은지, 밥, 김 네 겹으로 야채를 감싼 삼겹묵은지김밥에는 아내가 젓가락을 자주 내밀었다. 셀프바에서 제공하는 시원한 김칫국에도 높은 평점을 주고 싶다.
김 속으로 들어온 한 상 차림인 김밥은 조리법의 유연성이 돋보이는 음식이다. 지단, 햄, 맛살, 어묵, 단무지, 당근, 우엉부터 오이, 시금치, 부추, 깻잎, 김치, 샐러드, 시래기, 불고기, 참치, 치즈, 멸치, 진미채, 날치알까지 어울리는 부재료는 차고 넘친다. 성게를 넣은 부산 김밥, 갈치나 꽁치를 넣은 제주 김밥도 별미다. 조리법의 이런 유연성이야말로 김밥의 매력이자 잠재력이다.
김밥 8개, 오징어무침, 깍두기, 된장국으로 구성된 통영 ‘한일김밥’ 1인분. /양세욱 제공 |
날로 새롭고 화려해지는 ‘맥시멀리즘’ 김밥의 반대편에는 기교와 화려함을 다 버린 ‘미니멀리즘’ 김밥이 있다. 충무시와 통영군이 통합되면서 충무라는 옛 이름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부재료는 물론 식초조차 넣지 않은 밥을 기름을 바르지 않은 김으로 감싼 엄지손가락 굵기의 이 김밥은 지금도 충무김밥으로 불린다. 충무김밥은 여객선 터미널이 있던 강구안 일대에서 간편식으로 탄생했다. 지금도 중앙시장에서 서호시장까지 이어지는 강구안 미식 거리에는 저마다 원조를 내세운 충무김밥 노포들이 몰려 있다.
통영 한일김밥은 여러모로 돋보이는 충무김밥 전문점이다. 입구에서 커다란 금속 물고기 조형물이 손님을 맞는다. 한국전쟁 피란 중에 근처에서 2년을 살면서 ‘황소’ ‘부부’ 같은 대표작을 그린 이중섭이 담뱃갑 속 은박지에 철필로 눌러 그린 고등어가 그 모티브다. 식당의 유일한 메뉴인 충무김밥(7000원)을 주문하면 김밥 8개와 오징어무침, 깍두기, 국물이 검은 쟁반에 담겨 나온다. 김밥은 흐트러짐 없이 정갈하고 갓 지어낸 밥알은 고소하다. 김밥과 함께 내는 대왕오징어무침은 적당히 매콤하고, 깍두기는 알맞게 아삭거린다. 무엇보다 쌀뜨물에 멸치와 된장을 넣고 끓여낸 국물이 시원하다. 부재료로 가득한 김밥의 화려함은 없어도 건강하고 맛있는 한 끼 식사로 부족함이 없다.
봄 소풍이 시작되는 계절이다. 흥분과 설렘으로 밤잠을 설친 아이들의 도시락은 변함없이 김밥으로 채워질 터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김밥의 위상과 세계인들의 시선이다. ‘검은 반도체’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고요한 혁명을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볼 일이다.
[양세욱 인제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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