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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휜 손가락, 엄마의 새카만 발톱...제가 이어요, 새벽 배송으로”

[아무튼, 주말] 3대째 광장시장 박가네 빈대떡 추상미 대표

연구원 관두고 가업 이은 빈대떡 집 손녀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나오셨어요?” 서울 광장시장 먹자골목에서 만난 ‘박가네 빈대떡’ 추상미(42) 대표는 이웃 가게 주인들에게 인사하느라 분주했다. “꼬마 때부터 뵀던 분들이에요. 할머니 따라 나오면 귀엽다고 용돈 쥐여주셨지요(웃음).”


추 대표는 할머니, 어머니에 이어 3대째 광장시장에서 빈대떡 집을 하고 있다. 그는 “1905년 광장시장이 문을 연 이래 먹자골목에 있는 가게 중 3대 경영은 처음 같다”고 했다. 60~70대 터줏대감 사장님이 즐비한 이 구역의 최연소 사장이기도 하다.


이 ‘막내 사장’이 올 추석 코로나 직격탄을 맞아 우울한 시장통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이름하여 ‘차례상 새벽 배송’. 전, 과일, 한과 등 제수를 추석 전날이나 이틀 전 새벽 7시에 배송하는 서비스였다. 재래시장의 변화를 이끈 빈대떡 집 손녀를 지난 5일 만났다.





◇박가네 이은 추씨 딸


—광장시장과는 인연이 어떻게 시작됐나요.


“할머니가 젊어서 혼자되셨어요. 1966년 5남매 데리고 목포에서 상경해 어린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맨몸으로 뛰어든 곳이 광장시장이었답니다. 채소 장사, 반찬 장사 평생 안 해보신 게 없으셨대요. 어머니가 70년대에 장남인 저희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할머니를 도와 시장에 들어오셨죠. 그러다 30년 전쯤 두 분이 빈대떡 가게를 시작했어요. 지금 같은 먹자골목은 없고 황해도 출신 할머니 한 분이 길에서 빈대떡을 파셨대요. 저희도 노점으로 작게 시작했다가 몇 년 뒤에 가게를 냈어요. 그때 내건 이름이 ‘박가네 빈대떡’이었습니다.”


—박가네를 추씨가 이었네요. 할머니가 박씨인가요?


“어머니가 박(금순)씨예요. 할머니는 이(옥순)씨고요. 그러고 보니 한 집안인데 성이 다른 여성 셋이 가업을 이었네요. 가게 이름 지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 성을 내걸자고 하셨대요. 고된 시집살이 묵묵히 견뎌줘 고맙다는 아버지식 헌정이었던 듯해요. 은근한 로맨티시스트였다니까요.”


—빈대떡 집을 물려받은 건 언제인가요.


“2014년이니 만 6년 됐네요. 원래는 생명공학 연구원이었어요.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공공 기관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도 일했어요. 아이가 네 살 때 육아 휴직을 했는데 부모님 가게가 세무조사를 받게 됐어요. 원래는 잠깐 회계 정리나 도와드리고 다시 직장에 나갈 생각이었어요.”


—가업을 이을 생각이 없었다고요?


“거창하게 말해 가업이지, 시장 장사잖아요. 어릴 때 할머니,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하시는지 봐와서 장사를 한다고는 상상도 안 해봤어요. 제 기억 속 할머니 냄새는 파스 냄새예요. 온몸에 통증을 달고 사셨어요. 어머니 냄새는 바셀린 냄새. 동상 때문에 저녁마다 바르셨거든요.”


시장이 싫었던 건 외로웠던 어린 시절 탓도 있었다. “두 살 터울 오빠가 발달 장애를 가지고 있어요. 꼬마 때부터 새벽 4시에 부모님이 일 나가시면 종일 아픈 오빠와 단둘이 있어야 했어요. 저도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인데 오빠 보호자 노릇을 해야 했지요. 오빠는 아프고, 부모님은 바쁘고. 꼬마가 외로움을 혼자 삭인 거예요. 이런 상처 때문에 그저 평범하게 직장 생활 하고 아이 키우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왜 안정적인 연구원 생활을 접고 시장으로 들어갔나요.


“6개월 정도 회계 정리를 하면서 애써 외면했던 할머니와 부모님의 지난 삶을 마주했어요. 어렸을 땐 빈대떡 집 자식이라는 게 창피해 친구들한테도 말을 안 했거든요. 막연하게 그분들 삶을 부정하고 똑같이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요. 희생으로 빚은 그분들의 시간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제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알겠더군요. 제가 하지 않으면 50년 넘게 해온 일이 의미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어요.”


막상 들어온 시장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종일 사무실에 박혀 있던 연구원이 기름 범벅으로 온종일 서 있어야 했다. ‘연중무휴’라는 부모님 철칙을 이어받아 1년 365일 꼬박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한다. 지난 추석 닷새 연휴 때도 하루도 쉬지 않았다고 했다.


“어렸을 때 할머니, 어머니가 저를 시장에 못 오게 했어요. 너무 거칠어 애들 올 곳이 못 된다면서요. 그런데 어른이 돼 사회생활 하면서 깨달았어요. 겉으로 점잖은 척, 우아한 척할 뿐이지 시장 밖 세상이 거칠면 더 거칠다는 걸. 시장 사람들은 잡아먹을 듯 싸우다가도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었던 듯 금방 풀어져요. 몸은 힘들지언정 가식은 없어요.” 씩씩하게 그가 웃었다.



◇차례상을 새벽 배송? 디지털 만난 시장


—차례상과 새벽 배송.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도 보이는데 어떻게 떠올렸나요.


“최신 유행인 새벽 배송이 재래시장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코로나 때문에 재래시장에서 장 보기를 꺼리는 분들에게 ‘우리가 찾아가겠습니다’라는 적극적인 메시지도 보내고요. 이왕이면 ‘광장시장과 함께한다’는 우리 가게 취지를 살려 이웃 가게와 같이하는 게 좋겠다 싶었죠. 주변 상인분들께 물건만 내주시면 제가 열심히 팔아보겠다고 했더니 흔쾌히 동참해 주셨어요.”


생선 가게, 폐백 음식점, 정육점, 강정 가게 등 6곳이 의기투합했다. 필요한 품목을 선택하면 꾸러미로 일괄 배송하는 모델이었다. 마켓컬리 배송 업체 ‘팀프레시’가 새벽 배송을 담당했고, 수수료 없는 플랫폼을 이용했다. “연휴 끝나고 주문한 분들에게 일일이 전화했더니 대뜸 ‘다음에도 할 거죠?’ 하는 분이 많았어요. 실패는 아니구나 싶어 한숨 돌렸죠(웃음).”


—태극당, 삼진어묵 등 3세가 요식업을 이어받는 사례가 늘고 있어요.


“요식업을 한 1, 2세는 대체로 고생은 본인들 세대에서 끝내고 자식들은 편한 일 하면서 곱게 살기를 바라셨어요. 그런데 저희 세대는 해외여행 가서 수백 년 역사 지닌 시장이나 음식점을 경험하며 가족들이 해온 일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됐어요.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의미 있게 가업을 계승하는 가치에 눈뜬 거죠.”


—부모 세대가 닦아놓은 길에 쉽게 올라타는 것 아니냐는 비판적인 시선도 있어요.


“사실 대를 잇는 게 쉬워 보이지만 망할 확률도 높아요.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위 세대가 쌓아온 것까지 무너뜨릴 수도 있거든요. 저도 몇 해 전 쌀 베이커리를 겸하는 쌀가게를 열었다가 실패했어요. 그때 수업료 치르고 얻은 교훈이 큰 변화를 주기보단 해오던 것을 지키며 조금씩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지금 추 대표는 박가네 빈대떡 1, 2호점과 청과 가게 ‘상미원’을 운영하고 있다. 직원은 40여 명. 시장에선 큰 규모다.


빈대떡 집 삼대 이야기는 작년 방영된 넷플릭스 인기 시리즈 ‘길 위의 셰프들’ 서울 편에 등장했다. “어느 날 넷플릭스 제작진이 현지 조사를 했는데 대를 이은 스토리가 재밌다면서 출연 요청을 했어요. 잠깐 나왔는데 방영 직후부터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 왔어요. 국경을 초월한 새로운 채널의 막강한 힘과, 우리 전통이 외국인 눈엔 더 특별해 보인다는 걸 실감했어요.”


—시장에서 젊은 세대의 역할은 뭘까요.


“제가 어렸을 때 본 시장은 없는 게 없는 보물 창고였는데 언젠가부터 재래시장들이 먹거리 위주로 획일화되고 있어요. 저처럼 시장의 역사를 기억하는 젊은 세대가 시장의 다채로운 얼굴을 살려내야 한다고 봐요.”


—다양성을 잃었다고요?


“광장시장은 예전부터 청와대, 특급 호텔, 재벌가 등에 신선 식품을 대던 가게가 많았어요. 저희 집 단골 중엔 삼성, 한화, 대상 등 재벌가 사람도 꽤 있었어요. 한번은 연세 많은 여자분이 휠체어 타고 오셔서 어머니 손을 꼭 잡으며 반갑게 인사하셔서 어머니께 누구냐고 물으니 고건 전 총리 부인이라고 하셨어요. 그런 분들이 장 보러 오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관광지 느낌이 강해졌죠.”


1955년 시작한 생선 가게 ‘대원상회’, 1960년부터 영업한 폐백 음식 전문점 ‘이화폐백’ 같은 곳을 이번 추석 차례상 배송에 넣은 것도 “광장시장의 희미해진 역사를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는 “시장은 ‘살아가다’ ‘살아내다’ 두 말이 펄떡이는 곳”이라 했다. “제겐 시장 어르신들의 휜 손가락, 동상으로 새까매진 발톱이 발레리나 강수진의 상처투성이 발가락 같아 보여요. 살아내기 위해 온몸을 쏟아 바친 그분들의 인생이 오롯이 느껴져 숙연하기까지 합니다. 이분들의 숭고한 삶을 조금이라도 기억하게 하는 것, 그게 할머니 때부터 광장시장에서 우리 가족이 받은 것을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김미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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