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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에서 택시기사로… 종철이가 감아준 목도리에 부끄럽지 않도록

故 박종철 열사 35주기에 만난

‘그 선배’ 박종운이 살아가는 법

조선일보

민주 투사 출신 박종운씨가 성산대교 아래 택시를 멈추고 카메라 앞에 섰다. 승객에게 대접받는 느낌을 주려고 정장을 입고 출근한다는 그는 "정치얘기 대신 올드팝을 튼다. '라떼(나 때)는 말이야'가 될까 봐 젊은이들에겐 먼저 말 걸지 않는다"며 웃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한 택시가 지난 9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앞에 섰다. 고(故) 박종철 열사의 35주기 추모식이 한창인 곳이었다. 박종철은 서울대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사망했다. 모진 고문과 폭행에도 수배 중이던 학교 선배의 소재와 행방을 끝까지 함구했다. 대학생이 고문 중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격분했고 5개월 뒤 6월 항쟁이 일어났다. 택시에서 내린 기사는 35년 전 박종철 열사가 목숨과 맞바꾼 바로 그 선배.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평생을 살아온 박종운(61)씨였다.


그는 군사독재 시절 검경의 검거 대상 1호였다. 당시 경찰은 ‘모든 학생 시위의 배후에 서울대 사회학과 81학번 박종운이 있다’고 판단했다. 박종운씨는 서울대 학생운동의 비공개 조직이었던 ‘민주화추진위원회’에서 학생운동 지도를 맡았고, ‘반제 반파쇼 민족 민주화 투쟁 위원회(민민투)’에도 관여했다. 국가보안법상 이적 단체 구성죄, 반국가 단체 구성죄 위반으로 현상 수배령이 떨어져 4년간 도피 생활을 했다. 정권이 바뀌고 수배가 해제된 뒤로는 ‘노동운동단체협의회’에서 활약했다.


1987년 이후 그의 인생을 어떤 이들은 ‘변절’이라 말하기도 한다. 1989년 동구권 공산주의 붕괴 사건에 충격을 받은 그는 1995년 서울 강동구청장 비서실장이란 직함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2000년엔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은 그를 두고 “박종철을 생각하면 정치 안 했어야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서로 다른 길을 가지만, 박씨는 1월 14일 박종철 열사가 세상을 떠난 날은 잊지 않고 챙긴다. 추모식에 참석하고, 박종철 생일인 4월 1일에도 모란공원으로 향한다. ‘물러가라’ ‘반성은 하느냐’는 고함이 들려와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종철이 때문에 갑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던 날 종철이가 저에게 ‘춥지예?’ 하며 둘러준 목도리를 끝내 돌려주지 못한 게 미안하고 한스러워서.”


투사 박종운의 삶을 뒤바꿔 놓은 건 무엇이었을까. 나이 육십에 택시 운전대를 잡은 이유는 뭘까. 박종철 열사 추모식 다음 날이던 10일 새벽, 경기 하남에서 그를 만났다.

◇정치 얘기 끄고 올드팝 켠다

오전 5시 30분, 박씨는 집에서 20분 떨어진 서울 강동구의 택시 회사로 향했다. 사무실에서 출근 대장에 서명한 뒤 차고지에 있던 택시에 올랐다. 차량 단말기에 기사 출근 등록을 한 뒤 가장 먼저 하는 건 휴대폰으로 올드팝을 트는 일이다. 손님이 말을 걸기 전에는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려 들인 습관이다. 12시간 운전을 앞둔 그는 정장 차림이었다.


-정장을 입으셨네요.


“매일 정장 차림으로 출근합니다. 가끔 손님들이 불편하지 않냐고 물어보는데, ‘제가 손님 전속 기사니까요’라고 답합니다(웃음). 손님이 대우 받는 기분이 들도록 해야 저도 존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손님들과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나요.


“젊은 사람들은 정치 얘기 싫어해요. 정치 시사 라디오도 손님 앞에선 함부로 안 듣죠. 되도록 편안하게 있다가 가시라고 올드팝을 틀어놓습니다.”


-손님에게 먼저 ‘정체’를 밝히는 일도 없겠군요.


“그럼요. 완전히 ‘라떼(나 때)는 말이야’가 되는 셈이니(웃음). 물론 손님들이 먼저 정치 얘기를 꺼내면 대화는 나눕니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있어 이런 경우가 더 많아졌어요. 하루에 손님을 스무 팀 정도 태우는데 ‘경제’와 ‘방역’ 걱정을 많이 해요. 재난지원금은 표를 매수하는 반민주적 행위 아니냐고도 하고, 기준 없는 거리 두기를 하는 국가의 존재 이유가 뭐냐는 분들도 있고요. 손님들 중엔 저보다 맹렬한 투사가 많아요, 하하!”


-특별히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다면요.


“한번은 동대문에서 봉천동으로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는 손님을 태웠어요. 퇴근 시간대라 차가 막혀 요금도 2만원이 넘었죠. 손님이 갑자기 부산스러워지더라고요. ‘가진 돈이 2만3000원뿐인데 앞에서 내려주면 안 되겠냐’고 말했어요. 알고 보니 식당 주방장이었는데, 그날 일하던 식당이 문을 닫고 해고된 날이라더군요. 그 얘길 듣고 어떻게 돈을 받나요. 제가 손해를 보더라도 끝까지 모셔드렸지요. 이분 외에도 어려운 손님들이 많아요.”


-민심으로 대선 결과를 점쳐볼 수도 있겠군요.


“다들 누구를 지지하기보다는 반대 후보가 되어선 안 되는 이유, 명확한 분노 포인트를 갖고 있더라고요. 윤 후보에게는 가족 비리 문제, 이 후보에게는 대장동과 같은 대형 의혹 등이죠. 바람직한 상황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해요.”


-1년 전 택시 기사 일을 시작했더군요. 왜 하필 택시였나요?


“모르는 분들과 대화 나누는 게 좋아서요. 한번 제 택시에 탄 손님과 다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요.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이라 생각하니 손님들도 제게 스스럼없이 얘기하고. 작년 1월 3일부터 시작했는데, 소질이 좀 있는 것 같아 팔순까지는 할 계획입니다.”


-정치 활동 재개를 염두에 둔 건 아니고요?


“생계를 위한 것이지 정치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 낸 꾀는 아니에요. 정치 활동이라고 한다면 3번 낙선했으니, ‘마이너스 3선’ 아닙니까(웃음). 필요하다면 정치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장외에서 도와야지요.”


-서울대 나온 엘리트가 택시 기사를 한다고 하면 의아해하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은퇴하고 연금 받을 나이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뿐입니다. 전혀 부끄럽지 않아요. 민주화, 정의 이런 거 거창하게 외치면서 살아온 이제까지의 삶과 정반대라 좋은 것 같아요. 그저 손님이 있는 데로, 가자는 데로 가면 되더라고요.”


-택시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많이 버십니까.


“1년쯤 해보니 노하우가 생겼어요. 초기에는 하루에 4만5000원밖에 못 벌었는데, 카카오 택시 앱을 이용하면서 10만원, 20만원 버는 날도 생겼어요. 카카오 택시 유료 서비스에 가입하지 않고 앱만 깔아도 그렇더라고요. 카카오 택시가 콜을 몰아 준다는 논란도 있었지만 결국 손님을 최대한 배정 받으려면 콜 수락 버튼을 빨리 누르는 게 관건이죠. 비결을 알려드릴까요? 저는 스마트폰용 펜을 길게 늘여 항상 오른손에 끼고 있습니다. 기어봉 위에 손을 올려둘 때도 재빨리 누르려고요. 이만하면 대학 나온 밥값 하는 거 아닐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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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열사가 수배 중이던 박종운씨에게 내어준 목도리(위). 현재 서울 용산구의 민주인권기념관(공사 중)에 보관돼 있다. / 민주인권기념관 홈페이지

◇“오보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 독서실에서 아침 일찍 일어난 17일은 그날 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서 무심코 그 전날 저녁 신문을 펼쳐 들었다. 전신에 식은땀이 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람이 탁 치니 억 하고 죽다니, 또 설사 그렇다 쳐도 나 때문에 죽다니. 내 이름은 오보일 것이다. 오보여야 한다. 이렇게 머릿속에는 천 갈래 만 갈래의 생각이 오락가락했고 나는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만을 끄집어내려고, 아니 그것만을 생각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박종철 열사가 사망하고 2년 뒤 한 언론에 추모글을 발표했더군요. 1987년 1월 박 열사가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기 전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종철이 집에는 두 번 갔습니다. 당시 저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도발이(도피 생활자)’ 신세였는데, 처음엔 동료들에게 제 생사 여부를 알리려 종철이가 살던 신림동 하숙집에 방문했던 거예요. 그리고 제가 몸담고 있던 운동권 ‘CA그룹’ 조직원들이 안기부에 불법으로 연행되는 일도 벌어졌죠. 그래서 새로운 연락책과 접선하기 위해 종철이 집에 갔어요. 경찰에 이런 정보들이 들어갔고, 그해 1월 14일 대공수사단 형사들이 종철이를 잡아가 제 행방을 물으며 모진 고문을 한 겁니다.”


-박종철 열사와는 원래 알던 사이였나요.


“‘대학문화연구회’라는 서클에서 만난 후배예요. 제가 마지막으로 종철이 집에 갔던 1월 초, 대문을 나서는 저에게 ‘형님, 춥지예? 고생 많다’ 하면서 누나가 떠준 털목도리를 제게 감아주었어요. 옆방 친구에게 빌린 만 원을 지갑에서 꺼내 저한테 주기도 했고요. 알고 보니 종철이가 나중에 누나에게는 목도리를 잃어버렸다며 다시 떠달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정이 많은 후배였는데, 제가 그때 종철이 집에만 안 갔어도….”


-후배의 죽음을 알고 난 뒤 절망했겠네요.


“온 신문 활자, 온 세상이 ‘나 때문에, 나를 찾으려고 종철이가 죽었다’라는 말만 반복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책임을 제대로 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종철이를 죽인 군사 독재를 제대로 끊어내야겠다고. 죄책감과 무력감에 빠지는 대신, 존경을 담아 민주화를 이뤄내겠다고 결심했죠.”


-박종철 열사의 부모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종철이가 세상을 떠나고 2년 정도 지난 1988년 12월이 되어서야 제 수배령이 해제되었어요. 가장 먼저 종철이 부모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어머님은 ‘네가 종운이냐, 네 마음은 오죽했겠나’라며 제가 아닌 시대를 탓하셨죠. 그날 저는 종철이 부모님의 양아들이 되기로 했어요. 아버님은 2018년 7월 28일 돌아가셨는데, 요즘도 기일마다 묘소를 찾아뵙고 있습니다.”


-당시 경찰은 대학가의 하숙 골목부터 식당, 숙박업소 곳곳에 검문 인원을 두었다고 하던데요. 어떻게 한 번도 붙잡히지 않았나요.


“영등포구 대림동의 한 독서실에 숨어 지냈는데, 줄줄이 선 ‘ㄷ’ 자형 책상 위에 침낭을 펼치고 잤습니다. 학연, 지연, 혈연은 무조건 피해 은신처를 옮겼지요. 검문하는 경찰에게 먼저 다가가서 ‘○○로 가는 길이 어디죠?’ 묻기도 했어요. 설마 수배자가 자신들에게 먼저 다가올 거란 생각을 하겠나, 하면서요. 의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면 피하지 않고 제대로 쳐다보는 것도 비법이었습니다.”


-운동권이 된 계기가 있나요?


“대학 신입생 때 ‘사회대평론’이라는 서클에 가입했어요. 서클 선배들이 제 시각을 교정한다며 리영희 선생과 마르크스의 책을 읽게 했어요. 알고 보니 지하서클이었던 거죠. 정말 센세이션했습니다. 상품의 가치는 노동에 들어간 시간과 노력이 결정한다는 ‘노동가치설’이 제 인생을 바꿔놓았어요. 죽어라 읽고 토론하면서 시간을 보냈죠. 이런 모습을 보고 선배들이 제게 지도부와 조직을 맡겼습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했나요.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랬죠. 하지만 당시 우리의 민주주의는 마오쩌둥이 제기한 것이었어요. 서구처럼 부르주아에 의한 민주 혁명이 아니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신민주주의’지요. 군사독재를 몰아내고 민주주의가 오면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데 한 치의 의심도 없었어요. 그런데 후에 돌이켜 보니,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프롤레타리아를 이끄는 선동가들에 의한 독재라고 생각했어요. 결국 지배를 당하는 사람은 노예였고요. 이론과 현실은 너무 달랐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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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한나라당에 입당한 박종운(왼쪽에서 둘째)씨 모습. 같은 운동권 386세대인 정태근 전 연세대 총학생회장(왼쪽부터), 박씨, 고진화 전 성대총학생회장, 오경훈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이회창 총재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조선일보 DB

◇변절? 사회주의 반대가 민주화 배신은 아냐

박종운씨를 정계로 이끈 사람은 이부영 전 의원과 김충환 전 의원이었다. 김 전 의원은 1995년 강동구청장 재임 당시 박씨에게 비서실장직을 제안했다. 그리고 박씨는 2000년 한나라당에 입당하는데, 이때 운동권 386세대인 정태근 전 연세대 총학생회장, 고진화 전 성대총학생회장, 오경훈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도 함께했다. 그리고 그는 경기 부천 오정구에 공천을 받아 16·17·18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지만 모두 2위로 낙선한다. 이후 그는 <인간행동> <사회주의> 등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책들을 번역하며 ‘뉴라이트(New Right)’ 성향을 강화했다.


-우상호 의원이 “박종운씨나 우상호(고(故) 이한열 열사 선배) 같은 사람은 선택의 자유가 없다. 죽음을 안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라는 말을 했더군요.


“우상호 의원 말에 동의 못 합니다. 저는 민주화 운동 배신한 적 없습니다. 사회주의 반대가 변절이라 생각하진 않아요. 생각의 차이로 받아들여 줬으면 해요. 저는 종철이 죽음을 지고 가는 대신 올바른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우상호 의원, 이인영 통일부 장관, 임종석 전 비서실장 등 문재인 정부에서 권력이 된 386 운동권 출신 인사들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민주화 운동이라는 과거를 내세우면서 스스로 독재 세력이 돼버렸습니다. 정치, 경제, 외교 세 분야에서 판판이 실패를 거듭하고 있어요. 조국, 임종석 연루 의혹이 있는 울산시장 선거를 보세요. 부정선거의 종합판입니다. 집값은 또 어떤가요. 대출 규제로 부동산 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아서 집 없는 청년들이 10명 중 7명이에요. 외교는 오로지 북한만 쳐다보고 있죠. 이인영 장관의 통일부에서 만든 달력에는 김일성, 김정일 생일이 표시돼있어요. 같은 운동권이었다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과거 한 인터뷰에서 ‘반시장적 처사를 극복하는 것이 종철이 정신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말해 뭇매를 맞기도 했는데요.


“종철이였어도 저와 같은 생각일 겁니다. 시대가 변했다면 생각도 변해야지요. 수구 우익도 문제지만 수구 좌익도 문제입니다. 레닌이나 스탈린의 국가사회주의,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 때문에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죠. 그런데 현재 정권을 잡은 이들은 이런 결과물은 외면하고 갈수록 시장경제를 망치고 있어요. 여당인 이재명 후보의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이를 누르고 약한 이를 돕는다)이라는 캐치프레이즈도 이런 생각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 후신인 현 야당에 관해서는 실망이 없습니까.


“당연히 부족한 모습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을 펼쳤을 때 더 쉽게 수용 가능한 집단이라 봤어요. 윤석열 후보가 지난달 ‘정권 교체를 위해 부득이 국민의힘을 선택했다’고 해서 말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 표현에 동의해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데 100% 만족할 수 있는 정당은 없어요. 그래도 토론 가능성이 있고 싸워볼 여지가 있는 정당을 선택하는 거죠.”


-친이(親李) 인사들의 연구 모임인 ‘국가발전전략연구회’에서 사무처장을 지낼 정도로 이명박 대통령을 돕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 가까웠어요. 하지만 2000년대 초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행정수도 이전’ 문제에 대응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실망이 컸지요. 그때 이명박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행동력을 보여 존경하게 됐습니다. 유능한 정치인은 ‘시의적절한 때’에 ‘적극적인 실행력’을 보이는 게 관건이라 생각합니다.”


-박종철 추모 행사에 매번 참석하신다 들었습니다.


“매년 참석했어요. 코로나 탓에 추모식이 열리지 않았던 작년에도 혼자 묘소에 다녀왔지요. 제 정치적 성향 때문에 늘 크고 작은 소요가 있어왔죠. ‘물러가라’ ‘여기가 어디라고 오느냐’ 고함치는 사람들도 있고요. 어느 언론사에서는 저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반성 안 하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미안함을 갖거나 떳떳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로지 종철이 때문에 가는 거예요. 나를 찾는 이들 때문에 목숨을 잃은 종철이 때문에.”


-2개월 전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했습니다. 소식을 어떻게 접하셨나요.


“택시에서 잠시 쉬는 동안 휴대폰을 통해서 뉴스로 봤어요. 의외로 별 생각 안 들더군요. 한 시대가 갔다는 생각. 한 생이 끝을 맺었구나. 덤덤하게 딱 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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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운씨는 2000년 보수 정당인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변절자'라는 비난을 일부에서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종철이 죽음에 책임을 지는 일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군부와는 또 다른 형태의 파쇼

-군부독재 당시를 다룬 영화와 드라마가 많은데, 특히 영화 ‘1987′은 개봉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눈물을 흘려 화제가 됐습니다.


“어떤 위선도 끼어들 틈 없이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극적인 과장도 있었지만 구체적인 운동사를 그린 게 아니라 군사독재의 극악무도함을 보여주려 한 것이었으니, 이해 가능한 선이었고요. 영화에서 저 관련 내용은 종철이를 고문하는 형사가 ‘종운이 어딨어?’라고 묻는 장면이 다예요.”


-엄혹한 군사독재를 겪은 분으로서, 현재의 정치적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할 때 파시즘 세력이 나타납니다. 반드시 군대 몰고 단결을 강조하는 이들만 파쇼가 아닙니다. 현 정부에 드는 가장 큰 우려는 뭐든 국가가 권한을 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재난지원금이나 기본소득으로 개인의 노동 의지를 국가가 관리하려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대놓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표방하진 않지만, 각종 선심성 정책으로 대중을 매수하려 하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야당 대선 후보의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당내 자정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내부 분란이 생기면 신속하게 진화해야 하는데, 리더가 약하니 오히려 여당에 빌미만 제공해줬죠. 현재 필요한 리더십은 겸손하게 대선 후보를 돕는 것입니다. 윤 후보는 투사다운 본인의 모습을 더 강화해야 하고요.”


-올해는 박종철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35년이 되는 해입니다. 후배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고한 너를 끌고 가 형사가 차가운 물속에 너를 담가 대도, 끝까지 나를 지켜준 너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 온다. 종철아! 마지막으로 너를 보던 날, 네가 나에게 감아준 목도리를 끝내 돌려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네가 온몸으로 지켜낸 민주화 이후, 나는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너처럼 묵묵히 갈 뿐이다. 하늘에서 계속 지켜보고 격려해줘. 사랑한다.”


박씨는 가장 고마운 사람으로 그의 평생 동지인 아내 강희경(62)을 꼽았다. 그 또한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인물이다.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노운협)에서 파업 지원 활동을 하던 중 한 운동권 동료의 소개로 박씨와 만났다. 민주화 이후 박씨의 행보에 대해 ‘변절’이라며 온 세상이 야유해도 강씨만큼은 남편을 이해하고 지지했다. “가끔 제가 가는 길에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아내는 말 없이 제 어깨를 두드려 줬죠.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반자가 있다는 생각에 든든합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지요.”


신지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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