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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득한 국물에 그득한 건더기… 밥 한 공기, 술 한 병이 ‘순삭’

[아무튼, 주말 - 정동현의 Pick] 고추장찌개

조선일보

서울 한남동 '공기'의 목살고추장찌개./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설악산을 오르기 전 백담마을에 있는 작은 정육점에 들렀다. 그곳에서 돼지 목살 찌개거리를 샀다. 설악산을 거의 격주로 오르던 20대 후반, 매번 산장에서 끓여 먹던 라면이 지겨웠다. 그래서 고른 것이 고추장찌개였다. 땀에 흠뻑 젖어 산장에 도착하면 짐을 풀고 취사장 구석에 앉아 찌개를 끓였다. 산장에서는 모두 음식과 술을 나눠 먹었다.


어느 날 초로의 남자가 새우젓을 한가득 가져와 젓국찌개를 끓였다. 그가 나눠준 새우젓을 내 고추장찌개에 넣으니 맛이 한결 나아졌다. 그날 안주는 자연히 젓국찌개와 고추장찌개가 되었다. 한순배가 돌고 대청봉 일출 이야기가 나왔다. 언제 가야 일출을 볼 수 있다, 나는 언제 봤다는 유의 자랑과 조언이 오갔다. 조용히 앉아 있던 젓국찌개 주인이 입을 열었다. “자주 가면 보게 됩니다.” 떠들던 이들이 모두 입을 닫았다.


부산에서 자란 터라 어릴 적에는 고추장찌개 먹을 일이 많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온 뒤 알게 된 고추장찌개는 얼큰하고 진득한 맛 덕분에 저녁 한나절 보내기 딱 좋았다. 서울 충정로역 5번 출구로 나오면 펼쳐지는 작은 먹자골목의 ‘두툼’이란 집은 술안주로 먹는 고추장찌개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이상적인 모델에 가깝다.


고기 메뉴는 삼겹살과 목살, 항정살 등이 있다. 시작은 목살이 좋다. 손가락 한 마디가 넘는 목살을 숯불에 올리니 하얀 연기가 고기 주변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섭씨 200도를 훨씬 넘긴 불판 위에서 익은 고기는 겉이 과자처럼 바삭했고 속은 카스텔라처럼 촉촉했다.


식사로 주문할 수 있는 고추장찌개는 이 집의 분위기를 가득 품었다. 바글바글 끓는 고추장찌개는 감자 등 재료가 푹 익어 수프처럼 걸쭉했다. 찌개의 온도 때문인지 단맛은 적게 느껴졌다. 그보다는 혀를 태우는 매운맛과 그득한 건더기의 양감(量感)이 지배적이었다. 사람들은 기계장치처럼 고기를 입에 넣고 뜨거운 찌개에 밥을 비벼 먹었다.


신촌역에서 홍대역으로 가는 뒷골목에 ‘옛집’이란 식당이 있다. 빨간 처마를 두른 이 집은 여전히 예전 좌식 테이블 그대로다. 커다란 화분들이 군데군데 놓였고 큰 창으로는 밝은 빛이 시원하게 밀려들었다. 정다운 분위기만큼 음식들도 친숙한 모습이었다. 달콤한 소스가 올라간 돈가스는 고등학교 때 분식집에서 먹던 맛을 떠올리게 했다. 바삭한 튀김옷에 양파를 다져 넣은 소스를 넉넉히 뿌렸다.


돼지고기를 듬뿍 넣고 감자와 호박을 송송 썰어 끓인 고추장찌개는 빨간 빛깔을 보는 것만으로도 숟가락을 다시 잡게 만들었다. 국물이 고추장찌개답지 않게 둔탁하지 않고 시원했다. 국물과 건더기를 밥에 비벼 한껏 먹고 나면 잔잔히 혀 뒤로 매운맛이 올라왔다. 살가운 주인장은 테이블을 돌며 밥이 모자라지는 않은지, 반찬이 더 필요하지는 않은지 챙겼다. 그 덕에 밥 한 공기를 더 비웠다.


한남동으로 가면 언덕길 한쪽에 ‘공기’라는 집이 있다. 기와 올린 담장 너머에 있는 이 집은 점심과 저녁에 단품과 코스 요리를 각각 판다. ‘미나리새우전’은 청도 한재 미나리에 새우와 고추를 올려 기름에 지져냈다. 미나리는 질긴 부분이 하나도 없었고 밀가루는 최소한으로 들어가 맛이 산뜻했다.


그때그때 제철 재료로 지어 올리는 솥밥은 강원도산 말린 산천어를 굽고 밥 위에 올려 찐 다음 살을 발라냈다. 그 위에는 깻잎과 매실 장아찌를 섞어 올렸다. 밥을 한 숟가락 퍼서 입에 넣을 때마다 시원한 산바람이 몸을 감싸듯 상쾌한 느낌마저 들었다. 장아찌의 신맛과 단맛, 구운 산천어가 품은 고소하면서도 밀도 높은 육향이 하얀 밥알 한 알 한 알에 묻어 있었다.


곁들인 고추장찌개는 호박에서 우러난 수더분한 단맛이 차분한 목소리로 잔잔히 깔렸다. 둥그렇게 깎아 넣은 감자는 시냇가 조약돌처럼 반들반들했다. 구워서 넣은 돼지고기 목살은 이 집 주인장이 얼마나 섬세하게 재료를 다루는지 보여주는 모습 중 하나였다.


고추장찌개만 한 입 먹었다. 다음 한 입은 밥에 살짝 올려 먹었다. 또 다음 한 입은 밥에 고추장찌개를 푹 올려 비벼 먹었다. 예정된 포만감이 기분 좋게 차올랐다. 산에 오른 사람들이 모두 동경했던 일출처럼, 가득 차서 모자람이 없고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맛이었다.

# 두툼: 삼겹살·목살 각 1만6000원, 고추장찌개 6000원. (02)392-8592


# 옛집: 돈가스 9000원, 고추장찌개 9000원. (02)336-6782


# 공기: 저녁 코스 6만8000원, 미나리새우전 1만8000원, 목살고추장찌개 2만5000원. (02)797-7753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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