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안에 강렬한 타격감이 돌았다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숙성회
서울 공덕역 뒤 좁은 골목을 지나 언덕을 올랐다. 해가 아직 짧은 저녁, 고양이만 몰래 어슬렁거리는 그 길 한편에 밝은 조명이 간판을 비췄다. 벽에는 잉어로 보이는 커다란 생선의 부조(浮彫)가, 스테인리스 철판 위에는 ‘최문갑의 대물상회’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대물상회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른 것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였다. 이제 헤밍웨이, 톨스토이, 보르헤스같이 거대한 설산처럼 위대하고 장엄한 이름들은 더 이상 읽히지 않고 형용사나 관용사처럼 의미없이 소비될 뿐이다. 이런 시대에 ‘대물상회’라는 말은 나이 든 남자의 철 지난 낭만이나 순진한 꿈 같았다.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가니 일반 식당이라고 보기 어려운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중앙에는 작은 무대처럼 주인장이 서서 생선을 다듬고 썰어내는 도마가 있었다. 그 앞으로는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거대한 원목을 잘라 만든 테이블 두 개가 가로 세로로 놓였다. 가게 한쪽에는 주인장이 꽤 값을 치르고 얻었다는 자개장이 있었다. 주방쪽 벽에는 위스키가 도서관에 온 것처럼 빼곡히 들어찼다. 그 위스키 하나하나가 구하기 힘든 희귀품이었다. 주인장은 설산에 산다는 설인처럼 머리가 하얗고 체구가 컸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니 그저 마음 좋고 셈이 서툰 오래된 친구 같았다.
![]() 서울 공덕동 '대물상회'의 상차림.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메뉴는 고를 필요가 없었다. 주인장이 고른 생선과 해산물로 그때그때 차려주는 코스 메뉴 단 한 가지뿐이었다. 자리엔 커다란 자기 접시가 놓였다. 소금과 올리브유, 초장도 보였다. 음식이 빠르게 나왔다. 시작은 삶은 쥐치 간이었다. 풋풋한 초록빛이 감도는 이탈리아산 올리브유를 그 위에 넉넉히 뿌렸다. 아귀 간 못지않게 상품(上品)으로 치는 쥐치 간은 생선 특유의 단맛과 지방의 감칠맛이 말끔하게 떨어졌다. 상큼한 올리브유 덕분에 다른 양념이 필요하지 않았다.
곧이어 주인장이 큼지막하게 자른 광어 지느러미 두 점을 놓고 갔다. 주인장은 10kg 정도 되는 자연산 광어라고 넌지시 알려줬다. 작은 뼈 한 조각으로 공룡의 크기를 가늠하는 고생물학자처럼 기름이 잔뜩 낀 지느러미 살을 씹으며 광어의 규모를 상상했다. 근육과 지방이 교차로 들어찬 지느러미 살은 씹을수록 짙은 농도의 맛이 끝없이 배어나왔다.
주인장은 광어 지느러미를 씹는 사이 슬그머니 낙지무침 한 접시를 놓고 갔다. 데친 낙지에 쪽파, 미나리 등을 넣고 매콤하게 무쳐내 입안에 강렬한 타격감이 돌았다. 쪽파와 미나리는 봄을 맞는 듯 향긋한 기운에 힘이 돌았고 낙지는 부드럽고 쫄깃한 모순된 식감을 지니고 있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멈출 수 없는 젓가락질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주인장은 접시에 커다랗게 잘라낸 참돔회를 서너 점 놓고 갔다. 은은한 분홍빛이 도는 참돔회는 깨끗하다 못해 투명한 기운까지 돌았다. 입속에서 매끈하게 스쳐 지나가는 회의 단면 사이사이로 꽃향기를 닮은 달콤한 내음이 느껴졌다. 남은 낙지무침에는 하얀 소면까지 비벼 말끔히 비우던 찰나, 주인장이 준 것은 구운 가리비 관자였다. 두툼한 살점은 결결이 찢어지면서 버터처럼 농밀한 맛을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나갔다. 그 여세를 몰아 주인장은 살짝 불길에 그을린 참돔 뱃살과 광어 지느러미 살을 또 올렸다. 여기에 성게알 한 무더기와 감태, 그리고 올해 마지막이라는 자연산 방어 뱃살과 배합초를 섞은 흰밥 한 사발을 상 위에 내놓는 것이었다.
그 흰밥에 방어 뱃살을 올려 먹으니 기름진 맛과 신맛, 단맛이 하나로 어울리며 맛에 입체적인 양감이 생겼다. 이쯤 되니 주인장이 과연 장사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손님을 먹이는 것 그 자체에 흥미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주인장의 과감한 입도선매와 집요함으로 일궈낸 마치 옛 대영제국의 수장품 목록과 같은 희귀 위스키 메뉴를 보노라니 이 사내가 만들고 싶었던 세상은 또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 위스키와 어울리는 맛을 만들려고 생선회에 간장 대신 올리브유를 썼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끝내 산낙지와 미나리를 가득 넣고 끓인 연포탕을 먹을 때는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포구였지만 그 이름만 남은 마포의 한 구석 작은 가게에 나무 도마를 앉히고 술을 쌓아 놓고는 사람을 반기며 회를 써는 이 남자는 매일 같은 꿈을 꾼다. 커다란 물고기를 낚고 술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꿈, 그 속에는 낡은 낭만을 놓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 낭만의 다른 이름은 아마 이럴 것이다. 친구, 우정, 사랑, 혹은 그저 마음, 그렇게 시간 속에 증명되는 평범한 단어들은 너른 바다처럼 모자라지 않고 지나치는 법이 없으며 차오르고 또 차오를 뿐이었다.
#대물상회: 그날의 상차림 10만원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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