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의 나날들 "허송세월 쌓여 어느날 문득 좋은 이야기 나온다"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딸을 위한 그림책 ‘기다릴게 기다려 줘' 출간
"진심 담은 노래, 언젠간 연어처럼 대중에게 돌아올 것"
"천재 아냐… 나만의 페이스로 나만의 플레이할 뿐"
"서울대 보내는 엄마의 DNA는 없다… 방목으로 자란 어린 시절"
데뷔25년차 음유 시인 이적(46세). 적은 피리 적(笛)자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모티브를 땄다./사진=성형주 기자 |
방탄소년단이 음악계의 키워드가 된 요즘이지만, 여전히 이적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깜짝 놀란다. 철커덕 총구를 조준하듯 강렬한 발성의 작명, 잠자코 음표에 몸을 싣기보다 이야기의 충동으로 꿈틀대는 노랫말,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 가수, 여성학자 박혜란의 아들… 90년대 중반부터 그가 거쳐 간 그룹 패닉, 카니발, 긱스 등이 음악계에 남긴 흔적은 여전히 도발적이고 상쾌한데, 그가 벌써 사십 대 후반이다.
예리한 칼날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기 마련인데, 방송가 여기저기서 맹렬하게 활약하는 유희열이나 윤종신과는 다르게, 그에게서 여전히 ‘낯섦’과 ‘설렘'의 동시대성이 감지되는 건 왜일까. 역시나 삐딱한 두 글자의 이름 탓일까, 아니면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치른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던 히트곡 ‘달팽이'의 통역의 기억 때문일까.
이적을 만났다. 시간상으로는 딸에게 즉흥적으로 써준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든 ‘기다릴게 기다려 줘'를 출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는 이미 2005년 ‘지문사냥꾼'이라는 몽상적인 짧은 이야기책으로 베스트셀러작가 반열에 오른 바 있다. 출간 3개월 만에 10만 부를 돌파한 그 고딕풍의 환상문학에 대해 소설가 김영하는 ‘이적의 글은 장인적 노력이 아니라 내면에 숨어있던 괴물이 대신 써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라고 썼다.
검은 배낭을 멘 기자들이 맹렬하게 떠들며 오가는 광화문 카페 입구에서 그는 잠시 길을 잃은 ‘피터팬'처럼 머뭇거렸다.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은 공들여 손질한듯 단정했고, 점퍼와 검은 팬츠도 몸에 잘 맞았다. 남의 눈을 신경 쓰면서 자기 개성도 지켜내려는 프로다운 노력.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런 자신을 낯간지러워하는 기질이 뒤섞여 보석상 안에서 도드라진 광물을 보는 것 같았다.
‘싱어송라이터'로서 그는 단도직입적인 글, 못 배운 목소리를 좋아한다고 했다. 진심을 담은 노래는 언젠가는 대중에게 연어처럼 돌아온다고, 슈퍼스타의 꿈은 접었지만 죽기 전에 좋은 노래 한곡은 꼭 쓰고 싶다고, 변화무쌍한 음악계에서 롱런할 수 있었던 건 ‘자기만의 페이스대로 자기만의 플레이를 했기 때문'이라고 풀피리 불듯 말했다.
-이적이라는 이름은 세월이 흘러도 강렬합니다. 무슨 뜻인가요?
"본명은 동준이에요. 발음이 너무 동글동글해서 세 보이고 싶은 마음에 ‘적'이라고 지었어요(웃음). 적은 ‘피리 적(笛)’자예요. 제가 되고 싶은 게 피리 부는 사나이였어요. 모든 근심을 해결해준다는 신라 시대의 피리 ‘만파식적'도 있지만, 사실 제가 매료됐던 건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예요. 그게 음악이 지닌 마술적인 힘이라고 생각했어요."
-역시나 서늘하군요(웃음). ‘패닉'의 이적에서 시작해, 대중음악이 찬란하게 무르익었던 90년대를 관통했어요. 기분이 어떤가요?
"빛나는 분들이 있었던 시절이죠(웃음). 저는 그저 변방 어딘가에서 조용히 지나온 기분이에요. 아직 ‘이적'이라는 이름으로 노래하면, 제 무대를 찾아와주는 분들이 있으니 감사하죠. 95년에 데뷔했으니 제가 올해로 25년 차 가수예요."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가요톱10’에 나와 ‘나는 왼손잡이야'를 외치며 춤추던 청년이 어느새 중년이 됐다. 함께 활동했던 김동률, 유희열, 타이거JK, 임창정… 아직 살아남아 노래하는 자들에게 전우애를 느끼는 나이가 되었다고 그가 나지막이 회고했다. 그 25년간 자신이 주인공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잘 나가던 ‘패닉'때조차도 앨범 판매량이나 콘서트 모객에서 신해철, 이승환의 신드롬에 한참 못 미쳤다고 첨언하며.
-그들과는 다른 트랙에서 달렸으니까요. 그 시절 우리가 열광했던 퀸과 ‘보헤미안 랩소디'가 전국에 다시 울려 퍼질 땐 어떤 감회가 들던가요?
"하하. 요즘엔 포장마차에서도 퀸의 노래가 나오던데요. 아직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못 봤어요. 저는 다들 달려가면 혼자 머뭇거리는 습관이 있어요. 큰 공연을 할 때의 엑스터시야 잘 알죠. 모두가 하나가 된 것 같은 제의적인 무엇. 하지만 전 소극장 공연도 아주 좋아해요. 노래가 맨살에 닿는 느낌, 피아노 건반, 기타 한 줄이 튕겨나가 관객의 호흡에 닿죠."
-‘보헤미안 랩소디'는 파격적인 가사로 유명하죠. 결이 다르지만, 당신이 쓴 노랫말을 처음 들었을 때도 생경했어요. 70년대에 ‘산울림'의 김창완이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라고 난데없이 던지듯 노래할 때의 충격처럼… ‘말하는 대로’ 노래가 되고 그 노래가 사회적이고도 개인적인 메시지로 다가온다는 게 산뜻하더군요.
"(손사래를 치며)아유… ‘보헤미안 랩소디'의 가사야말로 대단하죠. 저는 뭐랄까, 가사보다는 늘 화성을 신경 썼어요. 가사는 오선지 위의 토핑 정도로 생각했죠. 스튜디오, 믹싱, 마스터링 등 작곡은 공정이 정말 복잡해요. 가사는 필 받으면 단번에 써 내려가거든요. 그래서 같은 저작권료를 받으면 ‘좀 불공평하지 않나?’ 그랬을 정도죠(웃음). 나중에야 그 힘을 알았어요. 사람들은 가사가 좋은 곡에 반응하는구나."
반항적 모범생의 얼굴. ‘달팽이’ ‘왼손잡이'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 ‘하늘을 달리다’ 등의 노래는 음악과 가사 양측면에서 대중음악의 예술적 외연을 넓혔다./사진=성형주 기자 |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이지요? 아웃사이더 시각의 성찰적인 노랫말이 그 영향이라고 생각했는데요.
"하하.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면 작가가 되거나 기자가 됐겠죠. ‘왼손잡이' 같은 노래가 그런 흐름에 부합하지만, 그것도 제겐 음악의 일부였어요."
-25년간, 가수로 살아보니 어떤가요? 기자나 작가보다는 흥이 있는 일이지요?(웃음).
"그럼요. 좋아서 택한 일이고 여전히 좋아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직업이 먹고 살기 힘든 일인데, 여전히 먹고 살 수 있으니 감사하죠."
-다행이군요.
"다행이죠. 음악 잘했던 선후배들이 시장에서 배제되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찾는 사람이 적어진다거나 장르가 비대중적이라는 이유로. 제가 그들보다 음악을 잘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에요. 시대와 적당히 잘 맞아떨어졌을 뿐."
-노래에만 머물지 않고 다양하게 탤런트를 분출했기 때문이겠지요. 최근에 당신이 낸 그림책을 봤어요. ‘기다릴게 기다려 줘'라고. 간결하고 깊고 아름다운 책이더군요.
"딸아이가 종이 몇 장을 스테이플러로 찍어서 가져왔어요. "아빠, 이 종이를 채워줘." "그래? 뭐가 나왔으면 좋겠어?" "별!" 그래서 즉흥적으로 백지를 채웠는데, 그 이야기가 나쁘지 않았어요. 곡을 쓸 때와 비슷해요. 몇 달을 머리카락 뜯을 때보다, 쓱 가볍게 쓴 게 좋을 때가 있죠."
‘우주의 외톨이 별이 핼리 혜성을 만나 76년 만에 한 번씩 우정을 맺는다’는 몇 줄의 스토리와 대충 그린 그림은 SNS에서 인기를 얻었고, 곧이어 ‘눈 밝은' 편집자가 그에게 연락했다. 마침 그에겐 할아버지의 죽음에 관해 쓴 짧은 이야기가 한 편이 더 있었다. 두 개의 이야기는 ‘기다릴게 기다려 줘' ‘어느 날'이라는 두 권의 그림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이진희 작가가 그림을 그린 '기다릴게 기다려줘'는 76년만에 헬리 혜성이라는 친구를 만나는 외톨이 별의 기다림을 그렸다. 먼저 나온 '어느 날'은 죽음을 소재로 그린 성찰의 그림책. |
-아동용인데도 시야가 넓고 깊어요. 우주에서 바라봐서 그럴까요?
"그렇죠. 우주적 호흡으로 보면, 인간의 시간 따윈 불면 날아가는 먼지 같잖아요. ‘어느 날'은 ‘어느 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로 시작해요. 죽음을 이야기할 때 ‘돌아가셨다’고들 하잖아요. 아! 할아버지는 우주에서 왔나 보구나. 그래서 존재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구나, 그렇게 이해하면… 두려움도 덜하지 않겠나 싶었어요."
-2005년에 출간한 판타지 픽션 ‘지문사냥꾼'의 경우 출간 3개월 만에 10만 부를 찍었고, 16만 부 이상 판매된 거로 압니다. 단도직입적으로 ‘훅’을 때리고 ‘잽'을 날린 후 빠지는 기이한 환상 콩트에 대중이 열광했지요. 동시대성과 개인성의 핏이 이렇게 잘 맞기도 힘듭니다. 당신에겐 그런 ‘한방'의 리듬과 촉이 있는 것 같은데요.
"음…(미소지으며)저는, 때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어요. 대학 시절부터 썼던 짧은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내고 싶었어요. 그때 홈페이지에 ‘적메일'이라는 형식을 만들어서 비정기적으로 제가 쓴 글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발송해줬어요. 책으로 내자는 제안을 듣고도 도망갔는데, 또 묵혀놓으면 그 ‘핏'이 흐트러질 것 같아서… 음악처럼 이야기도 바로 그때의 동시대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작가'가 아닌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라고 했지요?
"네. 이야기를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좋아해요. 생각해보면 제가 지은 노래 중 ‘달팽이'도 이야기고 ‘말하는 대로'도 이야기 설정이 있죠. ‘불꽃놀이'도 그렇고 ‘다행이다'라는 노래도 마음을 다루잖아요."
음악과 이야기의 적(籍)을 전방위적으로 두는 이적의 환타지 픽션 ‘지문사냥꾼'. 귀파주는 남자, 스스로 연주하는 피아노 등 기이하고 짧은 이야기 12편이 들어있다. |
-어떤 글을 좋아하나요?
"핵심으로 빨리 들어가는 글, 날카롭고 유머가 있는 글을 좋아해요."
-본인이 쓰는 글이군요.
"하하하. 그렇죠. 카프카처럼 씁쓸하고 엉뚱한 비틀림이 있는 이야기가 제 취향이에요."
-어떤 목소리를 좋아하지요?
"못 배운 목소리요."
-못 배운 목소리라니요?
"누가 들어도 보컬 트레이너가 붙어서 만든 목소리는 재미가 없잖아요. ‘얘는 대체 어디서 배워먹어서 이렇게 노래를 하니?’라는 느낌이 드는 예측불허의 목소리. 예컨대 김창완 선배님처럼 훈련이 안 된 놀라운 목소리에 반해요. 어린 목소리로는 오혁처럼 툭툭 내뱉는 그런 목소리에 끌리죠."
-본인의 목소리는 만족스럽습니까?
"예전에 나영석 PD가 그랬어요. "형이 못 배운 목소리 중엔 제일 잘하는 것 같다"고. 하하하. 저는 보컬리스트로 훈련이 안된 사람이에요. 요즘은 실력이 좀 늘어서 곧잘 불러요(웃음). 보통 20대 전성기를 지나면 표현력이 떨어지는데, 저는 못 배운 목소리다 보니 조금씩 깊고 넓어져요."
-싱어송라이터라는 정체성에 최적화되어있네요.
"곡도 만들고 노래도 쓰고(웃음)... 혼자서 구현하는 재미가 쏠쏠해요."
요즘 트렌드와는 맞지 않는다고 했다. 최근 팝의 경향은 작곡과 작사의 분업이 분명하다고. "리듬과 멜로디도 파트별로 분업해서 시너지를 만들죠. 큰 기획사는 ‘쏭캠프'라고 해서 2박 3일 동안 노르웨이, 미국, 한국 작곡가들이 함께 쿵작쿵작 하면 세상에 없던 희한한 곡이 나와요."
-기억나는 협업이 있나요?
"MBC ‘무한도전'에서 재석이 형(유재석)이랑 장단이 맞아서 좋은 작업을 했어요. 80년대 댄스곡 느낌으로 ‘압구정 날라리'라는 노래를 만들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형이 원했던 댄스의 한을 제가 풀어줬죠. 저는 또 저대로 그때 ‘말하는 대로'를 만들었는데, 두 곡 다 너무 만족스러워요."
-언젠가 유재석 씨가 방송에 나와 "이적은 내가 모르는 천재적인 면이 있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동의하나요?
"하하. 천재는 말도 안 되고요. 매 순간 ‘이건 아니잖아'라고 한숨 쉬며 자폭할 때가 훨씬 많아요. ‘와! 좋은데'하고 자뻑하는 순간은 아주 가끔 와요(웃음). 다행이죠. 허송세월이 시간 낭비가 아닌 게, 그 시간이 쌓여 한 번씩 좋은 게 나온다는 게."
문득 그가 쓴 동화 ‘기다려줘 기다릴게'를 노래로 만들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뮤지컬 ‘헤드윅'의 ‘오리진 오브 러브'처럼 별과 우주의 회오리로 가득 찬 ‘동요 오페라’가 나오지 않을까. 역시나 20대부터 음악극을 하고 싶었다고 꿈을 들킨 소년처럼 웃었다.
이적을 보면 사람은 소년에서 어른으로 키가 크듯 위로 자라는 게 아니라, 동심원으로 점점 확장되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른이라는 완충재가 아이의 보드라운 잠재력을 품고, 더 멀리 지그시 동심의 보호막으로 퍼져나가는 느낌. 그렇게 우리 몸의 성장판은 나이 들면 응고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소용돌이로 점점이 흩뿌려질 뿐이라고 선언하는 이적의 나날들.
이적의 적(敵)은 이적 자신이다. 독창적인 가사를 설득력 있게 전달할 뿐 아니라 장르적인 구획 없이 자유자재로 악보를 써내려가는 이적은 스스로를 넘어서기 위해 성실하게 투쟁 중이다./사진=성형주 기자 |
세 아들을 서울대 보낸 것으로 유명한 그의 어머니, 여성학자 박혜란은 마흔에 공부를 시작했고 교수가 됐다. 일찌기 세간의 호기심에 ‘서울대 보내는 엄마의 DNA는 없다'고 일침을 가했듯,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방목했다'고 한다.
-언제 내가 방목되고 있다고 느꼈나요?
"초등학교 때 비가 오면 교문 앞에 엄마들이 우산을 들고 서 있잖아요. 저희 엄마는 한 번도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온 적이 없어요(웃음). 그러면 제 반응은 "울 엄마 안 와? 서럽네"가 아니라 "울 엄마 멋있다"였어요. 어찌 보면 저희 모자가 같은 ‘과'인데, 저는 엄마가 저를 애가 아니라 독립적인 어른으로 존중했다고 느꼈어요. 그래, 이왕 젖은 거 흙바닥에서 신나게 놀자 했죠. 그게 지금껏 멋진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그거 아세요? 아이들도 자기를 독립적으로 인정한다는 느낌이 들면 금방 캐치하고 뿌듯해해요. 방치하고는 달라요. 저는 딸들도 그렇게 성실하게, 존중해줘요. 어려운 말도 최선을 다해 설명해가면서요. 아이가 자랄수록 부모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아요. 부모는 유전자를 전달하는 통로, 잠깐의 대리인이니 부디 저는 아이의 발목이나 잡지 말자는 거죠."
-성인이 되어서 만난 어른 중에는 누가 기억에 남습니까?
"데뷔 후에는 ‘긱스 밴드'를 했던 정원영 씨를 참 좋아했어요. 그 형이 저보다 14살이 많은데도 위계가 없었어요. 다 음악 하는 친구로 대해줬죠. 가끔 제가 뮤지션이 아니라 ‘업자' 마인드로 전락한다 싶을 때, 원영이 형을 생각해요. 그 순간 ‘아차, 나는 음악 하는 소년이었지’ 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어요."
-그래도 내 노래가 사랑을 못받을 땐 마음이 많이 흔들릴 텐데요.
"처참하게 안 된 앨범도 있죠. 다행히 그때는 제가 또 다른 걸 하고 있어요. 제 원칙이 시장의 성적만 가지고 속끓이지 말자,예요. 남 흉내 내지 말고, ‘나만의 게임을 계속하자'는 거죠. 90년대는 3백 만장 씩 앨범을 팔았지만 지금 몇십 만장 팔아도 저는 만족해요. 멜론 차트를 기준으로 두면 저는 정말 작은 구멍가게거든요. 그런데 당장 순위가 끝이 아니에요. 대중가요는 운 좋으면 다시 발견돼요."
-어떤 곡을 가장 사랑합니까?
"역시나 ‘달팽이'와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라는 곡이 애착이 가요. ‘거짓말'은 2013년 멜론 차트 1위를 했어요. ‘다행이다'도 처음엔 안됐다가 다시 사랑받았고, ‘걱정말아요 그대'라는 곡도 잊혔다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삽입돼서 히트를 했잖아요. 김동률 씨와 같이했던 ‘거위의 꿈'은 리메이크로 생명을 얻었고."
-좋은 곡은 언젠가는 발견된다는 희망이 있군요.
"그럼요. 당장은 모르지만, 그런 믿음이 있어요. 신곡 ‘나침반'도 지금은 잠잠해도 내후년엔 또 부르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웃음). 진심에 닿는 노래는 어떤 계기를 통해서든 연어처럼 대중에게 돌아와요. 좀 기다려줘야 되는 거죠."
문득 ‘기다릴게 기다려 줘'라는 그가 쓴 그림책 제목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예전에 나영석 PD가 그랬어요. 형이 못 배운 목소리 중엔 제일 잘하는 것 같다고. 하하하.”/사진=성형주 기자 |
-요즘 음악 동료들과는 어떤 고민을 나누고 있지요?
"어떻게 음악을 선보여야 할까. CD를 내야 하나, 종신이 형처럼 월간(월간 윤종신)으로 발행할까, 우리끼리 회사를 만들어야 하나, 곡을 쪼개서 내야 하나 나중에 한꺼번에 내야 하나… 변혁기에 사는 모든 사람의 고민입니다."
-급변하는 시류 속에서 여직껏 어떻게 살아남았습니까?
"뭔가를 쫓아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골방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내 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셈이에요. (한참 생각하다)내 페이스대로 가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어요. 대중의 취향을 고려 안 하면 가수라고 할 수 있나? 반면 오락가락하면 그게 또 무슨 아티스트인가? 나름 팔랑귀라 그 중간에서 열심히 줄타기를 해야 했어요(웃음). 남의 평가와 내 평가 사이에서 갈등할 땐 ‘나만의 룰’을 따랐어요. 정신 승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자기만의 페이스로, 자기만의 플레이를 하는 거죠."
-후회되는 일은 없나요?
"후회는 잘 안 해요. 더 좋은 곡을 못 쓴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어요."
-비틀스가 되고 싶었나요?
"아니요. 저는 제 깜냥을 알아요. 슈퍼스타가 되는 건 멋진 일이죠. 유재하 선배조차 죽기 전까지는 슈퍼스타가 꿈이었다죠(웃음). 조용필 선배나 BTS는 하늘이 정해준 사람들이에요. 저는 슈퍼스타의 꿈은 접었지만 제가 지닌 다른 영향력을 알아요. 그래서 죽기 전까지는 진짜 좋은 곡을 쓰고 싶어요."
조용필 같은 슈퍼스타도 나훈아 같은 국민 가수도 아닌지라, 스스로 무대에서 뛸 수 있는 시간은 15년 정도. 그때까지 차일피일 미루지 않고, 창작자로서 부지런히 살고 싶다는 이적./사진=성형주 기자 |
-당신은 이미 썼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그걸 모를 뿐.
"아니요. 진짜로 못 썼어요. 죽기 전까지 쓰는 게 꿈이에요. 그 곡 하나로 내 인생이 의미 있었다, 라고 할만한 곡. 아주 소박한 노래일 수도, 아주 복잡한 노래일 수도 있는 그런 곡이요."
그 표정이 너무 간절해보여 더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자신은 지금 ‘질풍노도의 시기'를 건너고 있다고 했다. 어쨌든 우리가 지난 9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는 불안의 긴 터널을, 이적의 매력적인 피리 소리를 들으며 건너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때론 세상이 뒤집어진다고 나 같은 아이 한둘이 어지럽힌다고 모두 다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그런 눈으로 욕하지마.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난 왼손잡이야’-‘왼손잡이’ 중에서
‘나 스무 살 적에 하루를 견디고 불안한 잠자리에 누울 때면 내일 뭐 하지 내일 뭐 하지 걱정을 했지.(중략).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단 걸 눈으로 본 순간 믿어보기로 했지.’-‘말하는 대로' 중에서
[김지수 대중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