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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이용재의 필름위의 만찬] “젓지 않고 흔들어서” 시대와 함께 달라진 제임스 본드의 칵테일

[아무튼, 주말] ‘007′의 베스퍼 마티니


“드라이 마티니. 고든스 진 3, 보드카 1에 키나 릴레 2분의 1 비율로. 얼음에 흔들어 섞은 뒤 얇고 큼직하게 저며낸 레몬 겉껍질을 곁들여서.” 그의 느긋하면서도 자세한 칵테일 주문에 테이블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다. “그거 괜찮겠는데. 저도 같은 거 부탁합니다.” 바짝 긴장했던 도박꾼들도 007을 따라 마티니를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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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카지노 로얄’을 통해 007 프랜차이즈(시리즈)가 재가동됐다. 6대 007인 대니얼 크레이그의 캐스팅은 상당한 논란거리였다. 숀 코너리나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넌 등 선대 007에 비하면 확실히 ‘덜 느글거리는’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막상 ‘카지노 로얄’이 개봉되자 회의론은 쑥 들어가 버렸다. 기름기가 쫙 빠진 데다 요상한 비밀 무기에 크게 기대지 않는, 일신한 007이 이 시대 분위기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기름기가 회전구이 통닭처럼 쫙 빠진 덕분에 마티니의 존재감이 오히려 빛난다. 사실 007의 마티니는 한 가지가 아니다. ‘카지노 로얄’의 마티니는 1953년, 동명의 원작 소설에서 처음 등장한다. 제임스 본드가 특수요원 007로 거듭나는 ‘오리진 스토리’에서 원작자 이언 플레밍은 이 마티니에 등장인물의 이름을 붙인다. 이중 첩자이자 본드 걸인 ‘베스퍼'(에바 그린)다.


베스퍼 마티니와 별개로 007은 ‘보드카 마티니’도 즐겨 마신다. 보드카와 화이트 베르무트를 3대1로 섞고 “젓지 않고 흔든(shaken, not stirred)” 뒤 잔에 담는다. 녹색 올리브 세 알을 꿴 꼬치를 고명으로 얹는다. 이 마티니는 ’007 골드핑거'(1964년)에 처음 등장해 고전 칵테일로 자리 잡았다.


사람이라면 곧 칠순일 베스퍼 마티니도 그동안 변화를 겪었다. 일단 핵심은 조주 방식이다. 요즘 칵테일계에서는 007의 전매 특허인 ‘젓지 않고 흔들기’가 마티니에 최선이 아닐 거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술과 얼음을 젓는 건 잔에 담아 젓개로 휘젓는 반면, 섞기는 셰이커에 담아 전체를 격렬하게 흔든다. 따라서 섞기의 움직임이 훨씬 격렬하고 술의 온도도 훨씬 더 빨리 내려간다. 다만 격렬함 탓에 얼음이 녹아 술이 희석된다거나 부서져 완성된 칵테일에 쪼가리가 남을 수도 있다.


베스퍼 마티니에 표정을 불어넣는 술인 키나 릴레도 변화를 겪었다. 릴레(Lillet)는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화이트 와인에 다른 리큐어를 섞어 향을 더하고 도수를 높인 술이다. 이언 플레밍 시대에 릴레는 말라리아 치료제이기도 한 키니네(quinine)로 쓴맛을 냈고, 키니네의 원료인 키나나무의 이름이 붙어 ‘키나 릴레'였다. 요즘은 키니네의 쓴맛을 줄이고 단맛은 좀 더 키운 ‘릴레 블랑(Lillet Blanc)’이 대신한다.


베스퍼 마티니는 집에서도 시도해볼 만큼 간단한 칵테일이다. 게다가 젓는 게 낫다니 셰이커 없이도 만들 수 있다. 007의 주문은 보드카를 특정하지 않지만 ‘스톨리치나야’가 가장 잘 들어맞는다는 게 중론. ‘카지노 로얄’이 출간된 1953년 스위스 베른 무역 박람회에서 금메달로 데뷔했을뿐더러, 007이 좋아하는 ‘감자 아닌 곡물(밀과 호밀)로 만든 보드카’이기도 하다.


세 술을 얼음 잔에 담고 티스푼 등으로 30초 정도 가볍게 저어준 뒤 다른 잔에 옮겨 담는다. 채소 필러로 벗겨낸 레몬 겉껍질을 담으면 베스퍼 마티니가 완성된다. 3:1:½의 비율만 지키면 되지만, 40도 이상 독한 술 위주의 칵테일이니 과음은 금물. 대형마트에서 고든스 진은 2만원대, 릴레 블랑과 스톨리치나야는 3만원 후반~4만원대에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다.


[이용재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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