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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월악산 풀은 내게로 와서 나물이 되었다

[아무튼, 주말]

[양세욱의 호모 코쿠엔스] 충북 충주 ‘영화식당’

새해를 수안보 온천에서 맞았다. 연말연시에는 온천을 즐겨 찾는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아스라한 기억 때문일까. 온천물에 몸을 담그면 근원을 알 수 없는 안온함이 온몸에 전해온다. 온천욕을 마치고 먹는 음식은 달콤하다. 일본 규슈의 온천 도시 유후인이나 벳푸 료칸들의 가이세키야말로 지금껏 맛본 최고의 일본 음식이었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 온천에는 산채 전문점 ‘영화식당’이 있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수안보 일대는 예전 모습 그대로다. 대형 워터파크에 밀려난 우리 온천들은 활로를 모색 중이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의 무대이자 주인공 성우(박해일·이얼)의 고향인 수안보는 20여 년 전 필름 속 풍경 그대로 박제된 듯 보였다. 성우가 이끄는 4인조 밴드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추억의 가요들을 부르며 공연을 펼치던 와이키키 관광호텔은 개봉 이듬해인 2002년 문을 닫았고, 이름에서도 경쟁 의식이 느껴지는 ‘와이키키’의 라이벌 경남 창녕의 부곡하와이도 2017년부터 영업을 중단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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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가지 산나물과 인삼 튀김, 더덕 무침, 된장찌개로 구성된 '영화식당'의 산채 정식. 접시마다 반찬 이름이 적혀 있다. /양세욱 제공

노천탕에서, 족욕길에서 묵은 피로를 풀고 난 수안보 방문객들은 꿩고기 코스 요리와 산채 정식 사이에서 갈등한다. 1983년 개업한 뒤로 40년 동안 수안보를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 ‘영화식당’의 산채 정식(2만원)은 회, 샤부샤부, 만두, 초밥, 꼬치 등으로 구성된 꿩고기 코스 요리의 유혹을 이겨낼 만큼, 어쩌면 다른 관광지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되돌려 세울 만큼 매력적이다.


산채 정식을 주문하자마자 너른 식탁에 20여 가지 형형색색 반찬들이 깔린다. 삼지구엽초, 머우, 산뽕잎, 검은오리 나무 잎, 홋잎, 고들빼기, 잡나물, 쐐똥, 아주까리잎, 싸리순, 취나물, 삼나물, 어느리, 다래순, 씀바귀, 박고지, 두릅, 고사리 같은 산나물은 지척 거리에 있는 월악산이 키웠다. 아는 이름이 절반, 생소한 이름이 절반이다. 산나물은 봄철 월악산 일대에서 채취한 뒤에 냉동하거나 말려서 쓴다. 직접 담근 간장, 된장, 기름 등 최소의 양념으로 무친 산나물에서는 저마다의 맛과 향이 작렬한다.


삼지구엽초에서는 삼지구엽초의 쌉싸름함이, 머우에서는 머우 특유의 구수함이, 더덕에서는 더덕이 아니면 넘보기 어려운 알싸함이 입안 가득 폭발한다. 절제된 양념으로 식재료 고유 풍미를 최대치로 끌어내는 고수의 솜씨다. 다른 자리였다면 주연으로 손색이 없었을 돼지불고기나 도토리묵이 초라할 지경이다.


산채 정식에는 인삼 튀김, 옻순 튀김도 포함된다. 새끼손가락 굵기 인삼이 아니라 엄지손가락보다 굵은 인삼 한 뿌리를 통으로 튀겨낸다. 이 인삼 튀김의 바삭한 식감과 알싸한 잔향은 식사가 끝난 한참 뒤까지 입안을 맴돈다. 이렇게 20여 가지 반찬들이 차례차례 펼치는 향연을 음미(吟味)하고 나서야 콩밥과 된장찌개로 시선이 향한다.


갓 지은 밥은 윤기가 맴돌고, 냉이가 듬뿍 들어간 된장찌개는 향이 진하다. 산나물과 된장찌개를 곁들여 절반쯤 밥을 비우고 난 뒤, 나머지는 별도의 비빔 그릇에 고추장을 곁들여 비벼 먹었다. 비빔 그릇에도 나물이 가득하다. 한 가지씩 음미하는 산나물이 독주(獨奏)라면, 한꺼번에 비벼 먹는 산나물 비빔밥은 오케스트라다. 여러 향과 맛이 때로 스미고 때로 경쟁하며 멋진 하모니를 이룬다. 누룽지 한 그릇을 들이켜가며 남김없이 비워진 그릇들을 마치 사열하듯 훑어본다.


산채 정식에 제공되는 모든 접시에는 반찬 이름이 적혀 있다. 물론 손글씨가 아니라 도자기를 주문 제작하면서 프린팅한 글씨다. 테이블마다 수십 개에 이르는 그릇을, 다루기 쉬운 멜라민 그릇 대신 음식을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도자기 그릇을 쓴 것만으로도 정성이 충분하지만, 그릇마다 전사된 이름을 되새기며 음미하는 산나물은 그 맛이 배가된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산뽕잎’을 부르면 산뽕잎의 향이, ‘검은오리’를 부르면 검은오리의 향이, ‘어느리’를 부르면 어느리의 향이, ‘홋잎’을 부르면 홋잎의 향이 어느새 입안에 맴돈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 것처럼, 봄날 월악산의 어느 양지바른 자리에 움튼 풀들은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내게로 와서 나물이 되어 주었다.


[양세욱 인제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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