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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조선일보

“禁女의 벽 깬 30년… 다시 태어나도 여자, 공무원이 되겠다”

[아무튼, 주말] [김아진 기자의 밀당]

’여성 최초’만 여섯 번째

김경희 기획재정부 국장


기획재정부에는 여성 차관보, 여성 차관, 여성 장관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여성 국장도 없었다. 김경희(54) 개발금융국장은 이곳에서 금녀(禁女)의 벽을 연파하고 있다. 사무관, 서기관, 과장, 부이사관, 심의관, 국장까지 ‘여성 최초’ 타이틀만 여섯 번째다. 2017년 복권위원회 사무처장이 됐을 때는 기재부 신설 68년 만에 첫 여성 국장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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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밤 10시,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가 열리고 있는 인천 송도에서 김 국장을 만났다. 약속 시각보다 한 시간 늦게, 김 국장은 양손에 가방과 서류를 잔뜩 들고 헝클어진 머리로 뛰어왔다. 치료를 미뤄 상처가 덧난 발등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부총리 보고가 늦어져서요. 정말 너무너무 미안해요.” 지난 30년 동안 ‘월화수목금금금’을 살았을 그의 공무원 인생이 스쳐 지나갔다.


김 국장은 1994년 공직에 발을 들였다. 기업에선 여자를 뽑지 않았고 여자는 대학을 나와도 취직 대신 결혼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행정고시에 합격한 김 국장은 여자로선 처음으로 기재부를 택했다. 이후로도 5년간 기재부엔 여자 사무관이 없었다. 그만큼 경쟁은 치열했고 환경은 혹독했다. “외로운 섬처럼 고립돼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00년 이후부터는 깜짝 놀랄 만큼 여자가 늘어났죠. 지금 우리 국에 과장 5명 중 2명이, 사무관은 절반이 여성이에요.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어요. 기업도 다른 부처도 여성 인재가 엄청 많죠.”


김 국장은 “이 인터뷰가 ‘라떼는 말이야’가 될까 봐 매우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래도 언론은 그가 승진할 때마다 ‘여성 최초를 또 갈아치웠다’고 써왔다. 남자보다 독하다고도 평가했다. “아들은 엄마한테 40점 정도 주더라고요. 과락(科落)이란 얘기죠. 아내로는 60점은 받을 것 같아요. 그런데 공무원으로는 80점 정도는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그만큼 열심히 살았어요.”


“그 많던 똑똑한 여자들은 어디로 갔나”


-90년대에 어떻게 고시를 볼 생각을 했나요.


“가장 공정한 길을 선택한 거예요. 좁은 길이었어요. 기자가 되거나 공사 입사도 생각했는데, 여성으로서 시험으로 공정하게 평가를 받는 건 고시라고 봤어요. 공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요. 사회에 기여하고 봉사하고 싶었어요.”


-영문과를 나왔는데 행정고시를 봤습니다.


“그때는 똑똑하고 공부 잘하면 영문과에 가야 한다는 말이 있었어요. 들어가서 경제학도 법학도 공부해보니 너무 재밌는 거예요. ‘잘못 탄 기차가 때로는 목적지에 데려다 준다’는 말 있잖아요? 그렇게 운명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연이 필연이 돼서 벌써 공무원 30년 차에 접어들었네요.”


-왜 기재부를 택했나요.


“당시 행정고시 합격자 250명 중 여자가 10명이 안 됐어요. 여자 동기 중 유일하게 기재부를 택했는데, 그럴 용기와 소신을 갖고 있었어요. 각오도 돼 있었고요. 다들 어려운 길이라고 했죠. 경제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시골에 살면서도 한국의 대일본 무역역조 현상에 격분하면서 ‘나중에 내가 해결해야지’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그 시절엔 감히 내가 기재부 공무원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사무관 시절은 어땠나요.


“아득한 옛일이네요. 1994년, 스물여섯에 사무관이 됐는데 대기업에서 대졸 공채 여자를 안 뽑던 시절이었어요. 지금 보면 말도 안 되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막상 사무관이 됐을 때는 정말 놀랐어요. 박완서 소설 제목처럼 ‘그 많던 똑똑한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생각했죠. 5년 뒤쯤인가 기재부에 여성 사무관이 들어왔으니 5년은 혼자였습니다.”


기재부도 여성 시대...“이젠 여자라 자랑스러워”


-금녀의 벽을 깨면서 온 30년이지요.


“그런 얘기는 참 조심스러워요. 주변에서 ‘여자라서 힘들었다며?’라고 공격하기도 하고, 반대로 ‘여자라서 혜택받은 게 더 많잖아?’란 말도 하거든요. 요즘은 여자여서 너무 자랑스러운 세상이 왔네요.”


-여성에게 엄격하던 시절을 견뎠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사무관 때 서기관 승진을 하고 싶어서 열심히 했는데, 한 상사가 ‘여자가 월급이나 타면 되지 무슨 승진이냐’고 핀잔을 주더라고요. 그냥 듣고만 있었죠. 뭐라고 하겠어요(웃음). 승진만 하려고 하면 뒤에서 욕이 들렸어요. 그래도 견뎠죠. 평생 잊지 못할 거 같아요. 그래서 책잡히지 않으려고 남자들이 하는 건 다 했습니다. 유학도 가고 국제기구 파견도 갔죠.”


-차별이 있었다고 느꼈나요.


“그런 생각은 안 했고 ‘내가 부족한가’로 귀결됐어요. 엄마, 아내 등 여러 역할을 하려니 역풍을 맞으며 앞으로 달려가는 돛단배 같달까. 애는 쓰는데 최고가 못 된다는 자괴감에 휩싸이기도 했죠.”


-’바지만 입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사무관 때는 그랬어요. 여자 사무관도 없었고, 여자가 사회생활하는 것에 관대하지 않았어요. 화장도 할 줄 몰랐고요. 회색, 검은색 무채색 옷만 입었습니다. 눈에 띄지 않고 조직에 그냥 동화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남자들과 똑같은 사무관으로 인정받고 싶었어요. 술도 폭탄주 10잔씩 다 받아 먹고. 철이 없었어요. 하하.”


-생각이 변한 계기가 있었나요.


“30대였나. 미국 연수를 가서 넓은 세상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니 달라진 거 같아요. 여성성을 긍정하게 됐어요. 미국 로스쿨은 절반이 여성이었죠. 힐러리 클린턴, 콘돌리자 라이스도 멋진 여성이었어요. 나중에 IMF 총재가 된 크리스틴 라가드, 미 연준의장이던 재닛 옐런, 독일 전 총리 메르켈 등도 다 그 시절 활동하던 여성이죠. 아름답고 유능한 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여성성을 추구하는 게 나쁜 게 아니었어요. 그때부터 치마도 입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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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우먼은 아니었다”


김 국장은 지난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눈물이 ‘철철’ 났다고 했다. 일은 열심히 했는데 엄마로, 아내로, 딸로, 며느리로는 어땠는지 돌아보면서 남편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고. 김 국장 남편 이강호씨는 기재부에서 복지부로 넘어가 1급 고위공무원을 하다 작년에 퇴직했다. 지금은 카이스트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기재부 1호 사무관 부부였다면서요.


“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웃음). 기재부에 들어와 연애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직장에 든든한 내 편이 있는 게 너무 좋았어요.”


-남편이 ‘김경희 남편’이란 소릴 많이 들었겠어요.


“그 말이 가슴 아파요. 저보다 인품, 실력 면에서 훨씬 뛰어난 사람이거든요. 어릴 때부터 퀴리 부부를 꿈꿨어요. 결말(불륜)이 충격적이라 나중에 생각이 바뀌긴 했습니다만. 노벨상도 같이 타고 학문적 성과를 같이 나눌 수 있는 협력적 동지 같은 사람과 결혼한 거죠. 남편은 늘 저를 응원해주고 격려해줘요.”


-육아는 어땠나요.


“전재희 전 장관이 어느 자리에서 ‘밤 12시에 끝나도 집안일을 다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수퍼우먼이 되긴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도 아니고요.”


-매일 야근을 했지요?


“정말 월화수목금금금 생활이었어요. 사무관 2년 차에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았거든요. 연년생으로 아들만 둘이에요. 도저히 키울 수가 없었어요. 육아휴직 제도는 없었고 출산휴가만 2개월이었거든요. 그래서 친정(경남 통영)에 맡겼어요. 훌륭한 사무관이 되고 싶어서. 그런데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 시절은 다 그랬죠.


“둘째가 다섯 살 때 부부가 미국 유학을 가게 되면서 함께 살기 시작했어요. 그때 남편까지 네 식구가 처음으로 식탁에 모여 식사를 했는데, 울컥하던 기억이 나네요.”


-스스로를 자랑스러운 엄마라고 생각하나요.


“최근에도 둘째 아들은 ‘나는 엄마가 없었어’라고 하더라고요. 가슴이 무너져요. 첫째는 밤늦게 제가 들어왔는지 침실을 빼꼼 열어보기도 해요. 제가 할 일인데 반대가 된 거죠. 평생 AS(애프터서비스)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육아와 업무, 뭐가 더 어려웠나요.


“질문이 참 어렵네요. (잠시 침묵) 결과로 보면 육아가 더 힘들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소중한 몇 년이 있었는데 너무 바빠서 손을 못 잡아준 게 두고두고 남아요. 그 시간은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지금 사무관들에게는 ‘업무도 열심히 하고 제도도 잘 활용해 일과 가정, 양립을 하라’고 조언합니다.”


“내 발전이 나라 발전...내가 한국 대표”


-기재부 공무원 일은 잘 맞았나요.


“처음엔 모든 게 신기했죠. 초임 때 법무담당관실에서 경제장관회의, 국무회의 안건을 정리하고 검토하는 일을 했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부족한 제가 국가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설렜죠.”


-‘여자라서 잘나간다’고 시기하진 않던가요.


“하하. 아무도 질투하진 않았어요. ‘여성 최초’를 많이 달긴 했지만 그렇다고 동기들보다 승진이 빨랐던 건 아니에요.”


-힘이 돼준 선배도 있었죠?


“허용석 전 관세청장요. 육아에 허덕이고 일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을 때가 있었어요. 용기를 내도록 힘을 주셨죠. 뭘 더 잘해준 게 아니라 공정하게 대해줬어요. 일은 엄청 시켰지만. 여자라고 봐주는 건 없었어요.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한 것 같아요. 윤증현 전 장관은 ‘듣는 귀’를 가지셨어요. 안 되는 업무 보고도 끝까지 다 듣고 ‘노(No)’를 했어요. 본받고 싶은 분이에요.”


-가장 잘한 일은 뭔가요.


“2015년쯤 역외 소득 자진 신고 기획단 부단장을 하면서 엄청난 성과를 냈어요. 해외 소득을 역외에 해두고 국내 과세를 회피하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그런 은닉 재산을 국내로 정상 반입시켰죠. 한시법을 만들어 가산세와 처벌을 면해줬어요. 금송아지도 내 손안에 없으면 아무 소용없잖아요. 그 계기로 역외 발생 소득을 매년 신고하는 제도가 정착됐어요. 과장 때 일이네요.”


-유명인들이 많이 걸렸겠네요.


“대외비예요. 하하. ‘비밀 유지’가 조건이었어요. 평생 함구할 겁니다.”


-또 생각나는 성과라면.


“리먼 사태에 따른 금융 위기 이후 노후 차 폐기하고 신차를 사면 개별 소비세를 깎아주는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했어요. 보조금을 주는 건 금기시했는데 ‘친환경’이란 개념을 처음 붙였어요. 프랑스에서 비슷한 걸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서 따왔죠. 자동차가 악성 재고까지 다 팔릴 정도로 판매량이 늘었고 위기 후 경제가 급반등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영어, 중국어가 유창하다던데요.


“귀에 못이 박이게 들은 말이 ‘기재부 공무원은 이코노미스트를 읽어야 한다’였어요. 그래서 가까이 뒀어요. 파이낸셜타임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질 못하는데, 완벽하지 않지만 영어와 중국어는 자신있어요.”


-즐거워 보이네요.


“개발금융국장이 된 후 화상으로 하는 국제회의에 참석을 많이 해요. 시차 때문에 밤샘을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는 모든 안건에 다 발언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한국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지금 가장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임팩트가 없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개도국과 경제협력을 하고 우리 기업들의 해외 진출을 도와주는 건 재밌어요.”


-요새는 공무원이 인기가 없다는데요.


“공직에 대한 가치는 항상 변하고 달라질 수 있어요. 그것도 존중합니다. 공공 부문보다 민간이 더 많이 발전해야 하는 것도 맞고요. 우수한 인재가 그쪽으로 가는 건 좋다고 생각해요. 선진국도 다 그렇고요.”


-기재부 사무관들도 우수한가요.


“기재관 사무관들은 재능뿐 아니라 국가에 봉사할 마음까지 흠잡을 데가 없어요. 처우가 개선돼야 할 여지가 더 있고, 세종시에 내려와 살아야 하는데도 정말 기특하고 대단해요. 전국에 계신 어머님, 아버님, 인생 작품인 딸, 아들을 사무관으로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공무원을 할 건가요.


“당연하죠. 여자로 태어나도 공무원을 할 거예요. 김영삼 전 대통령이 ‘나의 발전이 나라의 발전’이라고 했잖아요. 하하. 지금도 그런 생각으로 일해요. 내가 잘해야 한다고. 국제사회 등 최일선에선 제가 대한민국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기재부 여성 차관, 여성 장관도 나올 때가 됐어요.


“네. 저도 여자라서가 아니라 실력으로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꿈은 꿔볼 수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가능하면 국제기구에서 일해보고 싶어요. 우리나라 국격은 엄청 높아졌는데 생각보다 고위직에 한국 여성이 별로 없거든요. 꿈이니까 ADB 부총재도 해보고 싶고, 더 나아가서 OECD 대사도 해보고 싶네요.”


인터뷰는 자정을 훌쩍 넘겨 새벽 2시쯤 끝났다. 김 국장은 다시 보고서를 폈다. “내일 미팅이 줄줄이 잡혀 있고 모레는 VIP(대통령)가 오는 행사라 바짝 긴장해야 한다. 체크할 게 많아서 잠을 못 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대한민국 공무원이다. “저는 지금이 가장 좋아요. 애들도 다 컸고 핑계가 없어요. 예전에는 모래주머니를 달고 달렸는데 이제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계속 공부하고 또 고민해야 합니다.”


[김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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