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의 끝판왕’ 양곱창 구이, 왜 자갈치시장서 태어났을까
[아무튼, 주말]
자갈치시장은 어떻게 양곱창 구이 총본산 됐나
달아오른 석쇠에 양곱창을 올리자 “치지직 치지직” 하며 울었다. 양곱창 표면에서 땀방울처럼 솟아난 기름이 석쇠 아래 연탄 위로 똑똑 떨어졌다. 연탄불이 “파바박” 소리를 내며 힘차게 일어났다. 시뻘건 불길이 양곱창을 덮쳤다. 희뿌연 연기와 고소한 냄새가 뭉글뭉글 피어올라 사방으로 퍼졌다. 기다란 나무 의자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손님들이 연신 양곱창을 집어 입에 넣었다. 소주잔이 빠르게 비워졌고, 소주병이 빠르게 늘어났다. 보기만 하는데도 침이 꼴깍 넘어갔다.
◇대화재와 선원들
지난달 23일 찾은 부산 자갈치시장 양곱창 골목은 한국 양곱창 구이의 총본산이다. 350여m 세 블록에 걸친 골목에 양곱창집 300여 곳이 밀집해 있다. 양곱창 식당가로는 국내 최대 규모. 골목에 들어서면 연기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진동한다. 눈 감고도 후각만으로 킁킁거리며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양곱창은 ‘양’과 ‘곱창’을 합친 말이다. 양은 소의 4개 위 중에서 첫 번째 위를, 곱창은 작은창자를 뜻한다. 자갈치시장 양곱창집 골목에서는 양과 곱창 말고도 소의 4번째 위인 ‘막창’과 큰창자인 ‘대창’, 심장인 ‘염통’ 등 다양한 부위를 섞어 한 접시로 낸다.
양곱창의 탄생지가 어딘지는 명확하지 않다. 음식 칼럼니스트 박정배씨는 “부산 자갈치시장이 전국에서 양곱창을 처음 외식 메뉴로서 판매한 곳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대중 음식이 대부분 그러하듯 구체적 근거는 찾을 수 없어요. 하지만 옛날 신문을 검색해 보면 ‘부산에는 양곱창이라는 특별한 맛이 있다’는 기사가 나오고, 서울을 포함한 전국 여러 도시의 유명하다는 양곱창집은 하나같이 상호에 부산이 들어갑니다. 양곱창의 고향이 부산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요. 그리고 부산에서 제일 먼저 양곱창을 구워 판 곳이 자갈치시장 뒷골목입니다.”
양, 곱창, 대창 등 소 내장은 육식 요리의 종착점이랄 수 있다. 그런 양곱창이 어떻게 부산에서도 바다와 맞닿은 자갈치시장에서 태어났을까. 부산 음식에 해박한 시인 최원준씨는 “1950년대 화재 때문”이라고 했다.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와 국제시장 대화재가 연이어 발생하는 등, 50년대 부산에는 큰 화재가 많았습니다. 인명과 재산 피해가 막대했죠. 그러다 보니 정부에서 꼼장어구이집, 생선구이집 등 화구를 쓰는 가게들을 바다와 인접한 자갈치시장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양곱창집들이 자갈치시장에 자리 잡은 배경이죠.”
최 시인은 “본래 자갈치시장 뒷골목은 작부집이 흥청대던 곳이었다”고 했다. “수산업 경기가 한창 좋았던 1970년대만 해도 원양어선을 타는 선원들이 현금을 마대 자루에 담아서 배에서 내렸죠. 많은 선원이 양곱창 골목에 있는 작부집에서 돈을 탕진했답니다. 그러던 것이 80년대 수산업 경기가 안 좋아지자, 하나둘 양곱창집으로 업종을 변경해 오늘에 이르렀지요. 바다에서 생선 비린내만 맡던 선원들이 육지에 발 디디면 얼마나 육고기가 먹고 싶겠습니까. 양곱창은 싸고 맛있는 동물 단백질이었기에 이곳에서 짠물에 젖은 목젖을 씻었지요.” 인근에 산재한 관공서 공무원들도 양곱창 골목 단골이었다. 법원과 시청 공무원들이 양곱창 한 점에 소주 한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양곱창-재일교포 커넥션
1990년대가 되자 일본인들이 양곱창 골목으로 몰려왔다. 엔고(円高) 시대가 무르익으며 일본인들의 부산 방문이 잦아졌다. 이때 빠지지 않고 들르던 곳이 양곱창집이다. 양곱창은 일본, 그리고 재일교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박정배씨는 “양곱창 등 내장을 먹는 육식 문화는 한국이 일본에 알려줬지만, 양곱창 외식화는 재일교포에 의해 이뤄져 국내로 역수입됐다”고 했다.
양곱창은 재일동포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었다. 아니, 살기 위해 먹을 수밖에 없었다. 에도 시대 일본인은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을 하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문화가 들어오면서 육식을 시작했지만 살코기만 먹고 내장 등 부속물은 전부 버렸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재일교포들은 일본인이 먹지 않고 버린 부속물을 주워다 깨끗하게 씻어 먹었다. 일본인들은 “우리가 안 먹는 더러운 곱창 같은 걸 주워 먹는 조센징”이라며 조롱했다. 일본에서 양, 곱창 등 내장 구이를 흔히 ‘호루몬야키(ホルモン焼き)’라고 하는데, ‘버리다’라는 뜻의 ‘ほる(호루)’와 ‘물건·것’을 뜻하는 ‘もの(모노)’가 합쳐져 만들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던 양곱창은 이제 일본에서 보양식으로 손꼽힌다. 최 시인은 “양곱창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관동대지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당시 많은 일본인이 굶어 죽었는데, 조선인은 통통하니 살이 올랐다는 소문이 돌았답니다. 전후 일본 식품학자들이 연구해보니 당시 일본인은 먹지 않던 소 내장에 우수한 영양 성분이 다양하게 함유돼 있었다는 거죠.”
규슈, 히로시마를 중심으로 일본인도 양곱창을 보양식으로 널리 먹으며 지역 향토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일본에서 비싼 돈을 줘야 먹을 수 있는 양곱창을 부산에서 싸게 먹을 수 있다고 알려졌고, 자갈치시장 양곱창 골목은 일본인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4대 이은 골목 터줏대감
‘백화양곱창’은 자갈치시장 양곱창 골목의 터줏대감이다. 11개 점포가 공장 창고처럼 커다란 건물 안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 중에서 1호점이 자갈치시장에서 양곱창을 제일 먼저 팔기 시작한 집이다. 백화양곱창 1호점은 창업자인 고(故) 김초달 할머니의 딸인 이구자 씨에 이어 그의 딸 김시은(59) 씨가 3대째 운영하고 있고, 김씨의 딸인 최정인(32) 씨가 4대째 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김시은씨는 “1호부터 11호까지 주인이 모두 다르다”고 했다. “한창 때는 이 건물 안에 17호점까지 있었어요. 조그맣게 생계형으로 양곱창을 구워 팔던 게 굳어졌지요. 6·25 직후라 가게를 따로 크게 낼 능력들도 없었고요. 수산시장처럼 제비뽑기를 해서 위치를 바꾸거나 하지는 않아요. 가게마다 단골들이 있는데, 자리를 바꾸면 헷갈려 하거든요. 이 좁은 데서 세간을 들고 옮기기도 힘들고요.”
김씨는 가게 창업 연도를 1963년이라고 했지만, ‘부산역사문화대전’에는 “주류 회사인 백화양조(현 롯데주류)의 후원으로 1959년 현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6가 32번지에 백화양곱창을 개업하였고, 명칭도 후원사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나온다. 최 시인은 “창업자를 인터뷰해 기술한 내용이라 부산역사문화대전이 틀리진 않았을 것”이라며 “김초달 할머니가 양곱창을 구워 판 건 1959년부터이고, 정식 영업 등록을 1963년에 하지 않았을까 싶다”고 했다.
김씨는 “김초달 할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해방 후 한국에 돌아왔다가 6·25가 휴전한 뒤 양곱창집을 열었다”고 했다. 외식으로서 양곱창이 재일교포에 의해 개발돼 한국으로 역수입됐다는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사실이다. “따로 배울 데가 없어서 그냥 시행착오 겪으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잘못해서 버리고. 그렇게 양곱창 요리하는 법을 터득하셨답니다.”
양은 깨끗하게 씻어서 물에 3시간가량 담가 둔다. “그래야 잡냄새가 빠져요. 그런 다음 빙장(氷藏), 그러니까 얼음에 재워놔야 돼요. 양곱창의 육질이 살아나죠. 락스 쓰냐고도 물어보는데 전혀! 그러면 큰일 나죠! 밀가루도 쓰지 않아요.”
김씨는 “처음에는 지금처럼 사치스럽게 구워 먹기보다는 전골로 더 많이 먹었다”고도 했다. “손님들이 내장 많이 넣고 야채 넣고 끓여서 국물 떠 먹고 또 육수를 추가로 부어달라고 해서 먹었죠. 고기는 비싸니까 국수 사리 같은 거 넣어서 배를 채웠고요. 맛을 찾기보다는 배고픔 달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다 차츰 형편들이 나아지면서 구이 비중이 커진 거죠.”
김씨가 주방에서 초벌구이한 양곱창을 가져다 석쇠에 올렸다. 소금구이는 소금과 후추, 다진 마늘, 참기름으로 가볍게 간해 양곱창 자체의 맛을 살린다. 양념구이는 너무 맵지 않으면서 달달한 양념이 양곱창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드시기 직전에 양곱창을 석쇠 위에서 앞뒤로 천천히 굴리면 육즙이 뽀글뽀글 만들어져요. 이때 드시면 더 맛있게 즐길 수 있어요. 양은 오독오독한 식감이 관자 같아서 좋아하는 골수팬이 많아요. 곱창은 안에 고소한 곱이 들었고요. 대창은 대장을 뒤집어서 겉에 붙은 지방이 안으로 들어오게 손질한 건데요, 아가씨들은 맨날 다이어트 한다면서 대창을 좋아하지요. 염통은 쫄깃쫄깃한 식감이 기막히고요.”
최 시인이 곱창 한 점을 간장·설탕·다진 마늘을 섞은 양념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입가에 미소가 스르르 번졌다. “영혼과 맞바꿀 만한 맛이네요.” 모두가 동의하며 소주잔을 들었다.
[부산=김성윤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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