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밤에 성곽길·박물관 가봤나요?… 달빛 아래 걷다보면 코로나 블루 치유
언택트 여행… 야간 산책 코스
경기도 수원화성 성곽을 사이에 두고 걷는 시민들. 야간엔 무료 개방한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
코로나 사태로 걷기나 자전거 여행, 캠핑, 등산 등 이른바 '언택트(비대면) 여행'이 유행이다. 특히 특별한 훈련이나 장비, 경제적 투자 없이 튼튼한 다리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유산소운동인 걷기 여행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일부 지자체에선 코로나 사태로 시민의 떨어진 체력을 증진시키고자 걷기 장려 캠페인을 벌이는 중. 때마침 고궁 등 문화 시설의 야행(夜行), 야간 개장도 기지개를 켰다. 코로나 사태 속 인파를 피해 조용히 거리 두며 걷는 맛을 느낄 수 있는 '산책 맛집'을 찾았다. 느리게 걸으니 비로소 보이는 풍경들.
화성행궁 품은 성곽길 걷기
커다란 보름달이 내려앉은 듯 대형 보름달 조명이 설치된 경기도 수원 화성행궁은 달빛 아래 사부작거리는 발걸음 소리마저 운치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밤마실을 허락해준 행궁(行宮) 안에선 청사초롱 불빛들이 반갑게 마중 나왔다. 지난 27일 시작한 '경복궁 별빛야행', 28일 시작한 '창덕궁 달빛기행'에 앞서 20일 야간 개장을 시작한 경기도 화성행궁 관람객은 대부분 마스크를 착용하고 조용히 행궁을 거닐었다. 첫날 야간 개장에 다녀간 관람객은 360여 명. 코로나 사태 속 언택트 방식으로 운영돼 별도의 공연이나 해설, 체험, 스탬프 투어 프로그램은 없었지만, 관람객들은 '보름달 포토존' 등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하며 달빛 가득한 고궁의 고즈넉한 밤을 즐겼다. 즐거움도 잠시, 수원문화재단 측은 28일 "정부의 '수도권 내 다중 이용 시설 운영 한시적 중단' 긴급 지침에 따라오는 6월 14일까지 운영을 잠정 중단한다. 이후 코로나 대응 상황에 따라 재개장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화성행궁이 임시 휴장에 들어간 아쉬움은 수원화성 성곽길에서 달래보자. 화성행궁을 둘러싸고 있는 수원화성 성곽길도 달밤 산책 코스로 인기다. 은은한 야간 경관 조명이 어두운 성곽길을 인도하듯 이어진다.
지난 20일 야간 개장을 시작했던 수원 화성행궁은 28일 발표한 코로나 사태 긴급 정부 지침에 따라 6월 14일 이후에 재개장한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
수원화성 성곽길 둘레길 코스는 전체 5.7㎞ 총 3시간 소요된다. 화성행궁에서 '서장대'로 올라가는 가파른 구간을 제외하고 대부분 평지거나 완만한 언덕과 내리막 구간이 지루할 틈 없이 이어진다. 한양도성길에 비해 걷기도 한결 수월하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서장대는 수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 걷는 재미가 있고 볼거리가 있는 구간은 '팔달문'에서 '창룡문' '연무대'를 거쳐 야경 명소인 '방화수류정' 부근 '용연'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창룡문 부근엔 수원화성 성곽길을 상공에서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대형 열기구 '플라잉수원'이 기다린다. 직접 탑승 체험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구경만으로도 짜릿하다. 너른 잔디밭을 품은 연무대도 버스 등 대중교통 이용하기가 수월해 만만한 나들이 장소다. 동북각루를 데칼코마니처럼 비추는 용연은 그림자를 투영한 사진을 찍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발걸음이 이어진다. 최근 용연 부근 행궁동엔 카페, 식당 등이 하나둘 문 열며 '행리단길'이란 별칭의 길이 뜨고 있다. 유명한 '수원 통닭 거리'도 지나치면 아쉽다.
수원화성 성곽길은 야간 무료 개방한다. 공연, 해설 및 체험 프로그램은 코로나 대응 상황에 따라 추후 유동적으로 운영할 예정이다. 수원화성 성곽길 스탬프 투어도 당분간 운영하지 않는다.
야외 정원서 유물 관람, 야경은 덤
야간 경관 조명이 켜지는 야외 정원이나 조각 공원, 전시장엔 볼거리가 있어 걷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은 해가 지고 나면 박물관 야외 정원에서 '산책 특별전'이 시작된다. 박물관 조명은 달빛이 대신하고 음향은 새, 풀벌레가 담당한다. 달빛을 받은 석탑, 대숲에서 우연히 만나는 불상은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자연 그대로 정원에 전시된 크고 작은 유물들을 보다 보면 '감상'보다는 '조우'하는 기분이다. '석조물정원'엔 신라시대에 만든 국보 제99호 김천 갈항사 삼층석탑을 비롯해 고려 때 만든 국보 제100호 '남계원 칠층석탑', 보물 제2호인 '서울 옛 보신각종' 등이 기다린다.
달빛 아래 석조물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정원'.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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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 사이를 걷다보면 바람결에 밀려온 인동덩굴 향기에 홀려 자동반사적으로 마스크를 내리게 된다. 작정하고 꽃과 풀 구경하러 나온 이들도 있다. 관람객 정도윤(50)씨는 "박물관의 조경이 잘돼 있어서 요즘 같은 계절엔 거의 매일 밤마실을 나온다"며 "한강 등 일반 공원 산책로도 좋지만 조경을 잘 꾸며둔 정원을 걸으면 근사한 기분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정원 곳곳은 한국 전통 정원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박물관 앞 '거울못' 둘레길을 따라 걷는 것도 색다르다. 박물관 건물의 네모난 프레임 너머 보이는 남산 서울타워 야경 사진과 거울못에 비친 박물관, 청자정의 '그림자 사진'을 찍는 게 야간 관람 필수 코스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거울못'의 야경.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
낭만적인 전설이 전해지는 '미르폭포'는 해가 완전히 지고 난 후엔 조금 으슥하다. 그럼에도 몰래 숨어 들어가는 커플들도 목격된다. 미르폭포를 지나 오솔길을 빠져나가면 '용산가족공원'과 만난다. 평일 밤엔 한적해 고독함마저 느껴진다. 박물관의 '배롱나무못'을 품은 숨은 산책로 '박물관 오솔길'은 밤보단 낮을 추천한다. 해가 지면 다소 어둡고 길이 잘 보이지 않아 걷기에 위험할 수 있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후 9시까지 연장 운영하는 박물관 야간 개장 땐 좀 더 활기찬 밤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다만 국립중앙박물관 역시 코로나 상황에 따라 내부 관람 시설 운영에 변동이 있을 수 있다. 자세한 운영 여부는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참고.
폐철길 따라 걷다 만나는 '불빛 정원'
지난해 말 서울 '경춘선숲길' 산책로에 조성한 '노원 불빛 정원'의 '불빛 터널'. / 박근희 기자 |
2000년대 초까지 대학생들의 MT 단골 코스인 춘천행 경춘선 기차가 달리던 옛 경춘선 철길은 경춘선숲길이라는 이름으로 걷기 명소가 됐다. 서울 노원 녹천중학교 인근에서 시작해 공릉동을 관통하고 옛 화랑대역을 지나는 약 6㎞ 구간의 산책로다. 주말이면 철길 산책로를 따라 걷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폐철길 따라 길이 잘 닦여 있고 가로등이 띄엄띄엄 이어져 늦은 밤에도 거리를 두고 걷는 이가 많다. 등록문화재 제300호인 '옛 화랑대역' 일대는 철도 공원으로 꾸몄다. 지난해 말 화랑대역 철도공원 3만8000㎡ 부지, 400여m 구간을 노원불빛정원으로 조성했다.
서울 공릉동 '경춘선숲길' 구간에 있는 '노원 불빛 정원'의 이색 조명. / 박근희 기자 |
'불빛 터널', LED 조형물, 3D 매핑 등 조명 구조물과 야간 경관 조형물이 볼거리다. 불빛 터널을 지나 만나는 '음악 정원'에선 '라라랜드' 등 영화 OST부터 클래식까지 음악에 맞춰 춤추는 조명 쇼를 감상할 수 있다. 얼룩말, 사슴 등 동물 조명은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누구든 불빛 정원에 들어서면 '인증샷' 한번 진하게 남겨두겠단 생각에 저절로 휴대전화를 꺼내 드는 풍경이다. 물론 이곳 역시 생활 속 거리 두기 캠페인 문구가 곳곳에 쓰여 있다. 관람객 임윤정(40)씨는 "코로나 사태로 밤 시간대엔 불을 꺼 놓은 곳이 많아 아쉬웠다. 산책로를 걸어 불빛 정원에 들어서니 안도가 느껴지면서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점등 시간은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일몰 후부터 오후 10시까지. 무료 개방.
장미원, 녹지대 낀 걷기 코스
걷기 마니아들에겐 한강을 빼놓을 수 없다. 강을 따라 잘 닦인 길을 막힘 없이 걸어볼 수 있다. 공원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 야간 조명이 자정이나 일출 전까지 어두운 밤을 밝힌다. 서울 양화한강공원과 뚝섬한강공원엔 장미원이 있다. 장미가 만발한 요즘 놓치면 아까운 길이다. 선유도 공원은 선유교의 조명이 들어와 야경이 아름답다. 버스로 오갈 수 있는 것에 비해 탐방객이 많지 않아 밤 산책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오은선 한강사업본부 테마산책길 개발운영담당 주무관은 지난해 새로 선정한 역사 탐방 코스인 서울 마포 난지꽃섬길도 걸어볼 만하다고 했다. '월드컵경기장역'에서 출발해 '문화비축기지' '하늘공원'의 유아숲 개천 일대를 돌아보고 육교인 월드컵교를 통해 '평화의공원'으로 간다. 각 구간 8차선의 큰 대로를 건너거나 대로변을 걸어야 하지만 서서울의 굵직한 공원과 녹지대를 곁에 두고 걸을 수 있다. 이 코스는 야경 코스로도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난지꽃섬길 코스 전체 구간을 걸으면 서너 시간 소요된다. 밤에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구역을 나눠 공원 위주로 걸어보길 추천한다. 옛 마포석유비축기지를 재생한 복합문화공간 문화비축기지는 '매봉산 산책길'과 연결돼 있다. 특히 비 온 날 밤 찾는다면 풀 냄새가 진동하는 산책길을 오롯이 고독을 즐기며 걸어볼 수 있다. 하늘공원 오르는 길과 달리 완만한 경사의 산책로를 몇 바퀴만 걸어도 몸속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때에 따라 인적이 드물어 혼자 걷기엔 조금 무서울 수도 있으니 둘 이상 함께 걷는 것을 추천한다. 이곳 조명 역시 해가 뜰 때까지 밝힌다.
매봉산 등 녹지대로 둘러싸인 서울 성산동 '문화비축기지'는 야간에 조용히 걷기 좋다. / 박근희 기자 |
한강은 공원 사업이 다양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정비나 공사 등 코스에 변수가 있을 수 있다. 매년 한강 걷기 행사인 '한강나이트워크42K'를 진행해온 한강나이트워크42K 김령희(36) 도시걷기연구소장은 "북단은 편의 시설이 적지만 한강변의 자연을 가까이 두고 걷기에 좋고, 남단은 편의 시설이나 여가 활동을 즐기기에 좋은 공원이 많아 지루하지 않게 걸어볼 수 있다. 처음 한강 걷기를 시작한다면 5㎞ 걷기로 시작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2~3㎞씩 늘려갈 것을 권한다"고 했다. 자신의 발에 잘 맞는 워킹화를 신고, 일반 양말보다는 발가락 사이 땀 흡수율이 좋은 발가락 양말을 신는 것은 기본이다.
걷기 앱인 '캐시워크'에 따르면 앱 활성화가 가장 많이 되는 시각은 오후 6시다. 해가 느슨해질 때쯤부터 걷기 시작하는 이가 많아진다는 얘기다. 어디든 걷자. 코로나로 위축된 몸과 마음을 바로 세우기엔 거리를 두며 걷는 게 가장 빠르고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특급 처방이 될 테니.
박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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