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아, 누나 왔다간다!” 임영웅 숨결 따라 ‘웅지순례’
[아무튼, 주말] 중장년 팬심이 낳은 전국 임영웅 성지순례
임영웅의 족적과 숨결을 따라가는 전국 '성지순례' 지도. |
성지순례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종교 성지를 찾아가 참배함으로써 그곳에서 나고 죽은 성인(聖人)의 거룩함을 본받아 신앙심을 고취하는 행위. 지금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성지순례는 뭘까. 여느 종교에 대한 약간의 불경이 허락된다면, 톱가수 임영웅의 족적을 따라가는 일명 ‘웅지순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장년의 BTS’ ‘국민 새아빠’로 불리며 누나·엄마·할머니 세대의 폭발적 사랑을 받고 있는 이 32세 가수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일한 곳, 희미한 숨결이라도 남긴 곳마다 팬들을 몰려들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내년 초까지 이어질 전국 투어 콘서트마다 수십만명이 몰리는 ‘피케팅(피 튀기는 예매 전쟁)’만큼이나, 공연장 밖 각지를 들썩이게 하는 웅지순례 명소를 갈무리해봤다.
◇포천·남양주·철원에 그의 숨결이
‘웅지순례 1번지’는 임영웅의 고향인 경기도 북부 포천이다. 2020년 그가 TV조선 ‘미스터 트롯’에서 우승할 때 어머니 이현미씨가 홀로 아들을 키우며 운영해온 미용실에 팬들이 응원 메모와 꽃다발을 남긴 게 시초다. 미용실 주인이 바뀌자 임영웅의 팬이 팬클럽 상징색인 하늘색과 임영웅 콘서트 영상·입간판으로 꾸민 인근 나무카페가 ‘영웅이 카페’로 불리며 대체지가 됐다. “영웅아 누나 다녀간다” “우리 웅이 꽃길만 걷자” 같은 방명록이 빼곡하다. 임영웅이 다닌 포천의 초·중·고교는 물론, 잠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포천 돈가스집 8요일 키친도 순례 필수 코스가 됐다. 식당 사장은 임영웅이 얼마나 성실했는지, 뭘 즐겨 먹었는지 손님들에게 설명해주며 신의 사도처럼 활동한다.
임영웅의 고향 경기도 포천의 '임영웅 엄마 미용실' 인근에 팬이 만든 카페 내부. 임영웅 팬클럽 상징색 하늘색으로 꾸며지고 그가 모델을 선 제품, 임영웅 관련 굿즈 등이 전시된 '영웅이 카페'로 불리는 성지다. /여성조선 |
매일같이 국내외에서 하늘색 옷을 맞춰 입은 팬들이 친구·모녀끼리 삼삼오오, 혹은 관광버스를 빌려 수십~수백명 단위로 포천을 방문한다. 포천 아트밸리, 국립 광릉수목원, 산정호수, 신북온천, 한탄강과 봉선사 등 포천 관광지도 덩달아 북적인다. 수목원 인근 등에서 ‘한 달 살기’ 하는 이들도 있다. 백영현 포천시장은 “병력 5만명이 주둔하는 접경 군사도시가 임영웅 덕에 수준 높은 문화예술 도시로 이미지 쇄신돼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임영웅의 출생지인 경기도 연천, 그가 다닌 경복대 소재지인 남양주와 인근 양주도 명소가 됐다. 40대 남성 박모씨는 “지난달 서울 콘서트 예매에 실패한 ‘불효자’지만, 70대 어머니를 모시고 양주 나리공원에 가서 아쉬움을 풀어드렸다”고 했다. 임영웅이 복무한 육군 3사단 백골부대가 있는 강원도 철원도 마찬가지다.
◇합정·마량 찍고 런던·파리까지
포천만큼 뜨거운 곳이 서울 합정동 일대다. 마포구는 임영웅이 가수가 되려 ‘춥고 서러운 서울살이’를 시작한 곳이자, 현 주거지인 고가 주상 복합 메세나폴리스와 소속사 물고기뮤직이 있는 장소다. 임영웅이 찾는 맛집이 가장 많은 곳도 합정·홍대·상수·망원 라인이다. 명절에 지방의 부모들이 ‘합정 웅지순례’를 하러 서울로 역(逆)상경한다는 사연이 ‘영웅시대’ 같은 팬카페마다 올라온다. “임영웅 가까이서 살겠다”며 이 동네로 이사 오는 이들도 있다.
지난 10월 임영웅의 서울 터전인 서울 마포구 합정동대로변의 한 백반집 앞. 사장이 '임영웅의 서울 엄마'로 불리는 인물로, 하늘색 옷 입은 팬들이 매일같이 몰려와 북적대는 곳이다. /정시행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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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정동 백반집 코리아식당은 하늘색 옷차림 팬들로 항상 북적이는 임영웅의 대표 단골 식당이다. 그가 사고로 다쳤을 때 이 집 사장이 응급처치를 해주고 반찬을 챙겨준 인연으로 ‘임영웅의 서울 엄마’ ‘새끼 제비 다리 고쳐준 흥부’로 불리며 추앙받고 있다. 인근의 단골 밥집 우리식당, 임영웅이 건강검진 전날 식사했다는 양식당 스케줄합정도 대박이 났다. 지하철 6호선 합정역은 7번 출구가 과거 임영웅이 군고구마를 팔던 곳이며, 길 건너 9번 출구는 현재의 그가 한강을 내려다보며 산다는 ‘영웅설화’의 현장이다.
임영웅이 활동차 잠시 들르거나 밥만 먹고 가도 성지순례 반열에 오른다. 하나같이 임영웅을 핑계로 여행을 가도 볼거리·먹을거리가 풍부한 곳들이다. 여유 시간과 구매력이 풍부하고, 아날로그 감성과 경험에 투자하는 신(新) 중장년층을 뜻하는 ‘오팔(OPAL·Old People with Active Life) 세대’ 팬들이 코스를 적극 발굴하고 있다.
◇오팔 세대가 키운 히어로노믹스
임영웅이 2021년 ‘마량에 가고 싶다’고 노래했더니 전남 강진 옆 마량의 까막섬·고금대교 등 관광지와 일대 숙박·식당 매출이 30% 급증했다. 뮤직비디오를 찍은 목포 근대 역사관도 방문객이 급증했다. 임영웅이 ‘엄지 척’ 한 부산 꼬막 비빔밥집, 경남 거창 미당식당, 강원도 정선 5일장 벌집 아이스크림, 대전 성심당 빵집도 그렇다. 임영웅이 방문한 영국과 아일랜드, 프랑스 등 유럽을 묶은 ‘임영웅 해외 성지순례’ 여행 상품도 나왔다.
임영웅이 2년 전 부른 '마량에 가고싶다'는 노래 한곡으로 전남 강진 옆 바닷가 마을 마량에 방문객이 폭증했다. /인스타그램 |
임영웅이 최근 3년여 광고 모델로 선 기업들도 대부분 매출이 크게 늘었다. 쌍용차 렉스턴, 청호나이스 정수기, 청년피자, 티바 두마리 치킨, 매일유업, 키움증권, 광동제약 등이다. “치과 와서 ‘임영웅 임플란트(덴티스)’로 해달라는 어머님이 많다” “본죽 매장에서 ‘임영웅이 인쇄된 종이 가방만 팔라’고 하더라” “엄마가 TS 샴푸만 쓰시는데 임영웅 사진 등 사은품 받으려고 하는 것 같다” “장모님이 50년 쓰던 간장을 임영웅 간장(청정원)으로 바꿨다”는 이야기도 쏟아진다. 축구를 모르던 중장년 여성들이 임영웅을 따라 축구에 입문하고 리오넬 메시를 탐구한다.
미국에선 33세 팝가수 테일러 스위프트가 공연한 지역의 경제가 회생하는 현상을 ‘스위프트노믹스(Swiftnomics)’란 신조어로 부른다. 한국에선 그 현상이 임영웅의 경제효과, 즉 ‘히어로노믹스(Heronomics)’다. 국내 연예인의 팬덤 경제 규모는 총 8조원대로 추산되는데, 임영웅의 음반·콘서트부터 각종 부대 사업 매출, 각 지역 상권 제고 효과를 따지면 그 상당 부분을 차지할 것이란 관측이 있다.
임영웅 팬클럽 회원들이 이달 초 서울역 인근에서 56번째 '쪽방촌 도시락 봉사'를 하고 있다. 팬 수십만명이 "임영웅에게 받은 사랑의 10배를 돌려주겠다"며 각지에서 봉사와 기부를 펼치고 있다. /영웅시대 |
◇영웅이 따라 孝·봉사·기부
임영웅이 안 가도 팬들끼리 ‘성지 가지 치기’를 한다. 자신의 일터를 임영웅 사진·영상과 굿즈로 도배하고 일정 수익을 임영웅 띄워주기에 기부해 새로운 명소를 만드는 것이다. 서울 신도림동 옛날 칼국수, 부산 미경이 손맛과 달맞이 찻집, 광주광역시 별빛카페, 충북 청주 전주대가 콩나물 국밥, 경기 남양주 월산리 카페, 이천시 젬맘 카페, 울산 옛날 손칼국수 등이 그런 곳이다. 이런 업소마다 6월 16일 임영웅 생일에 팬들이 잡채·떡·갈비를 차려 잔치를 연다.
경기 과천 서울대공원, 서울 흥인지문 공원과 서울숲공원엔 팬들이 조성한 ‘임영웅 공원’이 있다. 서울 잠실 ‘히어로 인 어스’란 카페에선 팬들이 자원봉사를 하면서 고령 팬들에게 티켓·음반 구입과 음원 스트리밍 등 방법을 알려주는 ‘참된 덕후 교실’을 운영한다. 모인 팬들은 “임영웅 덕질(관심사를 집중 연구한다는 뜻의 속어)하다 치매가 호전됐다” “임영웅 덕에 뇌종양이 나았고 삶의 의미를 되찾았다”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물리적 여행이나 소비를 넘어 봉사·기부 같은 ‘정신적 성지순례’도 한다. 임영웅의 효성부터 연로한 팬들을 챙기는 심성, 동료와의 의리, 장애인·환아 돕기 등 보수적 가치를 담은 서사에 감동한 기성세대가 영감받아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선행을 확산하는 것이다. 팬들의 독거노인 김장·쌀 나눔, 장학금 수여, 보육원·장애인 시설과 쪽방촌·군부대 급식 봉사·기부 소식.... 팬들 자녀들은 부모들의 임영웅 덕질을 돕는 것을 ‘효(孝) 경쟁’이라 한다. 소통과 교류, 사회 참여 욕구를 가진 세대가 단순한 팬덤을 뛰어넘는 가치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이게 성지순례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정시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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