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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조선일보

“엄마와 화해하려”… 토슈즈 벗고 ‘굿판’ 오른 발레리나

김지영 前국립발레단 수석, 28일 SIDance 폐막서 ‘그녀를 부르는 노래’ 공연

"24년 전 졸업 공연 날 떠난 엄마… 가슴에 못처럼 박힌 말 이제야 뽑아"


1996년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백야(白夜)였다. 새벽 3시까지 태양이 하늘에서 반짝였다. 18세 김지영은 세계 최정상 발레학교 바가노바 졸업 공연 무대에 섰다. 셋째 날 공연 김지영이 무대에 등장할 때, 객석 둘째줄에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앉아있던 엄마가 ‘툭’ 앞으로 고개를 떨궜다. 발레 하겠다고 갖은 애를 먹이던 늦둥이 막내딸이 4년 고생 끝에 최고의 무대에 선 순간, 해가 지지 않는 땅에서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심장마비였다.


“조명이 눈 부셔 그 모습 보지도 못했어요. 사춘기 여자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저도 맨날 엄마랑 티격태격했거든요. 공연 전날 밤, ‘지영아, 엄마 방 가서 같이 자자’ 하셨는데, ‘싫어, 안 가!’ 그랬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공연이 끝난 뒤 병원으로 달려갔다. ‘돌아가셨다’는 러시아말이 허공을 빙빙 돌았다. 거짓말 같았다. 영안실에서 흰 천에 덮인 엄마 발을 잡고 다짐했다. “엄마, 나 계속 춤출게. 계속 무대에 설게.”


네덜란드 국립발레단과 우리 국립발레단을 거치며 발레리나로 명성을 쌓는 내내, 김지영의 춤은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는 과정이었다. 그는 “공연 때마다 혼자 ‘엄마, 지켜봐줘’ 기도하고 무대에 올랐다”고 했다.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여태껏 엄마의 이름을 건 공연을 한 적도, 무대 위에서 엄마를 언급한 적도 없었던 것 같네요.”


작년 6월 국립발레단 수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경희대 교수로 옮기며 “더 자유롭고 편안하게 춤출 수 있게 된” 이제야, 김지영이 무대 위에서 엄마를 부른다. 오늘 28일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이하 ‘시댄스’) 폐막 공연 프로그램 중 하나로 그가 홀로 추는 춤의 제목은 ‘그녀를 부르는 노래’. 가슴에 박혔던 마지막 말의 못을 뽑아내고 다정하게 엄마를 부르는, 24년 만의 화해다.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무관중 온라인 공연으로 치러진 올해 ‘시댄스’ 중 유일한 유관중 프로그램이다.


26일 서울 남산 한국의집에서 창작 전통음악 단체 ‘노름마치’(대표 김주홍)와 막바지 리허설 중인 김지영을 만났다. 토슈즈와 로맨틱 튀튀 대신 흰 소복 같은 무대 의상을 입고 국악 장단에 춤추는 모습이 낯선 것은 잠시뿐이었다. “노름마치 연주를 직접 들으며 춤추기 시작하니 음악이 내 몸속으로 들어왔어요. 징 소리가 내 팔을 들게 하고, 피리가 내 다리를 움직이게 하고. 나도 모르게, 마치 몸에 실이 달린 것처럼.” 신을 부르는 구음소리에 맞춰 팔을 뻗을 때 그는 초혼(招魂) 굿판을 벌이는 무녀가 됐다. 타징에 피리 선율이 감겨들 땐 소리를 매기고 받듯 능숙하게 타악 리듬을 가지고 놀았다. 춤의 악센트에 음악이 안기고, 음악의 악센트를 춤이 이끌었다. 기술적 완성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은 그의 춤은 훨씬 품이 넓고 편안했다.


“엄마가 1978년 저를 임신한 상태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설적 발레리나 마고 폰테인(1919~1991)의 영국 로열발레단 공연을 보셨대요. 공연 뒤 폰테인은 한국의집에서 이매방 선생의 살풀이춤을 관람했고요. 오늘 제가 춤춘 바로 이 무대에서요.” 김지영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발레를 시작했는데, 왜 발레가 그렇게 좋았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마 엄마 배 속에서부터 발레를 봐서가 아닐까”라며 웃었다.


김지영은 “대개 딸들은 어릴 땐 엄마 없이 못 살 듯하다가, 사춘기가 되면 원수처럼 싸우고, 나이 좀 들면 다시 친구가 된다. 내게는 춤이 엄마 같다”고 했다. “너무 사랑해서 시작했지만 너무 싫어서 싸웠어요. 내가 춤을 붙잡으려 하면 춤이 도망가고, 춤이 나를 붙잡으려 하면 내가 도망갔죠. 이제야 평생 처음, 춤이 편안해졌어요. 내가 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된 것 같아요.”

조선일보

26일 남산 한국의집에서 올해 서울세계무용축제 폐막작으로 공연할 춤 ‘그녀를 부르는 노래’ 리허설 중인 김지영. /김연정 객원기자

김지영은 “제 춤에서 관객 스스로 가장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했다. “그게 위로일지 희망일지 슬픔일지…. 저는 그저 제 말을 하고 제 진심을 전달할 뿐이니까요. 거기서 관객이 느끼는 진실은 모두 다르길 바랍니다. 그런 춤을 추고 싶어요.”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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