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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얇게 찰랑거리는 수육 한 점… 혀에 차분히 내려앉는 고소함

[아무튼, 주말] 돼지고기 수육

서울 아현동 ‘밀밭정원’

조선일보

서울 아현동 '밀밭정원'의 돼지 수육.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할머니는 양은 솥에 삶은 삼겹살을 전기밥솥에 넣었다. 얇은 미닫이문 밖으로 눈이 쌓였다. 충청도 겨울밤에 빛나는 것은 달빛 아래 눈뿐이었다. “삼겹살 안 구워요?” 삼겹살은 무조건 구워 먹는 것으로 알았던 초등학교 때였다. “이북에서는 돼지고기를 삶아서 많이 먹었어.” 개성이 고향인 할머니가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과 나는 솜이불을 목까지 올려 덮었다. 할머니는 굽은 등을 뒤로 하고 전기밥솥을 닫았다. 밤새 밥솥에서 익은 돼지고기가 점심상에 올라왔다. 안방 아랫목에 앉아 작은 상을 앞에 뒀다. 푹 삭은 배추김치에 수육 한 점을 올렸다. 이에 닿자마자 따뜻한 고기가 녹아 내렸다. 시큼한 김치에 침이 가득 나왔다. 수육과 함께 밥을 두 공기 비웠다. 한없이 내리던 눈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겨울방학이었다.


삼겹살을 불에 구우면 흥겹다. 숯불이건 가스불이건 뜨거운 불이 주는 기운이 전해져 볼을 발갛게 붉히며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말갛게 삶은 수육은 그보다 점잖고 차분하다. 그래서 왁자지껄 떠들기보다는 어릴 적 눈이 쌓이던 겨울밤처럼 차분히 이야기 나누기 좋다.


서울 서대문역 충정빌딩 지하에 자리한 ‘안춘선’은 작고 은밀하며 예스럽다. 그곳에서 오랜 정을 나눈 사람들이 고개를 맞대고 두툼한 수육 하나 놔두고 잔을 채웠다 비우기를 반복했다. 주인장은 억척스럽게 주방과 홀을 넘나들었다. 손님들은 일일이 주문 넣기 미안해 스스로 냉장고 문을 열고 닫았다. 메뉴는 돼지고기 수육 단 한 가지. 일정한 간격으로 썰어낸 석박지와 프랑스 수프같이 농도 걸쭉한 배추갈비탕이 함께 나왔다.


당당히 테이블 가운데 놓이는 수육은 장비와 관우가 먹었을 법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된장에 삶아 적색에 가까운 두툼한 수육 한 조각은 거친 모양새와 달리 부드럽게 무너졌다. 돼지고기를 씹는 게 아니라 그 맛을 농축한 젤리를 먹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곁들인 알배추에 수육을 올리고 입에 욱여넣으면 볼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잔을 꺾는 것이 유치하게 느껴졌다. 옛 장수처럼 호기롭게 잔을 비웠다. 이 호쾌한 맛이 돼지고기 먹는 재미 같았다.


수육으로 또 유명한 집을 꼽자면 회기역 근처 ‘회기왕족발보쌈’, 방산시장 ‘장수보쌈’이 있다. 하지만 공덕역 마포시장 대로변 ‘영광보쌈’을 먼저 읊고 싶다. 이 집 역시 오로지 돼지 수육 곁들인 보쌈 메뉴 하나뿐이다. 주문이랄 것도 없이 자리에 앉으면 콩나물과 우거지로 끓인 된장국과 빨간 보쌈김치, 꽃처럼 활짝 핀 수육이 접시에 담겨 나왔다.


된장국을 한 숟가락 먹으며 수육과 김치를 살펴봤다. 피처럼 검붉은 김치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작은 용기를 내 수육에 김치를 돌돌 말아봤다. 김치는 강렬한 색과 달리 그다지 짜지도 맵지도 않았다. 대신 보쌈김치를 생각하면 으레 떠올리는 단맛이 과하지 않게 감돌았다. 살코기는 씹는 맛이 살아있었다. 막 퇴근한 직장인들, 남자와 여자 모두 밝게 웃으며 고기를 먹었다. 누구 하나 얼굴 어두운 이가 없었다. 오래된 집이 내놓는 익숙한 음식에 사람들 마음이 쉽게 풀어졌다.


아현동 애오개역 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면 ‘밀밭정원’이 있다. 말 그대로 우리 밀로 뽑은 국수를 내는 집이다.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잘 꾸민 정원에 넉넉한 홀이 있다. 만두와 국수 모두 혀를 때리는 맵고 자극적인 맛은 적었다. 대신 향이 맛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오래된 눅눅한 내 없이 푸른빛이 형형한 소나무밭에 서 있는 듯 청량한 향이 돌았다. 국수는 매끄럽게 목구멍을 쓰다듬었다. 달걀 물을 얇게 입혀 부친 육전은 향으로 즐기는 국수와 달리 맛의 농도가 짙었다. 고소한 달걀 맛이 쇠고기의 두터운 맛에 변주를 줬다.


그리고 돼지고기 수육이 올라왔다. 반듯이 잘라 편평히 곱게 접시에 올렸다. 깻잎 한 장, 겉절이 한 젓가락, 새우젓 조금, 얇게 찰랑이는 고기에 맛을 입혀봤다. 지방의 단맛이 체온에 서서히 내려앉았다. 도톰한 살코기가 가닥가닥 흩어졌다. 밖을 바라봤다. 너른 정원에 눈이 내려도 좋을 것 같았다. 어릴 적 밝게 빛나던 겨울밤처럼, 고소한 돼지고기 향내를 맡으며 잠이 들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정동현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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