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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조선일보

시인의 집에는 딸 셋, 사위 셋, 손자 셋이 산다

[아무튼, 주말]

[백수진 기자의 담백]

세 딸과 함께 지은 신달자 시인의 마지막 집

시인의 집에는 딸 셋, 사위 셋, 손자 셋이 산다. 신달자(78) 시인은 2년 전 세 딸과 함께 경기 성남시 심곡동에 집을 지었다. 집 지을 때 그가 요구한 건 딱 하나. 가족들의 사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집이었다. 한 지붕 네 가족을 위한 집이지만 출입문은 따로따로다. 복도나 계단 같은 공용 공간을 최소화해 집 안 공간을 넓혔다. “같이 살지만 따로 사는 것처럼. 그게 우리 집 규칙이에요. 서로 간섭하지 않고 저도 자식들한테 어디 가느냐, 뭐하냐 깊게 묻질 않아요.”

신달자 시인은 수필·소설까지 넘나들며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은관문화훈장을 비롯해 대한민국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 등 각종 문학상을 휩쓸었고 명지전문대·숙명여대 교수를 거쳐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다. 화려한 이력의 이면엔 20년 넘게 남편을 병간호하며 가장으로서 세 딸을 키워내야 했던 삶이 있었다. 고통 속에서 끌어낸 시들로 많은 이에게 위로를 줬던 그는 지난해 만해대상(문예 부문)을 받았다.


인릉산 밑 깊은 골짜기, 심곡(深谷)에 자리한 시인의 집을 찾았다. 산 능선이 집 주위를 감싸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시인의 집은 ‘심곡 하우스(Simgok House)’란 이름으로 올해 초 미국 건축가 어워드(AAA·American Architecture Awards)의 개인주택 부문을 수상했다.

일흔도 훌쩍 지나 팔순 가까울 때/짐 싸 들고 오롯이 내 집이라고/먼 길 돌아 돌아 겨우 내 집에 들 듯/ ... / 나는 맨 꼬랑지에 서서/ 보따리 하나 이고 다 큰 자식들 뒤를 따르니/ 내 몸에 딱 맞는 옷 같은 집인가 - 시 ‘깊은 골 심곡동’ 中


-1인 가구 시대에 보기 드문 집입니다. 가족 열 명이 어떻게 함께 살 결심을 하셨나요.


“처음엔 사위들끼리 술 마시다 얘기가 나왔대요. 어머니 연세도 많으신데 함께 살면 어떻겠냐고. 사위들한테 제일 고맙지요.”


-딸들이 아니라 사위들 생각이라니 놀랍습니다.


“어떻게 보면 딸만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에요. 사위들은 생각이 복잡하질 않아서 그냥 툭, ‘같이 살면 어떨까’ 하고 시작한 거죠. 아들이 하나라도 섞이면 안 돼, 그쵸? 하하! 어느 며느리가 아침저녁으로 시어머니 보려고 하겠어요.”


-심곡동은 원래 연고가 있던 동네인가요?


“전혀요. 막내딸·사위랑 근처에 차 한잔 마시러 왔는데, 마침 봄날이라 산 아래 집들이 참 좋아 보이더라고요. ‘저런 집은 얼마나 할까’ 알아나 보려고 복덕방에 들어갔는데 이 집터가 나와 있더라고요. 산이 폭 안아주는 느낌이 안정감이 들었죠.”


-다른 가족들도 모두 찬성했나요.


“단체 카카오톡방에 보내 다들 다녀와보라고 했죠. 손자들까지 열 명이 전부 다 보고 와서 투표를 했어요. 집 짓는 일은 한 사람이라도 싫다고 하면 안 되니까. 열 명이 투표해서 만장일치로 결정했죠.”


-함께 살아보니 어떻던가요. 장단점이 있을 듯한데.


“처음엔 말리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혼자 편하게 살지 뭐 하러 자식들 끼고 사느냐고. 그래도 내가 나이가 있으니까 가족한테 보호받는 느낌이 들고, 아이들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죠. 단점은 우울하거나 기분 나쁠 때 보이고 싶지 않은 얼굴 보여준다는 거고.”



새로 이사한 동네는 고요하다. 방에서는 산줄기의 능선이 보인다. 자주 그 능선과 대화한다. 능선은 내가 만나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을 대신한다. 햇살과 바람이 너울지고 그 너울 속으로 바람이 불고 새가 난다. 생의 노후에 만난 좋은 친구다. - 산문 ‘나를 바라보는 힘’ 中


땅의 모양을 살려 건물 세 개가 삼각형 모양으로 붙어 있다. 가운데 공간을 비워두고 계단으로 네 집을 연결해 공간의 효율성을 높였다. 1층엔 주차장과 가족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패밀리룸이 있다. 2층엔 신달자 시인의 집이 있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딸들의 집으로 연결된다.


집을 설계한 박진희 SsD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가부장적 사회다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가족이 와해할 수도 있는데 딸들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결속력이 좋아 보였다”고 했다. “따님마다 성격도 다르고 가족 구성원도 달라서 면적과 공사 비용은 같되 각 집의 개성을 살려야 했어요. 두 아들이 있는 첫째 따님은 독립된 공간을 원해서 3개 층으로 분산해 방 네 개를 확보했고요. 아들 하나인 둘째 따님은 반대로 가족끼리 함께 있고 싶어해 모여서 책 읽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지요. 아이가 없는 막내딸 부부는 드레스룸과 서재를 크게 만들었죠.”


개별 인터뷰는 하지 않겠다는 세 딸들은 사진 촬영을 위해서만 잠시 모였다가 다시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신달자 시인은 “원래 딸들이 얼굴 내놓는 걸 싫어하는데 내가 애교를 부렸다”며 웃었다. “집안일도 다 각자 알아서 해요. 가끔 딸이 와서 청소도 해주는데 그러고 또 한두 달 동안은 서로 잊어요. 내가 신세를 안 지려 하기도 하고. 가끔 섭섭할 땐 이렇게 생각해요. 나는 우리 엄마한테 더 못된 딸이었지 않나. 그럼 일순간에 서운함이 사라집니다. 하하!”


시인의 집은 계단 없이 일자로 좁고 길게 지어졌다. 긴 복도 끝에는 높은 천창에서 햇빛이 쏟아지는 공간이 있다. 구석에 십자가 조명을 달아 기도하는 공간이 됐다. 온 가족이 가톨릭 신자라는 시인은 “12월 31일은 가족이 함께 모여 타종을 듣고 다음 날 새벽 미사를 가는 게 30년 넘은 집안의 전통”이라고 했다.


“가족끼리 밥 먹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따로 살 때도 자주 우리 집으로 오게 해서 밥을 먹였어요. 그럼 애들의 동태를 알 수 있거든요. ‘싸웠니?’라고 물어보지 않아도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죠. 밥을 먹으면서 묵은 감정이 풀리기도 하고요. 자주 밥을 먹는 사이니까 자연스럽게 같이 살자는 말이 나오게 된 것 같아요.”


-같이 살면서 서로 정한 약속도 있나요.


“나는 딸들 집 안 가는 게 원칙이에요. 집 비밀번호도 모르고요.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함께 못 살아요. 만약 눈이 왔는데 누가 치웠다면 꼭 고맙다고 말해요. ‘내가 (다른 가족보다) 좀 더 고생한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곤란하거든요.”


-서로 매일 보진 못하겠네요.


“바쁘면 며칠을 못 볼 때도 있어요. 가끔 딸들이 국 끓였는데 맛있다고 먹으러 오라 하면 가고. 또 며칠은 모른 척하고. 집안에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하면 패밀리룸으로 내려가요.”


-패밀리룸에선 뭘 하나요.


“부엌이랑 테이블이 있어서 고기 굽고, 술도 마시고요. 노래방 기계도 있어서 애들이 노래도 불러요. 명절 되면 패밀리룸에서 만나 떡국 끓여 먹고 선물 교환도 해요. 열 명 생일을 일일이 다 못 챙기니까 5월에 모아서 한 번, 8월에 모아서 한 번 생일파티도 하고요. 집에선 거의 딸들이 밥하고 설거지하니까, 패밀리룸에선 전부 사위들이 일해요. 고기 굽고 상 차리고, 설거지까지 다….”


-집 지으면서 의견이 달라 부딪친 적은 없었나요.


“우리 가족은 누구도 의견을 끝까지 고집하질 않아요. 누가 ‘그건 좀 아닌데’ 하면 ‘아, 그럼 그냥 없애’ 하면서 쿨하게 끝나죠(웃음).”


-집에 와본 지인들 반응은 어땠나요.


“순서가 있어요. 처음엔 ‘좋겠다' ‘다 같이 살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다가, ‘진짜 괜찮니?’‘쉽지 않을 텐데?’ 하고 물어요. 함께 사는데 갈등이 왜 없겠어요. 하지만 어떤 삶을 선택하든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은 있는 거예요.”


-그전엔 북촌에 한옥을 짓고 사셨죠?


“북촌살이가 꿈이었거든요. 땅 스무 평을 사서 그 위에 열 평짜리 아주 작은 집을 지었죠. 그때 집 이름이 ‘마음을 비우라’는 뜻의 공일당(空日堂)이었어요.”


-새로 지은 이 집에도 이름이 있나요.


“고회지가(高會止家).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임은 온 가족이 함께 모인 자리라는 뜻이래요. 추사의 글에 나온다더군요.”


-집에 유독 관심이 많으시네요.


“좋은 집에 살아본 적도 별로 없는데 어릴 때부터 집에 관심이 많았어요. 선생님이 ‘너희는 의식주 중에 뭐가 제일 좋으냐’고 하면 제일 먼저 손들고 ‘주!’라고 외쳤으니까요. 으리으리한 집에서 살아본 적 없지만, 어릴 때 꿨던 꿈을 이룬 것 같아요. 지금 가장 좋은 집에 살고 있죠. 마지막에 가족과 함께 사는 것보다 더 화려한 삶이 어딨겠어요.”

망치 하나면/ 내 생이 교정될 수 있었을까// 팔순 정상이 저기쯤인데/ 나는 지금도 망치가 필요하다 - 시 ‘망치’ 中


시인은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삶의 고통 속에서 축복을 발견하는 시들을 써왔다. 1964년 ‘여상’으로 등단한 뒤, 1972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재등단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에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한 달 만에 깨어난 남편은 몸을 가누지 못했다. 막내딸이 겨우 세 살일 때였다. 세 아이를 키우기 위해 펜 대신 보따리를 집어들고 동대문 시장을 오갔다. 그 와중에 쓰러진 시어머니까지 병간호하며 마흔 살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펴낸 수필집 ‘백치애인’, 장편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빚을 겨우 청산했다.


-평소에 ‘나는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우리 딸들이 해준 말이에요. 우리 남편이 2000년에 세상을 떠났거든요. 모든 일을 다 치르고 나서 우리 딸이 그랬어요. 엄마는 이제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거 먹고, 제일 좋은 옷 입고, 제일 좋은 집에서 살라고. 그동안 보아온 것들이 있으니까 그런 말을 했겠죠. 그런데 지금은 제일 좋은 음식 안 먹어도 배부르게 삽니다.”


-가족분들 모두 일을 하고 계신가요.


“막내딸은 디자인 전공하고 프리랜서로 일해요. 남편이 화가이자 가천대 교수라 둘이 같이 일하기도 하고요. 둘째 딸은 삼성 다니는 남편과 살면서 방송작가 일도 오래했고 글도 쓰고요. 첫째는 중학교 때부터 ‘난 엄마처럼 안 살아’ 그랬어요. 내가 너무 힘들게 살았으니까. 그래서 성실한 변호사 남편 만나서 잘 살아요. 내가 못 낳은 아들 둘이나 낳고, 하하!”


-제일 좋은 집 지으신 것 맞네요.


“저 스스로 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딸 중에 큰 부자가 있어서 ‘이런 집에서 못 산다’고 해도 못 지었을 테고, 너무 가난해 집 지을 돈이 없었어도 못 지었겠죠.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아줘서 함께 집을 지을 수 있었어요.”


-보통은 가진 것보단 가지지 못한 것이 더 크게 느껴지잖아요.


“옛날엔 저도 그랬어요. 왜 나야,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해. 하느님한테 항의한 적도 많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요즘은 ‘난 참 복이 많아' ’그래, 난 상 받은 거야' 이런 소릴 많이 해요. 내가 가진 모든 것에 덤을 얹어주게 되더라고요.”


-덤을 준다니 무슨 뜻인가요.


“젊을 땐 가진 복도 ‘이게 무슨 복이야’ 하면서 덜어내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젠 조금 속상한 일이 있어도 ‘그래도 나한텐 가족이 있잖아’ 하며 긍정적으로 보려는 거죠.”


-스스로 주는 덤이군요.


“나라도 나한테 좋은 소릴 해줘야죠. 인간에게는 누구나 마음속에 우는 아이가 살고 있다더라고요. 나하고 화해하지 못한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이제 다 자라서 괜찮다고 얘기해주는 것 같아요.”

내가 지금껏 아름답게 살아있는 것은/ 이것과 저것을 엮는 봉합 기술 덕분일 거야 - 시 ‘손을 잡는다는 것’ 中


경남 거창에서 1남 6녀 중 다섯째 딸로 태어나 세 딸을 길렀다. ‘엄마와 딸’이라는 에세이를 썼을 정도로 모녀 관계는 그의 오랜 탐구 주제였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시인의 어머니는 딸을 공부시키기 위해 도시로 보냈다. 버스 정거장에서 어머니는 세 가지 당부를 했다.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여자도 돈을 벌어야 한다. 그리고 여자로서 행복해라. 시인은 “엄마는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나에겐 가장 좋은 스승이었다”고 했다.


첫 시집을 냈을 때 박목월 시인이 마련해 준 출판기념회에 찾아온 어머니는 연습해온 빼뚤빼뚤한 글씨로 방명록을 남겼다. ‘일생에 잊지 못할 날일세, 엄마의 기쁨이다.’ 시인은 “받침도 다 틀린 그 글씨를 아직도 갖고 있다”고 했다. “나중에 남편이 쓰러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우리 엄마가 충격을 크게 받고 돌아가셨거든요. 그때 나한텐 희망이라곤 없었죠. 근데 ‘그래도 니는 될 끼다!’ 하고 돌아가셨어요. 아무도 나에게서 희망을 보지 못할 때 그래도 니는 될 거라고. 그 말을 지팡이 삼아 살았어요.”


-어머니의 한마디가 선생님을 살린 거네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석·박사 마치고 교수까지 된 거죠. 그러니까 누구라도 한 사람이 ‘너는 돼' ’너는 될 거야'라고 하면 그 사람은 정말 될지도 몰라요. 한국인들은 대개 불가능한 쪽으로 말하잖아요. 네가? 네가 그걸 하겠다고? 누가 따님이 예쁘다고 하면 우리 엄마들은 ‘그치, 우리 딸 예쁘지?’라고 안 하고, ‘뭐가 예뻐’ 하잖아요. 우리 엄마도 늘 그랬던 사람인데 마지막엔 확 밀어준 거죠. 니는 된다!”


-세 딸에겐 어떤 어머니셨나요.


“인기가 없었죠. 내가 너무 힘들게 사니까 ‘우리 애들은 잘살아야 되는데,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 애들을 몰아붙였어요. 애들이 중·고등학생 때 나 모르게 시집 들고 있으면 막 혼냈어요. 공부해야지 너 뭐 하느냐고.”


-뜻밖이네요.


“시집 읽는 딸들 어깨 두드려줄 것처럼 보이죠? 전혀요. 무식한 엄마였어요, 무식한 엄마.”


-그래도 어머니의 당부 세 가지를 다 지켰습니다.


“그런 셈이죠.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여자도 돈 벌어라. 사실 두 가지만 말하고 싶으셨던 것 같은데, 마지막에 덧붙이셨죠. 여자로서 행복하라고.”


-앞의 두 가지가 있으니 행복도 따라왔겠죠.


“날 때부터 아무 고난 없이 살고서 죽을 때, ‘아, 행복했다!’ 하는 사람 없어요. 그렇게 산 사람은 행복이 뭔지 절대 몰라요. 나는 젊었을 때 부러운 여자가 참 많았어요. 남편이 잘해주고, 돈도 많고, 좋은 집 살고, 아들 척척 낳고. 그런데 이제는 부러운 여자가 없어요. 살아보니 내가 부러워했던 여자들 가슴속에도 다 못이 박혀 있더라고요.”


–선생님께 시는 무엇입니까.


“‘나 아프다’는 말을 아름다운 노래로 하는 것. 시골에 가면 농사 지으면서 아리랑 부르는 것, 우리 어머니들이 ‘아이고, 나를 누가 알아줄꼬’ 탄식하는 것도 다 시예요. 삶의 대화가 다 시입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때일수록 시가 필요한 거군요.


“시는 결국 노래.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 알아주는 시가 존재한다는 건 큰 위로가 되지요. 삶이 있는 한 시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백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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