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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시멘트 시대, 원초적 불맛

정동현의 Pick

스테이크 서울 신사동 ‘EBT’

서울 신사동 'EBT'의 등심스테이크(앞)와 이베리코 뼈등심./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스테이크는 원조를 따지기 힘든 음식이다. 고기를 불에 굽는 행위만 따지면 전 인류가 공유하는 음식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주로 먹는 형식, 즉 가니시(garnish)라고 부르는 부(副)요리와 소스를 곁들여 먹는 스테이크는 그 원산이 영국이다. 이탈리아 피렌체에 가면 먹을 수 있는 티본 스테이크인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bistecca alla fiorentina)’ 역시 19세기 영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다.


영국인은 예부터 소고기를 좋아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소를 키우는 목초지와 땔감으로 쓸 연료가 풍부했던 것이 그 배경이다. 그 식성은 풍요로움과 남성성의 상징이 되어 현재 미국, 호주 등 예전 영국 식민지로 퍼져 나갔다. 지금은 스테이크가 선망 대상이 아니다. 소고기를 먹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두툼한 고기를 앞에 두고 포크와 칼을 들으면 어쩐지 남다른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도산공원의 ‘저스트 스테이크’는 이름 그대로 스테이크를 주력으로 한다. 고기 메뉴는 엘본(L-bone) 스테이크와 티본(T-bone) 스테이크 딱 두 가지다. 엘본은 뼈를 사이에 두고 채끝 쪽이 크고 안심 쪽은 적게 정형한다. 티본은 안심을 조금 더 크게 정형했다고 보면 된다. 나무 문을 열고 들어서니 실내는 영국 교외 별장에 온 것처럼 소박하고 아늑했다. 좁은 주방에서는 젊은 남자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일하고 있었다.


스테이크는 미국식으로 먼저 그릴에 굽고 접시에 올려 뜨겁게 오븐에서 익혀 냈다. 건식 숙성(dry-aging)한 고기는 잘 익은 장(醬)과 같이 숙성한 향기가 났다. 미국산 프라임 등급을 쓴 고기는 불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연했다. 안심은 고기를 씹기보다는 베어 먹는 것에 가까운 식감이었다. 고기 자체 풍미가 강해 소스 없이 소금, 겨자, 호스래디시(서양 고추냉이)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름 그대로 ‘오늘은 무조건 스테이크’라는 느낌이 든다면, 하드보일드 소설 속 주인공처럼 소스 없이 소금만 뿌린 스테이크 한 접시에 위스키를 한잔 마셔도 좋을 것 같다.


올림픽공원 건너편 방이동 ‘스타쉐프 바이 후남’도 미국풍 프랑스 음식을 한다. 이 집 주인장이 미국에서 요리 연수를 한 탓에 음식량이 대체로 많고 맛의 결도 시원시원하다. 탕수육이 인기 메뉴일 정도로 ‘맛만 있다면’이라는 모토 아래 다양한 요리를 다루지만 그래도 메인은 스테이크다.


채끝 부위인 ‘뉴욕 스트립 스테이크’는 커다란 나무 도마 위에 구운 채소와 매시드 포테이토, 소스 3종과 함께 나왔다. 곁들인 채소나 소스, 삶은 감자에 버터를 듬뿍 넣어 으깬 매시드 포테이토 모두 고참 조교의 시범처럼 흠잡을 것이 없었다. 채소는 너무 익혀 무르지 않았고 고기는 타거나 혹은 덜 익어 입맛에 거슬리지 않았다. 프라임 등심 구이 샐러드는 여러 명이 나눠 먹기 충분한 양이다. 북경식 와규 생소고기 탕수육은 길고 거창한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맛이다.


신사동 가로수길 신구초등학교 쪽 이면 도로 반지하에는 ‘EBT’라는 곳이 있다. 통창이 나 있어서 실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음식을 보면 흔히 말하는 ‘유러피언 다이닝(European dining)’에 가까웠다. 프랑스 요리를 기반으로 하지만 파스타와 리소토와 같이 대중적 요리도 함께 내놓는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접시에 고기 몇 점, 풀때기 몇 줄기 올리고 ‘예술’ 하는 집은 아니다. 가스나 전기 대신 숯을 쓰는 조스퍼(Josper) 오븐이 주방 한가운데 자리하고 400도를 넘나드는 열로 고기를 굽는 뜨겁고 자유분방한 힘이 격식을 앞선다.


직화에 가까운 방식으로 구운 홍새우와 가리비 관자는 매콤한 소스와 어울려 이국적인 흥취를 냈다. 호주산 소고기를 쓴 등심은 불의 원초적인 맛이 고기에 배어, 먹는 사람들 얼굴에도 야성이 깃드는 듯했다. 두툼하게 구운 이베리코 돼지고기 스테이크는 느끼하지 않고 고소한 지방의 풍미가 오히려 소고기보다 낫다는 생각도 했다. 그 맛에 취해 한참 고기를 먹고 있노라니 몸에서 그을린 냄새가 났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이 보일 것만 같았다.


이제 스테이크를 먹는 것은 모자라는 영양분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남에게 ‘오늘 스테이크 먹었다’고 으스대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지만 스테이크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석양을 보면 감탄이 나오고 연인을 보면 가슴이 떨리듯,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이뤄진 시대에 살더라도 잊을 수 없는 원초의 맛이 몸속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 EBT: 등심 스테이크 4만8000원(200g), 홍새우와 가리비 관자 3만1000원, 이베리코 뼈 등심 3만6000원.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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