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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조선일보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4] 古城에서의 밀애… 왕은 아들을 원했고, 여인은 사랑받길 원했다

헨리 8세와 앤의 사랑과 전쟁… 히버城·런던탑


- 종교까지 바꿔가며 완성한 사랑

유부남 헨리 8세, 앤에게 반해 보는 눈이 많은 런던 궁정 피해

켄트주 히버城에서 몰래 만나


- 히버에서 타올라 런던서 식어버려

기다리던 아들 아닌 딸 태어나자 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앤은 역모죄로 런던탑서 최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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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년 5월 19일, 런던탑은 아침부터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오월의 햇살은 찬란했지만 분위기는 우울했다. 런던탑 내의 타워그린에는 임시 단두대(斷頭臺)가 설치됐다. 오전 9시가 지나자 한 여인이 왕실 근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그녀는 지친 표정이었으나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단두대 위에 오른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왕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단두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형집행관이 칼을 번득였다. 비명과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녀의 이름은 앤 불린. 어제까지만 해도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였다. 그녀는 남편의 명령에 의해 투옥됐고, 조사받았으며, 사형을 언도받았다. 혐의는 간통과 국왕 시해 음모. 왕비에게는 가장 치명적이며 치욕스러운 죄명이었다. 증거는 없었다. 왕비의 상대로 지목된 다섯 명 중 네 명은 엄혹한 심문에도 혐의를 부인했다. 단 한 사람만이 왕비와의 관계를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물여섯명의 재판관은 전원 일치로 왕비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처음부터 증거는 문제 되지 않았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력의 의지였다. 정적(政敵)이었으며, 그녀를 혐오했던 스페인 대사조차도 왕비가 확실한 증거나 자백 없이 억측에 근거해서 죄인이 됐다고 느꼈다. 왕비의 진짜 죄는 무엇일까? ◇사랑이 꽃피던 히버 城 두 사람은 사랑했다. 앤 불린(Anne Boleyn·1501?~1536)을 향한 왕의 사랑은 ‘광기(狂氣)’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었다. 헨리 8세(Henry Ⅷ·1491~1547, 재위 1509~1547)에게는 이미 왕비 캐서린(Catherine of Aragon·1485~1536)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비밀리에 연애를 시작했다.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사랑이었기에 보는 눈이 많은 런던의 궁정을 피해 두 사람은 히버 성(Hever Castle)을 밀애 장소로 선택했다. 히버 성은 런던에서 남동쪽으로 48㎞ 떨어진 켄트주(州)에 위치한 중세의 고성(古城)이다. 켄트주는 자연이 좋다. 숲은 울창하고 구릉은 완만하며 물도 풍부하다. 브리튼 섬의 가장 남쪽이다 보니 날씨도 좋다. 아름다운 정원이 많아 영국 사람들은 켄트주를 ‘잉글랜드의 정원(Garden of England)’이라 부른다. 히버 성의 정원은 그중에서도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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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는 길이 수월치만은 않다. 한낮에도 어둑할 정도로 울창한 숲 가운데 난 좁은 도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 한다. 지금도 이럴진대 헨리와 앤이 연애하던 시절에는 어땠을까? 제대로 된 길도 없었을 텐데,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말을 달리던 왕의 모습을 상상하면 우습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주차장에 도착해도 숲에 가려 성(城)은 보이지 않는다. 정문을 통과해서 내려가면 어느 순간 숲이 끝나고 시야가 탁 트인다. 푸르게 펼쳐진 잔디와 정원, 그 너머의 작은 성 하나. 마치 중세 기사 소설의 한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온 것 같다. 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히버 성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중세에 요긴하게 쓰였을 법한 방어시설인 해자(垓字)와 공격시설인 화살 구멍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인다. 성문에는 나무로 된 내리닫이 창살문(Portcullis)까지 설치돼 있다. 성 내부는 헨리 8세와 앤 불린이 사랑을 나누던 튜더 왕조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왕이 비밀스럽게 사랑을 키워가던 곳. 이곳은 원래 '불린(Boleyn)' 가문(家門)의 성이었다. (원래는 'Bullen'이었는데 앤이 프랑스에서 돌아온 이후 'Boleyn'으로 표기하면서부터 혼용하게 됐다) ◇3代 노력 끝에 권력 핵심이 된 불린家 불린 가문은 노퍽 지방의 유서 깊은 젠트리 가문이었다. 앤의 증조할아버지 조프리(Geoffrey)가 런던에 진출해 섬유 사업으로 부를 쌓고 런던 시장을 맡아 중앙무대에 진출했다. 히버 성은 조프리가 1462년에 구입했다. 할아버지 윌리엄은 켄트주의 주장관(High Sheriff)을 지냈다. 그의 아들 토머스(1477~1539) 대에 와서 가문은 더욱 번창했다. 토머스는 외교관으로 맹활약하며 헨리 8세의 총애를 받았다. 결혼도 대(大)명문인 노퍽 공작의 딸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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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착실하게 3대에 걸친 노력 끝에 불린 가문은 튜더 궁정에 뿌리를 내렸다. 꽃을 활짝 피운 건 토머스의 딸 앤 불린 때였다. 그녀는 외교관으로 활약하는 아버지를 따라 당시 유럽 정치와 사교의 중심이었던 브뤼셀과 파리에서 십 대 시절을 보냈다. 그곳에서 선진 예법과 교양을 익힌 앤은 20대 초반에 긴 외유를 마치고 런던의 궁정에 데뷔했다. 검은 눈동자와 검은 머리카락, 하얗고 긴 목이 매력적이었던 앤은 특유의 발랄함과 대담함으로 뭇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누구보다 왕의 시선을.


당시 헨리 8세는 후계 문제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왕에게는 딸 메리가 유일한 적녀(嫡女)였다. 그러나 왕조가 개창된 지 40여 년밖에 안 된 상황에서 여왕으로는 약했다. 헨리 8세에게는 믿고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필요했다. 왕비 캐서린은 이제 나이가 많아 출산이 불가능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왕은 캐서린이 원래 형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결혼이 저주받았다고, 그래서 하나님이 아들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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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앤이 등장한 것이다. 왕은 사랑을 고백했다. 앤은 사랑을 뿌리쳤다. 왕의 정부(情婦)가 아닌 왕비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왕은 사랑과 후계를 위해 왕비 캐서린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캐서린은 단호히 거절했다. 헨리 8세가 이혼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허락을 얻어내야 했는데, 이는 고도의 외교적 협상이 필요한 일이었다. 시간이 걸렸다. 헨리와 앤은 이혼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서로를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버텼다. 히버 성은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둘이 떨어져 있을 때는 연애편지가 런던과 히버 성을 오갔다. 둘은 교황이 왕의 이혼을 허락할 날만을 기다렸다. 교황의 거부 소식에 왕은 분노했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종교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왕은 국교회를 세웠다.(1534년 수장령) 피바람이 불었지만 왕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잉글랜드는 교황의 권위로부터 벗어났다. 교황의 족쇄로부터 풀려나자마자 헨리 8세는 이혼을 했고 그토록 원하던 앤과 결혼했다. ◇사랑을 위해 왕은 종교까지 바꾸다


왕과 앤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대륙의 신교 세력은 강력한 우군을 얻게 됐다. 이는 미래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터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이는 딸이었다. 왕은 딸에게 '엘리자베스'란 이름을 지어줬다. 애타게 기다리던 왕자는 생기지 않았다. 왕은 실망했다. 조바심이 난 앤은 주변은 물론이고 왕에게조차 히스테리를 부렸다. 연애 시절 앤의 모든 것을 받아주던 왕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히버에서 타올랐던 사랑은 런던에서 차갑게 식었다. 왕에게 새로운 여자가 나타남으로써 앤의 운명은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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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불린이 처형된 곳은 오늘날 런던탑 안에서도 유명한 관광지이다. 단두대가 놓였던 자리에는 앤 불린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가 설치돼 있다. 기념비 가운데에는 유리 쿠션이 놓여 있다. 그녀가 죽음 직전에 목을 뉘었을 법한 쿠션이다. 종교까지 바꿔가며 완성시킨 사랑이었다. 그 끝이 이런 식의 죽음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애절하고 씁쓸하다. 인생이란 그런 것일까?


PS. 앤의 이야기는 끝이 아니다. 25년 후, 앤의 딸 엘리자베스가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랐다. 여왕은 어머니의 비극을 가슴에 묻었다. 잉글랜드를 어머니를 위한 복수극의 무대로 만들기보다는, 세상이란 더 넓은 무대로 이끌었다. 앤 불린의 사랑은 결국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 속에서 극히 드물게 볼 수 있는 짜릿한 반전이다.


헨리8세의 여인들, 끝은 좋지 않더라 6명의 부인, 처형 등 겪어


결혼을 많이 한 헨리 8세는 결혼의 끝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첫 부인 아라곤의 캐서린은 24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이혼당했다. 그녀가 합의 이혼을 거부해 영국의 종교가, 역사가 바뀌었다. 둘째 부인 앤 불린은 아들을 낳지 못한 데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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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부인 제인 시모어는 왕이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았다. 밝은 미래가 보장됐으나 산후 후유증으로 죽었다. 넷째 부인 앤 클레브는 외모 때문에 결혼 직후 왕과 합의 이혼했다. 고향인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죽을 때까지 헨리 8세와 오누이처럼 사이좋게 지냈다. 다섯째 부인 캐서린 하워드는 앤 불린과 사촌지간이었다. 앤과 달리 진짜 간통을 저지르다 발각돼 정당하게 처형됐다. 여섯째이자 마지막 부인인 캐서린 파는 따뜻한 품성과 지성으로 말년의 헨리 8세에게 큰 위로가 됐다. 왕의 사후 재혼했으나 오래 살지는 못했다.


[히버 성·런던탑=송동훈 문명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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