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 소답게 사는 세상이라야 사람도 사람답게 삽니다”
[아무튼, 주말] 목초먹고 뛰노는 한국에서 가장 행복한 소
“요들레이 요들레이 요들레이….” 축사에 들어서자 경쾌한 스위스 요들송이 흘러나왔다. 센서로 작동되는 자동 개폐식 지붕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곳을 통해 밝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희한하게도 축사 특유의 독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대신 구수하면서도 사과와 살구를 연상케 하는 새콤한 냄새가 목초에서 풍겼다.
누런 털에 윤기가 반질반질 흐르는 한우 100여 마리가 수소·암소, 송아지로 칸칸이 나뉜 널찍한 축사에서 목초를 혀로 감아 입으로 밀어 넣거나 배 깔고 주저앉아 한가로이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2021년은 신축년(辛丑年), 흰 소의 해다. 소는 인류의 오래된 동반자다. 개에 이어 두 번째로 가축화한 동물로 알려졌다. 한민족에게 소는 함께 고생하며 살아가는 식구나 마찬가지였다. 소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정월 들어 처음 맞는 축일(丑日)은 ‘소날’이라 하여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콩을 많이 넣고 쑨 쇠죽을 먹였다.
인간 버금가는 대접을 받으며 살던 소가 요즘은 어떻게 지낼까. 지난 12일, 우리나라에서 가장 행복한 소들이 산다는 전남 장흥 월정마을 ‘풀로만목장’에 다녀왔다.
◇타고난 식성대로 풀만 먹인다
풀로만목장의 모토는 ‘사람은 사람답게, 소는 소답게’이다. 목장 대표 조영현(67)씨는 자기가 키우는 소들이 국내에서 가장 행복한 소라고 자부한다. 그는 “소도, 사육하는 농가도, 소고기를 먹는 소비자도 모두 행복해지는 게 목표”라고 했다. 그 시작이 행복한 소이며, 이를 위해 그는 소에게 곡물 배합 사료나 볏짚을 먹이지 않는다. 오로지 풀(목초)로만 키운다. 그래서 풀로만목장이다. 풀만 먹고 자란 어미에게서 태어나 풀만 먹으며 성장하는 소는 국내에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조 대표는 “소는 풀을 먹어 소화하는 데 최적화된 몸”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요즘처럼 마른 볏짚을 통째로 먹이지 않았어요. 봄부터 가을까지는 들판의 푸른 풀을 먹였고, 겨울엔 짚을 잘게 썰어서 푹 삶은 쇠죽을 쒀서 줬지요. 볏짚이 얼마나 억세면 옛날에 짚신을 만들어 신었겠어요. 그걸 그대로 먹이면 소의 위를 깎아 버립니다. 요즘 볏짚 먹여 키운 소를 도축하면 위 안쪽 벽을 빽빽하게 덮은 융모(絨毛)가 대부분 손상된 상태입니다.”
배합 사료를 먹이지 않는 건 소들이 건강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곡물을 많이 먹은 소는 위염 등 문제가 생기기 쉽다. “곡물 배합 사료와 볏짚은 소가 잘 소화하지 못해요. 그래서 소똥에 옥수수 알갱이나 볏짚 조각이 들어있어요. 그것들이 썩으면서 악취가 나죠. 하지만 목초로 키운 소똥은 냄새가 나지 않아서 축사가 쾌적해요. 마르면 가루 형태가 돼 바로 논밭 거름으로 쓸 수 있고요.”
게다가 배합 사료에는 비타민A를 의도적으로 적게 넣었다는 것이 조 대표 주장이다. “비타민A는 털, 근막, 생식기 등 상피세포를 관장합니다. 상피세포가 약해야 지방이 근육(고기) 속으로 침투하기 쉬워지니 (의도적으로) 안 먹이는 거죠. 초식동물인 소는 원래 근육 내 지방이 침착되기 어려운 구조거든요. 이렇게 사료 성분을 조절해 고기의 마블링을 높이는 기술을 사료 회사에서는 ‘컨트롤 테크닉(control technique)’이라 불러요.”
조 대표는 가축 사료에 해박하다. 1990년부터 30여 년간 사료 관련 일을 해왔다. 2004년부터 5년 동안 미국 최대 건초 가공 회사 ACX 한국 법인장도 맡았다. 20여 년 전부터 소를 잘 키우려면 목초를 먹여야 한다고 주변에 알렸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마블링이 잘돼야 높은 등급을 받고 비싸게 팔 수 있는 현행 소고기 등급제 때문에 한우 농가들이 사육 방식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운동장에서 맘껏 뛰놀게 한다
좋은 음식을 먹은 사람이 건강하듯, 좋은 풀을 먹인 소가 건강하고 행복하다는 신념을 실천해 보여주기 위해 2011년 직접 목장을 세웠다. 두 달 된 한우 송아지 12마리를 사다 키우기 시작해 현재 100여 마리를 키운다. 그는 “목초 두 종류를 먹인다”며 “목초(hay)와 짚(straw)은 다르다”고 했다.
“목초는 영양이 많아서 소에게 먹이면 좋은 풀이고, 짚은 아무 영양이 없죠. 우리 목장에서 소들에게 먹이는 목초는 유기농 라이그래스(ryegrass)와 알팔파(alfalfa)입니다. 인근 장흥 농가에서 계약 재배한 라이그래스는 섬유질이 풍부합니다. 미국에서 수입한 알팔파는 ‘목초의 여왕’이라고도 하는데, 단백질과 칼슘 함량이 높습니다.”
부족한 영양소 보충을 위해 미네랄·비타민제와 천일염도 먹인다. 전남 신안 신의도에서 박성춘씨가 생산하는 명품 토판 천일염이다. 일반 천일염보다 6배 가까이 비싼, 사람도 먹기 어려운 소금이다. 조 대표는 “박 대표에게 우리 고기를 주고 물물교환으로 받는다”며 웃었다. 소들이 마시는 물은 지하 120m에서 퍼 올린다. 사람이 마셔도 될 만큼 깨끗하다.
소가 행복해지는 데 먹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건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공간. 풀로만목장 축사 한 칸은 가로·세로 8×8m로, 여기에 한우 5마리씩 키운다. 조 대표는 “보통 가로·세로 8×4m 칸에 3마리를 키우는데, 그에 비하면 훨씬 넓다”고 했다. 여기에 약 3000평 규모 운동장이 있어서 소들이 뛰어놀게 했다. 국내 사육하는 소들이 도축장에 갈 때까지 바깥에 나와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과는 큰 차이다.
소를 운동장 갖춘 축사에서 목초를 먹이며 키우는 걸 조 대표는 ‘한국형 사육 모델’이라고 부른다. “미국이나 호주처럼 소를 풀어놓는 방목형과 한국처럼 가둬 키우는 계류식 양쪽의 장점을 살린다는 뜻입니다. 축사에서 풀을 먹이고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며 스트레스를 최소화하자는 겁니다.”
조 대표는 소들에게 24시간 요들송도 들려준다. 그는 스위스 현지 요들 대회에도 참가했던 요들 전문가다. 세상에서 가장 긴 악기라는 알프호른(alphorn)도 연주한다. “요들송을 틀어주면 소들이 더 느긋해지는 것 같아서요(웃음).”
◇씹을수록 고소한 옛날 고기 맛
한우 사육 농가들이 곡물 배합 사료를 선호하는 건 등급 높은 소고기 생산 때문만은 아니다. 배합 사료는 작고 단단하게 뭉친 펠릿(pellet) 형태라 먹이기 쉽다. 반면 목초는 씹어서 소화하는 데 오래 걸린다. “배합 사료를 주면 소 100마리를 15분이면 먹일 수 있어요. 아침·저녁 하루 2번만 주면 되고요. 목초 먹이려면 2시간이 걸리고 하루 3번 줘야 해요. 소의 소화력이 떨어지는 여름에는 6번에 나눠 줘야 하고요. 소 먹이는 일 때문에 목장 시작하고서 10년간 아내와 함께 외출해본 적이 없어요. 주변에선 ‘소들은 행복한데 사람이 불행하다’고 해요(웃음).”
다행히 인근에서 소를 사육하는 젊은 농가들이 조 대표의 방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료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어요. 소가 건강해져 약을 덜 쓰고 수의사를 덜 불러도 되니 금전적으로 이익이 되거든요. 모두 저처럼 하라는 건 아닙니다. 제가 (양팔을 벌리며) 이쪽 끝에 있고 관행 사육 방식이 저쪽 끝이라면, 중간에 오면 돼요.”
풀만 먹여 생산한 소고기를 찾는 소비자도 차츰 늘고 있다. 풀로만목장에서는 매달 소 한 마리를 잡는데, 대개 2등급을 받는다. 마블링이 적어서인데, 고기 가격은 1kg당 최하 8만원부터 가장 인기 많은 안심은 20만원으로, 최상 등급(1++) 뺨치게 비싸다. 그런데도 일부 인기 부위는 선금을 내고 걸어놓은 예약이 길게는 2년 뒤까지도 잡혀 있다. 조 대표가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 공지하고 휴대전화(010-4493-4507)로만 주문 받아 판매하는데, 전체 소고기의 80%가 사전 판매된다고 한다. “양질의 단백질을 섭취해야 하는 암 수술 환자, 아토피 환자 등이 우리 고기를 찾습니다.”
미식가들 사이에서도 풀 먹여 키운 소고기가 관심을 받고 있다. 조 대표와 함께 소고기 여러 부위를 구워 시식했다. 살살 녹는 연한 고기는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질기거나 퍽퍽하지도 않았다. ‘탄탄하다’는 표현이 적확할 듯하다. 맛과 향이 버거울 수도 있을 만큼 진하고, 소금을 전혀 찍지 않아도 싱겁지 않았다. 씹을수록 고소한 육즙이 배 나왔다. ‘고기는 씹는 맛’이란 말이 뭔지 알 듯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드시고 ‘옛날 소고기 맛’이라고들 하십니다.”
[장흥=김성윤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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