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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조선일보

설악산 조난 사흘... 77세 노인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아무튼, 주말] 설악산 실종자 조모씨의 생존기


지난달 중순, 홀로 설악산을 오르던 70대 남성이 길을 잃었다. 사흘 동안 산속을 헤맸고, 기력이 다할 무렵 기적적으로 119구조대에 구출됐다. 반응은 엇갈렸다. ‘구조돼서 다행’이라는 반응이 다수였지만,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친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가을이지만 밤이면 영하에 가까운 날씨, 강원도의 험한 산속에서 노인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를 직접 만나 당시 상황을 들었다.

스스로 지름길 찾다가 길 잃어

서울 잠실에 사는 조모(77)씨는 50대가 되자 본격적으로 등산을 다녔다. 그는 특히 겨울 설악산을 좋아했다. 산꼭대기인 대청봉을 스무 차례 오를 정도였다고 했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으면서, 건강하게 등산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달 13일 새벽 4시쯤 잠에서 깨자마자, 그는 출발했다. 예정에 없던 등반이었다.


코스는 설악산 ‘장수대’를 시작으로 서북 능선의 중간 구간인 ‘귀때기청봉’을 넘어 ‘한계령’으로 내려오는 길로 짰다. 약 11km, 10시간 남짓 걸리는 코스였다. 그래도 남교리 십이선녀탕 계곡에서부터 산을 오르는 것 보다는 짧다는 생각에 그날 저녁 서울로 돌아오겠다고 아내에게 알렸다.


곧장 평소처럼 준비물을 챙겼다. 두껍지 않은 검은색 등산복 차림에, 머리에는 통풍이 잘되는 여름 모자를 썼다. 지게 모양 배낭에는 휴대전화 보조 배터리와 머리에 맬 수 있는 랜턴을 넣었고, 가을 추위에 대비해 얇은 패딩 점퍼와 바지도 챙겼다. 음식으로는 아내가 만들어준 새우튀김밥을 0.5ℓ 크기 보온 밥통에 가득 눌러 담았고, 간식으로 9g 용량의 찹쌀 과자 5봉지, 초코파이 2봉지, 견과류 1봉지, 귤 3개, 사과 1개를 넣었다. 1 ℓ를 담을 수 있는 보온 물통에는 따뜻한 물을 담았고, 500ml 크기 생수 3개도 배낭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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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5일, 사흘간 실종됐던 조모씨가 설악산 귀때기골 인근에서 구조되는 모습. 구조당시 조씨는 건강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아침 6시 50분. 그는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강원도 인제군 장수대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8시 40분쯤 장수대에 내려 등반을 시작했다. 강원지방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설악산의 최저기온은 섭씨 2.9도였고, 체감 온도는 영하권이었다. 2시간 정도 지나 해발 1210m 높이의 대승령에 다다를 무렵 배가 고팠다. 그는 새우튀김밥을 반 그릇가량 먹고 다시 산행을 이어갔다. 약 5km를 더 걸어 오후 2시가 되자 그는 귀떼기청봉에 있는 ‘너덜 지대’를 지나게 됐다.


그때부터 서서히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좀 더 빨리 목적지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정해진 등산길이 아닌 다른 지름길을 찾았다. 때마침 그의 눈앞에는 나무에 붙은 안내 표지가 있었다. 다른 등산객이 알려주는 길이라는 생각에, 그는 나무들을 따라 1시간 넘게 걸었다. 그런데도 찾았던 지름길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점점 인적이 없는 계곡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뭔가 잘못돼 가고 있다고 깨달았다. 온 길 그대로 되돌아갈 생각도 했지만, 힘이 떨어지면서 포기했다. 조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산에서는 자기 멋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정말 잘못했다”고 말했다.


오후 4시가 되자, 주변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조씨는 계곡과 바위를 벗어나 산기슭으로 몸을 옮겼다. 나뭇잎을 모아 잠을 잘 만한 곳을 마련해 배낭에 몸을 기댔다. 그 무렵 ‘어디에 있는지, 왜 연락이 되지 않는지’를 묻는 아내의 문자 메시지가 하나둘 들어왔다. 조씨는 답장과 전화를 시도했지만, 불가능했다. 왜 문자 수신은 가능한데 송신이나 통화는 불가능하냐는 질문에 KT 관계자는 “산속에 기지국 전파가 안 닿는 음영 지역이 있는데 아주 희미하게 기지국과 연결이 됐다가 문자만 수신된 걸로 봐야 한다”고 했다.


결국 그는 휴대전화를 껐다. 배터리가 방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배터리 용량이 약 60% 남은 시점이었다. 대신 가져온 넥워머와 패딩을 껴입고, 최대한 몸을 따뜻이 하려고 등산 양말 안에 바지를 넣었다.


약 2시간 정도 잠을 청했다. 하지만 추위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체온을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에 오후 8시부터 가져온 랜턴을 모자에 매달아 길을 밝힌 뒤, 돌아온 것으로 생각한 길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그 무렵 조씨 가족은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고 경찰과 소방 당국에 실종 신고를 했다. 조씨는 그렇게 어둠 속을 헤매 다녔고, 다음 날(14일) 아침 6시까지 밤새 걸었다. 소방서와 경찰에서는 조씨 구조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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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5일 밤, 구조되는 조모씨의 모습

휴대전화 배터리 아끼고, 밤새 걸어 체온 유지

날이 밝아지자, 그는 처음 잠을 청했던 자리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사실을 알게 됐다. 날이 어두웠던 탓에 헛걸음한 것이다. 이후 남은 새우튀김밥과 물, 과자, 과일 등을 먹고 다시 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길은 보이지 않았고, 또다시 밤이 찾아왔다. 그는 전날처럼 걸으면서 추위를 피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있던 주변이 급경사 지대여서 자칫 추락할 위험이 컸다. 결국 근처 아름드리나무 밑에 배낭을 놓고 잠을 청했다. 선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셋째 날 아침, 그는 다시 길을 찾아 나섰다. 더는 혼자 찾기 어렵겠다는 생각에 꺼놨던 휴대전화도 켰다. 그러다 급경사에서 발을 헛디디면서 약 10m를 굴러떨어졌다. 이 사고로 갈비뼈 하나가 부러지고, 하나는 금이 가는 부상을 입었다. 오후 4시가 되자 다시 해가 지기 시작했고, 더는 서 있기조차 힘들어졌다. 조씨는 “젊은 여성이 눈에 나타나는 등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고, 과거 가족에게 미안하게 했던 기억 등이 스쳐갔다”며 “이러다가 목숨을 잃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인근 풀밭에 자리를 잡고 배낭에 몸을 기댔다. 그런데 오후 5시 3분이 되자 갑자기 휴대전화에 ’119에서 긴급 구조를 위해 귀하의 휴대전화 위치를 조회하였습니다'라는 문자 메시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119 소방대가 자기를 찾고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가지게 됐다. 조씨는 5시 22분쯤 ‘현재 계곡에서 탈진 상태로 떨고 있습니다. 구조해주세요’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때부터 7분이 지나 설악산에 있는 ‘백담 기지국’은 조씨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때마침 소방청과 경찰 등으로 구성된 구조대 70여 명은 조씨의 생존 사실을 모르는 채 구조를 중단하고 하산하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특별한 단서 없이 더는 구조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순간 조씨가 보낸 문자 한 통으로 조씨의 휴대전화가 있던 위치가 대강 파악됐고, 구조대원들은 다시 조씨의 휴대전화가 감지된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결국 밤 10시 40분쯤 구조대는 설악산 ‘귀때기골’ 인근에서 조씨를 발견했다.

"민폐 끼쳐 죄송… 다시는 같은 코스 안 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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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본지와 만난 조씨. 그는 착용했던 헤드렌턴을 켜고, 설악산 사진을 놓고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조씨는 “늙은이 한 명이 잘못 판단해서 너무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쳤다”며 미안해했다. 그는 자신의 생존에 대해 “소방청 구조대원의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험한 산에 간다면 반드시 가족에게 시간대별로 어디에 있을 예정인지를 알리고, 정해진 등산로가 아니면 절대 다녀서는 안 되겠다”고 했다.


구조에 참여한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 관계자는 “조씨는 전문 산악인은 아니지만 워낙 설악산을 많이 다녔고, 70대 나이에도 체격이 좋고 음식과 장비를 잘 갖췄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었다”며 “일반 등산객이었다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씨에게 다시 설악산 등반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설악산 서북 능선(실종 구간)은 더는 찾지 않을 것이고, 설악산 다른 코스를 찾게 된다면 가족과 함께 나서겠다”며 “등반하는 분들은 꼭 119앱을 깔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곽창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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