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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조선일보

“살암시믄 살아지매”… ‘한국의 오프라 윈프리’가 제주에서 사는 법

[아무튼, 주말] [허윤희 기자의 발굴]

[아무튼, 주말] [허윤희 기자의 발굴]

여성학 스타 강사이자 방송인

오한숙희는 왜 서귀포로 내려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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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질주하던 기관차가 어느 날 멈춰섰다. 대중에게 사랑받던 여성학자이자 방송인, 베스트셀러 저자였던 오한숙희(63)에게 번아웃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팔다리 힘이 빠졌고, 목덜미로 열이 확 올랐다. 어렵사리 잠들었다가 깨면 새벽 2시.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됐나.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2014년 3월 일이다.


그는 1990~2000년대 초반 여성학이라는 낯선 단어를 대중에게 전파한 ‘시대의 아이콘’이다. 거침없는 입담으로 여성 관련 생방송을 진행한 ‘한국의 오프라 윈프리’였다. 전국을 돌며 3500회 넘게 강연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비행기 타고 가서 강연하고, 그날 김포공항으로 돌아와 곧바로 광주에 가서 강연할 정도였다. 책을 13권 냈고, 일주일에 고정 칼럼을 4편 썼다. 하도 말을 많이 해서 턱 관절 보호대를 찬 적도 있다는 전설 같은 일화도 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그는 집을 떠났다. 반드시 건강해져서 돌아와야 한다는 가족들의 기원이 배수진이 됐다.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팔도 사방을 떠돈 끝에 남쪽 끝, 제주로 갔다. 며칠 놀고 가라는 선배 권유에 잠시 쉬어 가려 했는데 며칠이 한 달이 됐고, 한 달이 석 달이 됐다. 그리고 제주에서, 마침내 편안해졌다.


연로한 어머니, 둘째 딸의 장애, 생계를 책임진 가장. 삶의 조건은 여전했지만 그는 다시 행복해졌다. 가족과 완전체로 제주 서귀포에 정착한 그는 8년째 푸른 바다와 하늘에 기대어 살고 있다. 치열한 도시 한복판에서 강한 화력을 뿜어내던 파이터 여성학자는 제주에서 무엇을 발견한 걸까.


“궁금하면 오세요, 제주로!” 수화기 건너편에서 그가 호탕하게 외쳤다.


◇방랑의 종착지가 제주섬일 줄이야


오한숙희는 서귀포 바다처럼 쨍하게 파란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오후 4시 40분엔 우리 딸이 발달장애인 주간활동센터에서 돌아오고요. 그 전까지는 자유!” 한창때 얼굴보다 야위었고 머리칼이 희끗했지만 목소리는 또랑또랑 힘이 넘쳤다.


-제주 오니 뭐가 좋은가요.


“일단 자연이 있어서 좋고, 느려서 좋아요. 서울에 있었다면 여전히 지하철역에서 뛰면서 3분 후에 또 올 지하철 타려고 앞사람을 제치고 있겠죠.”


-왜 도시를 떠난 겁니까.


“딸 때문인데, 요즘은 딸 덕분이라고 말해요. 자폐성 장애가 있는 작은딸은 도시의 속도를 못 따라가요.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3년을 집에 있었어요. 서울 집 정리하고 김포로 옮겼는데, 김포에는 딸을 맡길 수 있는 발달장애인 주간활동센터가 없었거든요. 등급제가 없어졌지만 딸은 발달장애 중에서도 중증이라 의사소통이 어렵고 서른이 된 지금도 양치를 혼자 못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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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옆에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겠네요.


“제가 결혼 5년 만에 이혼했는데, 나가서 일을 해야 했으니까 엄마랑 독신인 작은언니가 두 딸을 같이 키워줬어요. 팔순 넘은 어머니와 자폐성 장애를 가진 딸, 남겨진 삶의 무게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딸의 앞날을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은 내 책임이니까, 장애가 있는 자식은 엄마가 올인할 때 좋아진다는 세상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죠. 2013년 가을, 남은 생을 엄마 노릇만 하며 살겠다고 선언했어요. 경기도 이천에서 아이와 단둘이 7개월을 지냈습니다.”


-단둘이 살기가 어땠나요.


“사투의 시간이었죠.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말하고 글 쓰는, 그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없으니 서서히 마음의 병이 왔어요. 내 언어를 잃어버린 거죠. 큰언니 내외가 강원도 산골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형부가 “그냥 여기로 오라”고 했어요. 다시 가족 품에 안기니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어요. 눈 뜨면 밥이 차려져 있고, 저녁이면 둘러앉아 삼겹살에 막걸리 한잔 하고.”


-그런데 번아웃이 온 겁니까.


“이상하죠. 두 달 지났는데 갑자기 몸을 일으킬 수가 없어요. 밥도 먹기 싫고, 잠도 못 자고. 모든 우울증은 등 따습고 배불러서 오는 거라고 얼마나 자책했나 몰라요. 정신 차리자고 나를 다잡았는데, 그랬더니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증세가 생겼어요. 가족들은 ‘떠나라’고 했어요. 허공을 돌다 돌다 헛바람 다 빠지면 저절로 집 마당에 내려올 테지 하고요.”


-다시 일을 시작하는 건 어땠을까요.


“생각해보세요. 내가 부모 형제 신세 안 지려고 ‘내 딸 내가 키우겠어요’ 선언하고선 7개월 사투 끝에 실패한 건데, 이제 와서 애만 맡겨놓고 빠질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전국으로, 방랑 여행을 다닌 거예요. 그러다 서울에 강의가 하나 잡혀서 김포공항에 내렸는데, 공황장애가 왔어요. 심장이 막 뛰더라고요. 겨우 강의 끝내고 그날 밤 제주로 내려온 게 오늘까지 온 거예요.”


-이제는 치유가 됐나요.


“자연 속에서 살면서 저절로 치유된 것 같아요. 물론 병원도 다니고 신경안정제도 먹었지만, 여기서 어머니랑 함께 살면서 안정을 찾았어요. 어머니는 제주 내려오고 15개월 후에 돌아가셨어요. 새벽 3시에 밤참 드시고 저랑 침대에 누워서 영화 ‘쿵푸팬더 3′ 보시다가 조용히 눈을 감으셨죠.”


◇나는 말 무당으로 태어났다


오한숙희는 스스로 “말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한다. “돌이켜보니 저는 ‘말(言) 무당’이었고, 여성학과 여성운동은 ‘현대판 굿마당’이었어요. 팔자소관이니 참고 살아라가 아니라, 내 팔자는 내가 만든다는 해법을 주는 과학적인 굿. 사람들을 태우고 달려서 속 시원한 세상에 데려다주는 것이 내 사명이었고, 그 본분을 다하는 동안에만 신명 나게 살 수 있었죠.”


-똑 부러지는 말투, 거침없는 화법으로 방송에서 활약했죠. 방송 데뷔는 어떻게 한 겁니까.


“찬반 토론에 나갈 패널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지인한테 전화를 받았어요. ‘맞벌이 찬반 토론이래. 너 찬성이지? 여자들을 위한 일이니까, 한번 나가주라.’ 1989년 계명대 강사 하던 때인데 한창 혈기 왕성했죠. 지금 생각하면 ‘맞벌이’가 토론 거리가 되나 싶지만, 그 시대엔 심각했어요. 상대편 남자 교수가 ‘그럼 애는 누가 키우냐. 엄마가 키우지 않은 애들은 다 문제아가 된다’면서 반대했죠. 그럼 또 제가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반박하고요. 바로 치고 들어가니까 토론에 불이 붙었다고, 담당 PD가 다음에 또 불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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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자에서 생방송 진행자로 발탁된 거군요.


“그렇게 ‘집중토론 여성’에 네 번 출연했고, 이 프로그램이 70분짜리 토크쇼 ‘생방송! 여성’으로 바뀌면서 1990년 진행자가 됐어요. 방송은 하나도 몰랐지만 제가 공감력 하나는 끝내주거든요. 떨린다고 방송 전에 청심환 삼키는 출연자들에게 ‘동네 아줌마라고 생각하고 나만 보고 얘기하면 된다’고 다독여주는 게 제 역할이었어요. 수더분한 아줌마가 가려운 데 속 시원히 긁어준다고, 열광하는 여성이 많았죠.”


-타고난 방송 체질이었네요.


“접신한 것처럼 말 무당이 돼서 신나게 했어요. 작가들이랑 신문 뒤져가면서 이슈를 찾고, 아이템 정하고 대본 쓰고, 사례자 섭외까지 내가 같이했으니까. 그 뒤로는 완전히 방송인 다 됐죠. 다른 방송사에서 남자들 얘기 듣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요.”


-다시 방송에 나올 계획은 없나요.


“사람들이 가끔 길에서 만나면 ‘왜 요즘은 TV에 안 나오세요?’ 하고 물어요. 그러면 ‘이제 제 시대는 갔어요’라고 답합니다. 그때는 시대적으로 여성학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방송에서도 여성들 목소리를 담으려는 시도가 많았어요. 시대가 원한 프로그램이었고, 저는 거기에 도구로 쓰였던 거죠.”


-딸에 대한 의무감도 활동을 중단한 원인이 된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제 경우는 감사하게도 엄마랑 언니가 늘 백업을 해줬기 때문에 일할 수 있었고, 아이랑 여기 내려왔을 때는 제 나이 쉰다섯이었어요. 은퇴 후 삶을 생각할 때였죠.”


◇“여성 100명에겐 페미니즘이 100가지 있다”


스물세 살까지는 성차별에 대해 별생각 없이 살았다. 가난한 집 막내딸로 태어나 두 언니의 자발적 진학 포기와 취업을 밑거름으로 대학생이 됐다.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어렵게 들어간 직장 생활은 난생처음 겪는 차별의 시간이었다.


-어떤 차별이었나요.


“여중, 여고, 여대를 다니다 1983년 대학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갔는데 ‘미혼 각서’라는 게 있었어요. 결혼하면 무조건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각서였죠. 1년 만에 그만두고, 여성학을 공부하려고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지금은 그때와 달라졌다고 봅니까.


“굉장히 많이 달라진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죠. ‘82년생 김지영’ 보세요. 인권에 대한 의식은 올라왔는데, 거품을 걷어내면 여성들이 겪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어요.”


-’이대남 대 이대녀’로 대표되는 젠더 갈등이 어느 때보다 심각합니다.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세대는 ‘여기 가부장제 뿌리가 있어. 유리 천장 있잖아’ 하는 세대였고, 지금 세대는 ‘뿌리 뽑아’라고 하는 세대니까요. 과거엔 인지 단계였다면, 이제 뿌리를 캐내는 실천 단계로 간 거죠. 그래서 갈등이 극렬해진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또 예전에는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홀로 외치던 여자들은 허난설헌처럼 죽어갔지만, 이제는 여성 공동체가 커지고, 소셜미디어로 서로 연대하고 집단화하면서 여기서 끓고 저기서 끓는 거죠.”


-여성계가 권력화하고 변질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똑같은 페미니스트라도 개별 사안에 대해선 의견이 다를 수 있어요. 그만큼 잔뿌리가 생긴 거죠. 예전엔 1세대 여성학자인 이효재를 중심으로 거대하게 뿌리 하나가 내렸다면, 이제는 거기서 잔뿌리들이 막 만들어진 거예요.”


그는 “여성이 100명 있으면 페미니즘이 100가지 있는 거다. 사실 이제는 남녀 차이보다 세대 차이가 더 큰 것 같다”며 “명색이 여성학자인 나도 서른다섯 살인 큰딸하고 여성 문제로 자주 싸운다”고 했다. 딸은 “그 단어 이상해. 페미니스트라면서 어떻게 그런 단어를 쓸 수 있어?”라고 따지고, 엄마는 “이 단어가 어때서. 너흰 너무 작은 거에 집착한다”고 반격하는 식이다. “딸이 맨날 야단쳐요. 엄마가 제주에 있는 8년 동안 업데이트가 하나도 안 됐으니, 어디 가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말라고(웃음).”


-여성학자에게 여성학 가르치는 딸이네요.


“그래서 선배 중 하나는 ‘나이 육십 넘으면 입은 닫고 지갑만 열라’고 해요. 젊은 애들한테 훈계하려고 하지 말고 듣기만 하라고. 여성운동 하는 제 친구들도 다 그래요. 딸들이 그렇게 엄마를 공격한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고 했잖아요. 요샌 시누이가 올케 언니의 내부 변호사가 된대요. 젊은 여성들은 팔이 안으로 굽지 않아요. 그만큼 진화한 거죠.”


◇장애가 아니라 독특한 개성


제주에서 그는 작은딸 희나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아이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느리지만 남들과 소통할 수 있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아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 집안에 원래 ‘그림 DNA’가 있었는데 그걸 미처 몰랐어요. 엄마도 칠십 넘어 그림을 그리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었고, 큰딸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그림을 전공했어요.”


-희나도 제주에 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요.


“벌써 개인전도 열었어요. 얘가 네댓 살 때 밤새 안 자고 그림을 그렸는데, 안 자고 뭐 하나 보면 크레파스로 스케치북에 색칠을 하는 거예요. 벽에도 그리고, 할머니 경대에도 그리고, 보이는 데마다 선을 그었어요. 지금도 희나 작품은 일관된 화풍이에요. 하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화제가 되면서 재능 있는 장애인들이 조명을 받았습니다. 우영우가 너무 천재라서 자폐 장애를 가진 가족들이 오히려 좌절감을 느낀다는 기사도 났는데요.


“저는 아주 좋게 봤어요. ‘우블’에 나온 정은혜 작가나 천재 우영우 변호사가 장애인에 대한 이미지를 많이 바꿔줬잖아요. 그것만으로도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봐요. 우영우가 로스쿨 수석이라 드라마에서 사람들이 선망하잖아요. 예전에 가수 이적 엄마인 박혜란 선배가 그런 얘기를 한 적 있어요. ‘내가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이라는 책을 냈는데, 아들 셋이 서울대 갔기 때문에 이 책이 팔리는 거지 그러지 않았으면 팔렸겠냐’고요(웃음).”


-’우블’에 출연한 발달장애 화가 정은혜씨와는 친분이 있던데.


“은혜 엄마랑 친구라서 걔가 다섯 살 때부터 재능을 봤죠. ‘우블’에서 인상적인 건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장애인의 존재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대부분 숨기고 쉬쉬하며 키워서 이들이 사회에 나왔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잖아요. 우리 큰딸은 한지민이 맡은 역할에 완전히 공감했다고 해요. 부모가 죽고 발달장애 동생을 혼자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어려서부터 자기가 결혼하는 건 동생한테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는데, 너는 부담 갖지 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자기 운명’이라고 얘기해요. 드라마에서 제주도 할망 공동체가 아이를 따스하게 수용하는 걸 흥미롭게 봤어요.”


그는 2018년 ‘사단법인 누구나’라는 단체를 창립했다. ‘누구나 예술로 소통한다’는 주제로 발달장애인, 노인, 결혼 이주 여성들이 예술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적이다.


-계기가 있었나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해 4월부터 서귀포 장애인 부모회와 연결돼서 희나가 야간 돌봄 교실을 다니게 됐어요. 아이 데려다 주면서 보니까 20대 청년 둘이서 매일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갱지에 볼펜으로 열심히 그리는데, 갈 때마다 똑같은 걸 그리는 거예요. 저 친구들이 분명 재밌고 좋으니까 할 텐데, 평일에 매일 두 시간이면 일주일에 10시간, 1년이면 480시간이에요. 그 엄청난 시간을 저 친구들에게 미술 지원을 해주면 좋겠다 생각했죠. 때마침 원희룡 당시 제주 지사가 양성평등위원회를 만들었고, 제가 ‘돌봄소통상생분과’ 위원으로 들어가면서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수 있었어요.”


그는 “발달장애 친구들이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면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했다. “작가 선생님들께 부탁했어요. 애들을 가르치지 말고, 이들이 그리는 대로, 옆에서 봐주기만 하면 된다고요.”


-그런데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아이들 작품 모아서 서귀포 예술의전당에서 전시회를 했는데, 공무원 한 분이 저한테 고백했어요. 너무 미안하고 부끄럽다고. 장애인들 작품이라서 수준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작품 자체로 감동을 받았다고요. 아이들도 달라졌어요. 예전에 한 아이가 버스에서 어른들이 ‘쟤 엄마가 아이 가졌을 때 뭘 잘못 먹었나 보다’ 하고 수군거리는 걸 듣고, 집에 가서 물었대요. ‘엄마, 나 가졌을 때 뭐 잘못 먹었어?’ 그걸 듣는 엄마 가슴이 찢어지죠. 그런데 지금은 ‘그림 잘 그리게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해요.”


-예술의 힘이네요.


“더 놀라운 건 엄마들이에요. 아이가 스스로 뭔가를 해보려고 하고, 작가라고 불러달라는 걸 보면서 매니저 의식이 생긴 거죠. 한 엄마는 ‘아이의 자존감이 곧 내 자존감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어요.”


그는 “제주에 와서 우리 희나는 장애가 아니라 독특한 개성을 가졌다고 생각하게 됐다”며 “딸이 자랄 때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같이하면서 매일 나 자신이 채워지고 있다”고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희나랑 숲길을 걷고요, 어린이집 보내듯이 등하교시키고 함께 수퍼에 가고요. 아이가 주간활동센터에 가있는 동안은 명숙 언니(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랑 수다 떨고. 이 친구들 전시 기획하고, 같이 준비하는 게 너무 행복해요.”


-득도(得道)하셨네요.


“장애아 키우는 부모들은 화장하면 다 사리 한 줌씩 나올 거예요(웃음).”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이 깊은 이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제주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이 있어요. ‘살암시믄 살아지매.’ 살다 보면 다 살아진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목욕탕 원리’라고 부르는 게 있어요. 자기 등은 스스로 못 밀잖아요. 그러니 무슨 일이든 혼자 끙끙대지 말고 주변에서 멘토를 찾으세요.”


[서귀포=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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